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일 새벽, 이재용 부회장이 서울구치소를 나와 준비된 차량에 탑승하고 있다. <뉴시스>
[시사위크=권정두 기자]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최악의 위기에서 벗어났다. 하지만 촛불을 들고 광장으로 모여들었던 수많은 국민들은 또 다시 깊은 허탈감에 빠져들었다.

박영수 특검은 지난 16일, 이재용 부회장에 대한 구속영장을 신청했다. 433억원의 뇌물을 건네고, 90억원의 회사 자금을 횡령하고, 국회 청문회에서 위증을 한 혐의다. 이재용 부회장은 이튿날인 지난 18일, 서울중앙지방법원에서 영장실질심사를 받은 뒤 서울구치소로 이동해 법원의 결정을 기다렸다.

긴장감이 맴도는 초초한 밤이 지나고, 장고를 마친 조의연 영장전담판사는 이재용 부회장에 대한 구속영장을 기각했다. 이재용 부회장을 향한 혐의가 아직 뚜렷하게 확인되지 않았다는 것이 그 이유다.

◇ 죄는 있지만, 구속은 없었던 ‘삼대’

영장실질심사를 받을 때만 하더라도 심각하게 굳어있었던 이재용 부회장은 한결 편안해진 얼굴로 서울구치소를 걸어 나왔다.

최악의 고비를 넘긴 이재용 부회장은 할아버지와 아버지에 이어 ‘총수 불구속’ 전통을 깨지 않게 됐다. 이병철 삼성 창업주는 ‘사카린 밀수사건’, 이건희 회장은 ‘노태우 비자금 사건’ 및 탈세 혐의로 재판장에 섰지만, 3대에 걸쳐 단 하루도 옥살이를 하지 않았다. 특히 이들 ‘삼대’는 모두 정경유착 범죄에 휩싸였고, 경영권 승계 문제 역시 논란으로 가득하다는 공통점이 있다.

이재용 부회장의 이러한 행보는 그동안 숱한 사건에 휩싸이고도 법적 처벌은 받은 적이 없는 김기춘 전 청와대 비서실장과 오버랩된다. 두 사람은 청문회에서도 ‘모른다’, ‘기억나지 않는다’는 답변으로 일관했고, 뚜렷하게 드러난 아랫사람들의 부정에 대해서는 지시한 적도, 보고받은 적도 없다고 선을 그었다. 결과적으로 이재용 부회장의 이러한 대응 전략은 구속 불발로 이어졌다. 김기춘 전 비서실장의 별명인 ‘법꾸라지’는 이재용 부회장과도 어색함이 없어 보인다.

▲ 박근혜정권퇴진비상국민행동이 19일 긴급 기자회견을 열고, 이재용 부회장 구속영장 기각 결정을 강하게 규탄했다. <뉴시스>
◇ ‘법꾸라지’ 이재용 앞에 국민들은 ‘좌절’

물론 무죄 추정의 원칙은 지켜져야 하고, 여론 재판이 있어서는 안 된다.

하지만 이번 기각 결정이 국민들을 또 다시 허탈감과 분노에 빠뜨렸다는 것 또한 분명 사실이다. ‘박근혜-최순실 게이트’가 터진 이후 광장으로 쏟아져 나온 민심은 탄핵은 물론 특검의 적극적인 수사를 이끌어냈다. 이 과정에서 많은 이들이 구속 또는 기소됐고, 이는 국민들에게 일말의 위로와 희망이 됐다.

이런 측면에서 이재용 부회장의 구속 여부는 의미가 컸다. ‘박근혜-최순실 게이트’는 단순히 권력자와 비선실세의 비리에 그치지 않았다. 정경유착 등 우리사회 온갖 적폐를 드러낸 사건이었다. 이에 많은 국민들은 정치권력의 개혁과 함께 재벌구조의 변화도 갈망했다.

그러나 이러한 열망은 이재용 부회장 구속영장 기각 앞에 좌절감으로 이어졌고, ‘유전무죄’, ‘삼성공화국’ 등 자조 섞인 비판과 성토가 쏟아지고 있다.

