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유종일 주빌리은행 대표가 출범 이후 채무자 구제 현황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시사위크>
[시사위크=이미정 기자] 가계 부채 1300조원 시대. 서민 경제는 천문학적인 빚더미에 올라앉아있다. 이런 가운데 금융사각지대에서 빚 독촉에 시달리고 있는 저소득층의 현실은 더욱 암울하다. 그런데 이 같은 연체 채무자들에게 한 줄기 ‘희망의 빛’이 되어 주는 곳이 있다. 바로 ‘주빌리은행’이다.

지난 2015년 8월 출범한 주빌리은행은 소멸시효가 지나 헐값에 대부업체 등에 떠넘겨지는 부실채권을 사들이거나 기부 받아 무상 소각하는 방식으로 ‘빚탕감프로젝트’를 진행하는 시민단체다. 주빌리은행이 시작한 이 프로젝트는 지자체와 금융기관이 가세하며 범사회운동으로 확산되고 있다. 주빌리은행의 유종일 대표는 ‘빚’의 나락에 빠진 서민들에게 “형편껏 갚을 권리가 있다”고 말한다.  <시사위크>는 지난 16일 서울 서대문 지식협동조합 좋은나라사무실에서 유 대표를 만나 자세한 이야기를 들어왔다.

▲ 유종일 주빌리은행 대표가 악성 채무에 시달리는 금융취약계층의 실태에 대해 말하고 있다. <시사위크>
- 출범한지 1년 5개월이 지났다. 여전히 주빌리은행에 대해 모르는 사람들이 많다.
“흔히 생각하는 일반적인 은행은 아니다. 빚을 갚을 능력이 없는 사람들을 구제해주는 시민단체다. ‘주빌리’는 구약성서에 나오는 ‘희년’을 뜻하는 말이다. 기독교에선 50년마다 돌아오는 희년에 노예를 해방해주거나 빚을 탕감해주는 전통이 있는데, 이 개념에서 착안해 출범했다. 부실 채권을 매입해 소각하거나 채무를 조정하는 방식으로 채무자들의 새 출발을 지원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

- 미국 시민단체인 ‘월가를 점령하라’가 시작한 ‘롤링주빌리운동’에서 아이디어를 얻어왔다고 알려졌다.
“그렇다. 2011년 미국 월스트리트에선 금융기관의 약탈적 금융 행태에 반발하는 대규모 시위가 벌어졌다. 이 과정에서 나온 게 롤링주빌링운동이었다. 금융시장에서 부실채권이 헐값에 거래된다는 점에 착안해 시민들의 성금으로 채권을 사들인 뒤 소각하는 운동이었다. 한국에서도 빚에 시달리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에 이 같은 운동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지난 2014년부터 운동을 벌이다 이듬해 8월 공식적인 시민단체를 설립했다.”

- 채무 구제 대상은 어떻게 선정되는가.
“소액 장기 연체자들이 주요 대상이다. 빚을 졌으면 갚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도저히 그럴 수 없는 상황에 처한 사람들이 있다. 예를 들어, 한 달에 40만원으로 생활하는 사람들에게 빚을 갚으라고 하는 것은 잔인한 일이 아닌가.”

- 소각되는 채권의 빚의 최소한을 갚게 한다고 들었다.
“무조건 소각이 기본 취지는 아니다. 형편껏 갚자는 거다. 장기 연체 채권자들의 대부분은 생활이 어려운 처지다. 소액이라도 상환하기 어려운 상황이면 갚게 하지 않지만, 상징적인 의미로 원금의 7% 정도를 갚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7%도 갚기 어려운 사람이 태반이다. 최저한도로 사는 분들에게는 만원도 갚기 어려울 수도 있다.”

- 출범한지 1년 5개월이 흘렀다. 운영상 어려움은 뭔가.
“시민단체는 다 어렵다. 정부 지원을 받는 경우가 거의 없기에 모두 재정상 힘들다. 부실 채권의 재원 마련도 녹록지 않다. 부실 채권을 많이 기부받기도 했지만, 일부는 돈을 주고 사기도 한다. 더 많은 분들을 구제해주고 싶지만 재정상 어려움 있다.

