▲ 이영종 중앙일보 통일전문기자.
[시사위크] 크리스마스는 한 해를 마무리하고 신년 계획을 세우기 시작하는 계기가 된다. 대부분의 국가에서 특정 종교의 이벤트라기보다는 문화로 자리 잡은 게 사실이다.

올해 크리스마스는 녹록치 않은 국내 경제상황에다 정국 혼란까지 겹쳐 예년보다 좀 썰렁한 기분이 들기도 한다. 캐럴 소리를 듣기 힘들다는 얘기도 나온다. 하지만 마음만이라도 넉넉하게 갖고 사랑하는 가족이나 친구들과 함께 사랑을 나눌 수 있는 시간이 됐으면 하는 바람을 갖게 하는 게 크리스마스의 마력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다.

평양에는 크리스마스가 없다. 조선중앙TV나 노동신문 등 관영 선전매체에서 캐롤은 들을 수 없다. 크리스마스를 아는 북한 주민은 없다. 탈북자들에게 귀동냥을 해봐도 북한에서 크리스마스를 경험했거나 성탄절이란 말을 들어본 적이 있다는 경우는 없다. 북한에 체류하는 서방 국가의 공관이나 국제기구 관계자들이 제한적으로 북한 주민들의 접근이 통제되는 공간에서 크리스마스 행사를 하거나 장식을 꾸미고 캐롤을 노래하는 사례를 제외하고는 엄격히 금지된다는 얘기다.

북한도 종교의 자유를 인정하고 있다는 점에 비춰보면 이런 모습은 쉽게 납득하기 어려운 대목이다. 1972년 개정한 북한 헌법은 ‘신앙의 자유’를 명시했다. 평양에는 칠골교회와 장충성당을 비롯한 종교시설도 있고, 방북인사들에게 신도들이 예배를 보는 장면을 공개하기도 한다.

그런데도 북한에 크리스마스가 존재할 수 없는 건 종교 자유와 관련해 교묘한 이중칼날을 휘두르고 있는 때문이다. 북한 헌법이 “공민은 신앙의 자유와 반종교선전의 자유를 가진다”고 강조한 대목이 그것이다. 실제로는 종교 활동을 억압하고 법률적 제재의 근거로 삼을 수 있는 ‘반종교 선전의 자유’에 무게를 두고 있다. 1992년 개정된 헌법에서도 “누구든지 종교를 이용해 외세를 끌어들이거나 국가사회질서를 해치는데 이용할 수 없다”고 강조한다.
 
그런데 북한 지역이 원래부터 이처럼 종교의 사막지대였던 것은 아니다. 1948년 김일성 정권이 수립되기 이전 평양은 ‘동방의 예루살렘’이라 일컬어질 정도로 기독교가 번창한 곳으로 꼽혔다. 김정은 노동당 위원장의 할아버지 김일성 집안도 매우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의 외할아버지 강돈욱은 평양 만경대구역의 이전 지명인 평남 대동군 용산면 하리 칠골마을에 있던 하리교회 장로였다. 또 그의 둘째 딸이자 김일성의 생모인 강반석은 이 교회 집사였다.

6.25 전쟁 때 폭격으로 파괴된 하리교회는 1992년 칠골교회로 거듭났다. 1989년 김일성이 광복거리 건설현장에 나왔다가 “다시 교회를 세우라”로 지시한데 따른 조치였다. 김일성은 박정희 정권 때 외무장관을 지내다 월북한 최덕신을 만난 자리에서 “어릴 적 어머니와 함께 교회 다니던 일이 떠오른다”고 회상한 뒤 그 교회를 재건하기로 결정했다는 후문이다. 이 교회가 반석교회란 별칭으로 불린 것도 김일성의 생모와 관련이 있다고 탈북 인사들은 전하고 있다.

해방 직후 북한 지역은 남한보다 종교활동이 활발했다. 기독교와 천주교도 남한보다 먼저 전파돼 곳곳으로 퍼지고 있었다. 당시 주민 916만명 중 22.2%인 200여만명이 종교를 갖고 있었다는 게 북한 공식자료인 조선중앙연감 1950년판의 집계다.

하지만 북한 정권 수립이후 김일성은 “종교는 아편”(1972년 발행 김일성저작선집)이라며 지속적인 탄압정책을 폈다. 종교생활을 크게 위축되거나 고사했고, 종교인 대부분은 자유를 찾아 남한행을 택할 수밖에 없었다. 김일성은 1962년 사회안전성(우리의 경찰에 해당) 연설에서 “종교인들을 함께 데리고 공산주의로 갈 수 없다. 기독교․천주교 집사 이상 간부들을 모두 재판에서 처단해버렸고, 그 밖의 종교인들 중에도 악질들은 모두 재판했다”고 스스로 밝혔다.

북한의 종교조직은 1970년대 대남·대외 선전차원에서 급조됐다는 게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당시 남북대화가 활성화되면서 사회문화 분야의 교류에 대비하고, 종교탄압에 대한 국제사회의 비판에 대응하려는 움직임이었다. 남북교류가 활성화된 2000년대 들어서는 종교교류를 내세운 대북지원 확보 등에도 적극 활용하는 등 대남관계의 변화에 따라 종교문제를 활용하는 데 주력했다. 다른 한편으로는 미국 등 서방국가에 ‘종교의 자유’를 선전하기 위한 수단으로 교회와 신도를 동원하기도 했다.

북한 당국은 특히 성경을 서방 제국주의의 사상문화적 침투의 핵심수단으로 간주해 민감하게 대응하고 있다. 2014년 4월 말 방북한 미국인 제프리 에드워드 파울 씨는 성경책을 호텔방에 두고 나왔다는 이유로 평양 순안공항에서 북한 공안요원에 의해 체포돼 한동안 억류되기도 했다.
 
이런 탄압 속에서도 김일성 정권 수립 이전의 기독교의 맥을 잇는 비밀교회나 가정예배 등이 극히 은밀하게 이뤄지고 있다는 증언도 있다. 북한인권백서(2014년 판)는 탈북자 증언을 인용해 “어느 도(지역)의 지하 종교인들이 약 2000명 된다”고 전하고 있다.

북한 김정은이 종교에 대해 어떤 인식을 갖고 있는지는 아직 드러난 적이 없다. 그렇지만 10대 시절 스위스 조기유학 기간에 서방세계의 종교에 대해 어느 정도 인지할 수 있는 상황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김정은 정권 등장이후 그가 참석한 송년 행사 등에 크리스마스 분위기의 장식물이나 인형 등이 등장하고 있는 점은 눈여겨 볼 대목이다.

북한 주민들에게 12월 24일은 김정일의 생모 김정숙의 생일 또는 김정일이 군 최고사령관에 추대된 기념일로 기억되고 있다고 한다. 북한 동포들이 마음 놓고 종교의 자유를 누리고, 한 해의 마무리를 크리스마스와 함께 할 수 있는 날을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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