박근혜정권퇴진비상국민행동(퇴진행동)은 이날 기자회견을 갖고 “법원은 사실을 외면하고, 법과 정의를 저버렸다. 국민들이 밤잠을 설치며 염원했던 정의와 법치주의는 거대한 경제권력 앞에 무력했다”고 지적했다.

퇴진행동의 법률팀장을 맡고 있는 권영국 변호사는 “재벌 총수가 주도해서 권력자 비선실세에게 수백억원을 갖다 바쳤다. 그리고 대통령이 나서서 국민의 재산인 국민연금에 수천억원의 손해를 끼치면서 합병안에 찬성하라고 지시를 내렸다. 더 이상 무엇으로 소명해야 하나”라며 “이 빌어먹을 법의 현실을 우리는 언제까지 참아야 하나”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과거 영장전담판사로 재직하기도 했던 이정렬 전 판사는 tbs ‘김어준의 뉴스공장’ 인터뷰에서 “너무 비겁한 판결”이라며 “역사를 바꾸는 판결인데, 주권자의 명령을 제대로 감지하지 못했다”고 비판했다.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 소속 이재화 변호사는 트위터를 통해 “이재용은 피해자라고 주장하나, 그는 430억원을 주고 8조로 예상되는 경영권 승계라는 이익을 얻었다. 이 과정에서 중간 역할을 하던 문형표는 같은 법원에서 구속했다. 그런데 조 판사는 이재용의 변명에 손을 들어줬다. 상식적으로 이해하기 힘들다”면서 구속영장 기각 사유를 조목조목 반박했다.

고(故) 노무현 대통령의 사위이자, 박근혜 대통령을 상대로 ‘국정농단 위자료 청구소송’을 제기한 곽상언 변호사는 “이재용 부회장의 방어논리는 뇌물죄가 아니라 강요죄의 피해자라는 것인데, 이것이 통용된다면 앞으로 뇌물죄는 거의 성립될 수 없을 것”이라며 “특히 이재용 부회장은 강요죄의 피해자라고 주장하면서도, 그에 상응하는 형사고소, 손해배상청구 등의 소송을 제기하지 않고 있다”고 말했다.

▲ 특검 사무실이 위치한 건물 외부에 시민들이 응원의 포스트잇을 붙여놓은 모습. <뉴시스>
정치권에서도 성토는 이어졌다. 더불어민주당, 국민의당, 정의당 등은 일제히 유감을 나타냈다. 정의당은 “법원이 이 부회장의 구속영장을 기각한 것은 스스로 사법부의 권위를 포기하고 삼성 재벌의 하수인으로 전락하겠다는 선언이나 다름없다”며 “오늘의 이 판결로 대한민국 사법부도 적폐 청산의 대상으로 전락했다”고 강도 높게 규탄했다.

이재명 성남시장은 “재벌에 포로가 된 대한민국의 슬픈 자화상”이라고 밝혔고, 안민석 민주당 의원은 “사법부를 향해 침이라도 뱉고 싶고, 욕설이라도 하고 싶다”며 격노했다. 삼성과 악연이 있는 노회찬 정의당 의원도 “이병철, 이건희, 이재용으로 이어지는 경영권 3대 세습, 정경유착 범죄 3대 세습, 불구속 3대 세습, 다 이유가 있다. 법 앞에 만 명만 평등한 대한민국”이라고 지적했다.

민주노총은 “사법부가 자본권력에게 또 다시 무릎을 꿇었다”며 “박근혜와 그 부역자들은 건드릴 수 있어도 재벌을 건드리지 못하는 이유는 분명하다. 재벌은 선출되지 않는 세습권력이고, 이들이 정치권력을 좌우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꼬집었다.

삼성과 오랜 싸움을 벌이고 있는 ‘반올림’의 이종란 노무사는 “광장의 힘으로 여기까지 왔는데, 정의 없는 사법부가 썩은 사회 갈아엎을 기회에 찬물을 끼얹었다”며 “입법, 사법, 행정, 언론 모두 삼성의 손아귀에 있다고 언제까지 그렇게만 이야기할 것인가”라고 씁쓸함을 나타냈다.

한편, 일부 시민들은 특검이 위치한 건물에 포스트잇을 붙이며 응원의 메시지를 남기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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