그래도 우리 사회가 희망이 있다는 것을 느꼈다. 예상보다 많은 반향과 호응이 있었다. 처음에는 1년간 원리금 1000억원의 부실 채권을 소각해보자는 목표를 잡았는데, 1년이 지난 시점에서 목표에 두 배에 가까운 채권을 소각을 했다. 그로부터 5개월이 지난 지금에는 1조원을 훌쩍 넘겼다.”

 

▲ 유종일 주빌리은행 대표가 부실채권 시장의 부작용에 대해 설명하고 있는 모습. <시사위크>
- 금융기관들의 무책임한 부실채권 매각이 그간 문제가 돼왔다.
“채무자가 5년간 돈을 갚지 못하면 소멸시효가 완성이 된다. 그러면 돈을 갚지 않아도 된다. 그런데 은행이 그전에 부실채권을 헐값에 대부업체나 추심업체에 팔아버리는 일이 허다하다. 심지어 소멸시효가 완성된 부실채권도 싼값에 팔려나간다. 은행 입장에선 장부상에서 빨리 털어버려야 건전성을 해치지 않을 수 있겠지만, 무책임한 일이다.

이렇게 부실채권이 팔려나가면서 채무자들은 ‘빚에 굴레’의 악순환에 놓인다. 헐값에 사들였음에도 추심업체들은 원리금 액수를 그대로 추심한다. 채무자들은 계속 악랄한 빚 독촉에 시달리게 된다. 그렇게해도 못 받은 채권들이 또 다른 곳에 팔린다. 심지어 여섯번까지 팔린 경우도 있다고 한다. 은행에서 돈을 빌렸지만, 전혀 알 수 없는 업체들이 계속 나타나 빚독촉에 시달리게 되는 것이다.”

- 소멸시효가 완성된 부실채권도 쉽게 부활할 수 있다고 알려진다.
“그렇다. 대부분의 채무자들은 자신의 채권이 소멸시효가 완성된 지도 모른다. 이 같은 허점을 대부업체나 추심업체들을 노린다. 전화를 해서 원리금의 일부만 입금을 하면 정리해준다고 유인하고는 부활시키는 꼼수를 쓰기도 한다. 조금이라도 입금이 되면 법적으로 갚을 의지가 있다고 판정이 돼 시효가 부활된다. 그래서 다시 채권 추심을 합법적으로 하는 일이 가능해지는 것이다. 그리고는 ‘쥐어짜기’ 추심이 들어간다.”

-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같은 채무 권리를 모른다.
“나도 경제학자 교수지만, 이 일을 시작하기 전에는 이 구조를 잘 몰랐다. 보통사람들은 더 하지 않겠나. 미흡하지만 우리나라에도 채무자의 인권을 보호하기 위한 권리가 있다. 또 최근에는 이 같은 채무자들의 권리를 강화하는 방안들이 생겨나고 있다. 지난해 소멸시효가 완성된 채권을 거래하는 것은 금지하는 금감원의 가이드라인이 나오기도 했다. 또 국회에서도 죽은 채권의 부활을 금지하는 법안이 발의되기도 했다.”

▲ 유종일 주빌리은행 대표. <시사위크>
- 지난해에는 대부업체와 저축은행들이 부실채권-소각운동에 동참하는 움직임을 보이기도 했다.
“긍정적이다. 정치권과 지자체, 금융기관들이 관심을 보이면서 점차 확산되고 있다. 최근 지난해 연말에는 SBI저축은행이 소멸시효가 완성된 1조원대의 부실채권을 무상소각했다. 각 지자체들 참여도 처음 성남시를 시작으로 점차 늘어나고 있다. 가장 최근에는 전주시에서 채권 소각 행사를 하고 상담센터도 개소했다.

교회와 노동조합에서도 참여도 있었다. 특히 서울시에 소속된 환경미화원 노동조합에서 참여한 점은 인상 깊었다. 이분들의 생활 자체도 넉넉하지 않을텐데, 더 어려운 사람들을 돕겠다며 10억원이 넘는 부실채권 소각운동에 참여했다.”

