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유승찬 스토리닷 대표.
[시사위크] 안희정의 말은 상처가 됐다.

안희정의 ‘선한 의지’는 촛불민심에 상처를 줬다. 트위터와 커뮤니티의 분노는 간단치 않았다. 경쟁 후보 진영의 공격을 빼고도 많은 이들이 지지를 철회했다. 이명박, 박근혜 정권의 ‘선한 의지’론은 명백한 도발이다.

해명은 더 안 좋았다. 비유와 반어라는 단어도 좋지 않았다. 상처받은 사람들은 비유와 반어도 못 알아듣는 것으로 취급당했다. 비유와 반어는 메시지를 더 선명하게 전달할 때 쓰는 것이다. 하지만 애매하게 뒤섞어 오해(?)를 불렀다.

안희정은 사과가 먼저인 순간에 해명을 했다. 위기관리 능력의 취약함을 드러냈다. “어떤 선의라도 법과 원칙을 따르지 않는 것이 문제라는 게 발언의 취지”라는 그의 해명은 온전한 것일까?

그는 문제의 발언을 한 자리에서 이렇게 말했다. “참고적으로 저는 그 누구라도 그 사람의 마음은 액면가대로 선의로 받아들입니다. 저는, 그 어떤 것이라도 그 것이 최선을 다해서, 그 사람이 선한 의지로 결론 내렸을 것이란 것을 전제하고, 그 사람의 이야기를 받아들입니다. 저는 이것이 21세기의 신지성사의 출발이 될 것이라 믿습니다.”

이래도 비유와 반어라고 받아들일 수 있을까? 차라리 신념으로 들린다. 그렇다면 전두환의 광주학살도, 국정원의 간첩조작도, 최순실의 국정농단도 그들이 주장하듯 선한 의지에서 비롯되었다고 전제하고 나머지 이야기를 받아들여야 할까. 21세기 신지성사를 앞에 두고 필자가 오버하고 있는 건가?

‘선한 의지’외에 특별히 주목해야 할 또 다른 단어는 ‘사회적 대기업’이다. 처음 보는 말이다. 대기업에 대한 애정이 없이는 조합될 수 없는 말이다. 얼마 전 국민연금을 승계과정에 악용한 삼성 이재용이 구속됐다. 내로라하는 대기업들이 이번 스캔들에 연루됐다. 모든 국민이 정경유착 앞에 좌절했다. 그런데 사회적 대기업이라니. 사회적 기업의 선한 이미지를 차용한 것 아닌가.

이재용이 구속되자 국민들은 최강의 특권이 법 앞에 평등해 지는 순간을 경험했다. 얼마나 오래 기다려온 국민들인가. 정치인이라면 당연한 결과를 기적 같은 일로 받아들이게 만든 이 부정의한 상황을 반성해야 마땅하다. 그런데 이미 국가권력 사유화로 온 나라를 쑥대밭으로 만든 사건 앞에 ‘선한 의지’를 강조한 것은 백 번 양보해도 큰 실수다. 깊은 사죄가 필요하다.

안희정은 말했다. “K(스포츠), 미르재단도 평창 동계올림픽을 앞두고 사회적 대기업들의 많고 좋은 후원금을 받아 동계올림픽을 잘 치루고 싶어한 마음일 거라 생각한다. 그러나 그것이 법과 제도에 따르지 않아 이런 문제가 발생한다.” 이 발언은 특검의 수사도, 촛불의 간절함도 부정한 것이다. 아프다. 안희정의 심성을 믿어온 사람으로서 참으로 아픈 순간이다.

누구 말처럼 촛불은 농담이 아니다.

정치인의 신념은 종교인이나 철학자의 그것과 사뭇 다르다. ‘한쪽 뺨을 맞으면 다른 쪽 뺨도 내주어라’는 종교적 윤리는 정치적으로 보면 자긍심을 포기하라는 강요다. ‘악에 폭력으로 대항하지 말라’는 종교적 신념은 정치가에게 ‘악에 대해 폭력으로 저항해야 한다’로 치환된다. ‘블랙스완’ 이론을 창시한 미래사상가 나심 탈레브는 “사기꾼을 보고 사기꾼이라고 말하지 않는다면 당신도 사기꾼”이라고 말한다.

정치이론가 한나 아렌트는 제아무리 뛰어난 철학자라도 정치에 관해서는 객관적이거나 중립적일 수 없다고 했다. 아렌트는 말했다. “나는 정치를, 말하자면 철학 때문에 흐릿해지지 않은 밝은 눈으로 보고 싶어요.”

정치적 사건을 바라보는 안희정의 눈은 그의 신념 때문에 흐릿해졌다. 종교는 동기와 의도를 따지지만 정치는 행위의 결과에 대한 책임을 중시한다. 체코의 바츨라프 하벨 대통령은 “정치에서 처음에 순수했을 의도는 중요하지 않다. 타락의 순간을 인지할 수 있어야 권력자는 비판적 거리를 유지할 수 있다”고 강조한다.

정치인에게는 엄청난 특권이 부여된다. 박근혜, 최순실 국정농단의 문제는 이렇게 주어진 특권을 사유화한 것이다. 사적 이익을 목적으로 국민세금을 강탈한 사건이다. 명백한 범죄 앞에 선한 의지를 끼워넣는 것은 정치적 행위와 윤리적 신념 사이에서 길을 잃은 것이다.

정치는 정치권력을 향한 열망이거나 세계에서 자기 자신을 인정받고자 하는 자기 긍정의 산물이다. 자기 긍정은 인간의 본성이다. 하지만 정치가가 이런 실존적 자기 긍정을 절대화할 때 형용하기 어려운 모순에 빠지게 된다. 자기 긍정의 양가성을 인식하려는 노력을 게을리하면 정치의 가혹한 역습에 직면한다. 그는 ’선한 의지’를 절대화한 나머지 국정농단을 마치 이방인의 흐릿한 눈으로 엄호했다.

안희정에게 1991년 코펜하겐에서 한 바츨라프 하벨의 소닝상 수상연설을 일독할 것을 권한다. 전진하려면 대상이 아니라 자신에 대한 깊은 성찰이 필요하다. 소닝상은 유럽 문명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하는 덴마크의 상이다.

“권력의 유혹은 치명적입니다. 실존적인 자기 긍정에 포위되어 존재는 징발되고 소외되어서 무감각해져버립니다. 피가 도는 인간이 석상처럼 변해버립니다. 석상은 위대한 명망을 보여주지만 핏기 없는 죽은 돌덩이에 불과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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