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일 오전 서울 영등포구 여의도 옛 한진해운 빌딩 앞으로 진입금지 표지판이 서있다.<뉴시스>
[시사위크=백승지 기자] 40년 긴 세월을 항해하던 한진해운호(號)가 결국 침몰했다. 증시 입성 반세기만에 상장 폐지가 완료됐다. 한때 국내 1위, 세계 7위 선사로 명성을 떨쳤던 한진해운의 뒷모습은 씁쓸했다. ‘주당 12원’ 가라앉은 주가를 마지막으로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 60년 ‘국적 해운사’…부채 벽에 ‘좌초’

7일, 한진해운 ‘운명의 날’이 밝았다. 모태인 대한해운공사가 1956년 3월3일 국내 증시에 첫 상장한지 약 60년 만에 상장폐지가 완료됐다. 한진해운의 역사가 곧 우리나라 해운업의 역사를 대표하는 만큼, 반세기 영욕의 역사가 주는 메시지는 무겁다.

한진해운의 시작과 끝을 관통하는 키워드는 ‘부채’다. 한진해운은 1977년 국내 최초 컨테이너 전용 선사로 닻을 올렸다. 이후 1988년 고 조종훈 한진그룹 창업주가 박정희 대통령의 권유로 국내 1호 선사 대한선주를 인수하며 지금의 한진해운이 탄생했다. 당시 4,000억원의 천문학적 부채도 함께 떠안았다.

이후 한진해운은 노후 선박을 고철가격에 처분하고 신형 경제선을 도입하는 등 재정비에 주력했다. 1만8,000톤급 컨테이너선 4척을 발주하고, 노선을 합리적으로 조정하며 경영구조 전반에 메스를 댔다.

사세를 확장한 한진해운은 북미서안항로, 북미동안항로 등을 차례로 개척했다. 글로벌 무대를 누비며 1992년 국적 선사 최초로 매출 1조원을 달성하기도 했다. 1997년에는 세계 7위 선사에도 올랐다.

쾌속질주하던 한진해운에 그림자가 드리워진 것은 1997년부터다. 외환위기 당시 정부가 공정거래법을 통해 대기업 집단의 부채비율을 200%로 제한한 것이다. 산업의 특성을 고려하지 않은 일률적 제재로 한진해운은 소유선박을 팔고, 배를 빌려 쓰는 장기저리용선계약을 체결해야 했다.

이후 2011년 저유가 바람에 턱없이 운임이 저렴해지자 사세가 본격적으로 기울었다. 받을 운임보다 지급해야 할 용선료가 더 비싸지며 한진해운을 유동성 부족 위기로 몰아넣는 결정적 원인이 됐다. 결국 2011년 당시 부채비율이 1,400%를 넘어섰다. 대한항공의 긴급자금 수혈에도 회생안을 마련하지 못하고, 작년 9월 회생절차에 돌입한 이후 올해 2월 파산을 맞게 됐다.

◇ 3만원에서 12원까지… 해운사업 위기 고조

▲ 발 묶인 한진해운.<뉴시스>
청산을 앞둔 한진해운은 6일 주식시장에서 마지막 거래를 마쳤다. 한진해운 주식은 전일 대비 68.42% 하락한 ‘주당 12원’으로 마무리됐다. 한때 해운업계 1위로 이름을 날리던 한진해운 주가가 휴지조각으로 전락하기까지 8년 밖에 걸리지 않았다.

2009년 12월 유가증권시장 상장 첫날 종가 2만1,300원에 비하면 100%에 가까운 낙폭이다. 글로벌 해운업 호황기인 2011년 1월엔 회사 주가가 최고 3만8,694원까지 올랐다. 당시가 한진해운의 마지막 고점으로, 이후 주가는 내리막길에 접어들었다.

타격을 입은 것은 소액주주들이다. 전자공시에 따르면 작년 법정관리 당시 한진해운 주식을 보유한 소액주주는 5만명이 넘는다. 전체 41.49%에 달하는 5만3,695명이 한진해운의 몰락과 함께 한숨만 쉬고 있다. 상장폐지 후 주주들은 한진해운에 자산 청산 대금을 받을 권리가 있지만, 순위가 가장 마지막이다.

업계서는 한진해운 사태를 그저 한 기업의 역사로만 다루기에는 힘들다고 평가한다. 한진해운이 담당하던 기존 알짜 노선 수요를 최근 다수의 해외선사들이 꿰차고 있기 때문이다. 국내 해운산업의 위기가 고조되고 있다는 지적이다.

한진해운의 알짜 미주노선은 대한해운의 모기업인 SM(삼라마이더스)그룹이 그 명맥을 이어간다. 지난해 한진해운 미주노선을 인수해 이달 8일 첫 운항에 나설 계획이다. SM상선이 고용한 육상 직원 370명 상당수는 한진해운 출신으로 알려졌다. SM상선이 한진해운의 ‘수송보국’ 정신을 이어 국내 해운업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을 수 있을지 기대와 우려의 시선이 엇갈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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