- 부실채권소각 ‘퍼포먼스’도 흥미롭다.
“관심을 환기시키기 위한 상징적인 이벤트다. 종이를 불로 태우거나 파쇄하는 형식으로 지난해 다양한 퍼스먼스 행사를 가졌다. 종이를 불태울 때는 마술종이를 썼다. 화재의 위험이 있을 수 있어 일반 종이를 쓰지는 않았다. 마술종이에 상징적인 문구를 쓰고 불태웠다. 다만 파쇄 했을 때는 실제 부실 채권 서류였다.”

- 부실채권 문제의 근본적인 해결책은 뭐라고 생각하나.
“우리가 하는 일은 이미 문제가 발생해 곤란한 지경에 처한 사람들을 돕는 일이다. 하지만 그 전에 ‘빚 굴레’를 뒤집어쓰는 일을 막아야 한다. 그러기 위해선 우선 금융회사가 무분별한 대출을 하지 말아야 한다. 철저한 심사로 빚의 상환 능력이 있는 사람인지를 따져봐야 한다. 그럼에도 대출이 이뤄져 연체가 발생했을 때는 금융사와 채무자 모두 동반 책임을 져야 한다. 효율적인 채무조정이 이뤄지도록 상환 계획을 잡고 빚을 갚아나갈 수 있도록 도와야 한다. 그리고나서도 구제가 안 되는 저소득층 채무자들은 복지시스템으로 해결해야 한다고 본다.”

- 채무조정을 해주는 기관으론 국민행복기금도 있다. 어떻게 평가하나.
“제 역할을 제대로 못했다. 국민행복기금은 박근혜 대통령의 대표 공약이었다. 고통 받는 채무자들을 구제하고 형편껏 빚을 갚을 수 있도록 도와주기 위해 설립됐다. 그런데 출범 이후에 공약이 약속대로 이행되지 않았다.

공적인 재원을 가지고 조성을 했어야 하는데, 은행들에게 출자를 받으면서 채권자 위주의 기관이 돼버렸다. 출자 규모도 약속했던 것보다 10분의 1밖에 안 된다. 채무자들은 구제해준다는 명분도 내세웠지만, 최대한 많이 받아내는데 관심을 가졌다. 부실채권을 싼 값에 매입해서 수익률 높은 장사를 하고 만 것이다. 최대한 많이 봐주는 게 원금의 50%다. 원금의 7%도 내지 못하는 사람들이 허다한 판에 50%를 무슨 수로 내는가. 물론 낼 수 있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악성 장기 부채에 시달리는 저소득층 채무자들에게 ‘빛 좋은 개살구’가 돼버렸다.”

▲ 유종일 주빌리은행 대표가 "최종 목표는 채무자들의 빚 문제가 해결돼 문을 닫는 것"이라고 말했다. <시사위크>
-그렇다면 어떻게 개선시켜야 할까.
“채무자 친화적인 방식으로 개선돼야 한다. 그렇게 되려면 민간 전문가나 금융소비자 등의 사람들이 위원회 결정에 참여할 수 있어야 한다. 채무 변제액도 형편에 맞게 낼 수 있도록 조정해줘야 한다. 일개 시민단체의 선의로 시작된 운동으로 1조원이 넘는 부실 채권을 소각됐다. 정부가 자금과 권력을 선한 목적으로 투입한다면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날 것이다.”

- ‘주빌리은행’의 향후 계획은 어떻게 되나.
“은행의 궁극적인 목표는 ‘폐업’이다. 악성 채무에 시달리는 사람들이 모두 없어져서 문을 닫는 게 목표다. 하지만 거기까지 가기에는 멀었다. 이제 막 출발 선상에 서 있고, 해야 할 일이 많다. 올해는 개혁 입법 문제에 더욱 관심을 가질 예정이다. 발생한 문제를 해결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법제도적인 개혁도 선행돼야 한다. 올해는 법 개혁의 중요한 타이밍이다. 그 쪽 부분에 목소리를 낼 수 있도록 노력을 할 것이다.

채무자들의 실태 파악을 위한 연구도 힘쓸 예정이다. 악성 채무에 시달리는 채무자들에 대한 정확한 데이터베이스가 없는 실정이다. 문제 해결에 효율적으로 접근하기 위해서 이같은 연구기능을 강화할 것이다. 지자체와의 협업과 후원시스템을 강화하는 방안에도 집중할 방침이다.”

 

저작권자 © 시사위크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