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유승찬 스토리닷 대표.
[시사위크] 박근혜 전 대통령이 검찰에 출석했다. 헌재의 파면선고로 더 이상 불소추특권을 행사할 수 없기 때문이다. 검찰수사도 특검수사도 피해갔지만 이제 더 이상 피할 곳이 없어졌다.

반성이나 사죄는 없었다. 헌재 결정에 대한 승복 메시지도 없었다. 여전히 헌법과 법 위에 군림하겠다는 태도다. 검찰청 포토라인 앞에서 박근혜는 단 29자의 메시지를 남겼다. “국민 여러분께 송구스럽게 생각합니다. 성실하게 조사에 임하겠습니다.”

말은 짧았고 태도는 오만했다. 어디에서도 파면당한 대통령의 반성하는 모습은 발견할 수 없었다. 오히려 대한민국 법치주의의 붕괴가 어디까지인지 알 수 있게 해주었다. 돈과 권력이면 법을 어겨도 된다는 문화는 아직 완전히 제거되지 않았다. 박근혜는 작은 물고기만 잡고 큰 물고기는 놓아준다는 대한민국 법망의 규칙을 아직도 굳게 믿고 있는 듯했다.

하지만 어쩌랴. 촛불 시민혁명은 직선제 민주주의를 넘어 대한민국이 민주공화국임을 선언했다. 국가주권주의를 국민주권주의로 전환했다.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는 민주공화국의 기본 원칙을 다시 과거로 돌릴 수는 없다. 이른바 제왕적 대통령제가 이끌어온 국가주권주의의 허상을 낱낱이 까발리고 추궁했다. 국가주권주의의 이름 아래 자행된 권력의 사유화를 거부하고 권력 사유화를 주도한 부패세력의 청산을 시작했다. 국민이 요구했고 국회와 헌재가 이를 대리했다. 그렇게 대한민국에 시민적 권리와 자존심이 민주주의의 이름 아래 굳건히 뿌리내리기 시작했다.

이제 시작일 뿐이다. 그런데 국민적 요구인 부패세력 청산과 개혁과제 실천은 뒤로한 채 조기개헌론으로 물타기를 하며 자신들의 정치적 재기를 노리는 세력들이 있다. 가능하지도 않고 정당하지도 않으며 정의롭지도 않은 대선 동시개헌론으로 국민들의 개혁 요구에 찬물을 끼얹는 세력이 있다. 이들은 권력을 사유화한 집단이 파면당하고 구속되자 마치 헌법을 사유화할 수 있는 것처럼 말하고 있다.

하지만 우리는 빅텐트론도 제3지대론도 실체가 전혀 없는 허상이었음을 알고 있다. 김종인발 개헌논의도, 이른바 반문연대도 실체가 없긴 매한가지다. 정치인들 몇몇이 모여 텐트를 친다고 손님이 오는 것도 아니고 비를 가릴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낡은 텐트 안에는 찬바람만 가득하다. 개혁은 뒷전으로 한 채 헌법파괴세력을 끌어들여 개헌을 한다는 것이 지금 가당키나 한 일인가. 정경유착으로 얼룩진 부패세력에게 개헌이라는 이름의 면죄부를 준다면 그것은 또 다른 헌법모독이다.

개헌은 필요하다. 시대에 뒤떨어진 헌법을 바꾸는 것도 중요한 일이다. 권력구조에서부터 기본권, 지방분권 등의 문제를 새롭게 규정해야 한다. 하지만 그것이 중요한 사안일수록 정치인들 몇몇이 결정할 수 없다는 것 또한 분명하다. 의회에서 정말 많은 논의와 토론이 필요하고, 나아가 국민적 공론화 과정을 거쳐 제대로 된 헌법을 만들어야 한다. 중앙집권적 국가주의를 극복하고 시민적 권리와 존엄을 성문화하며, 분권과 자치를 불가역적인 것으로 만들어야 한다.

그러니 권력구조를 둘러싼 좁은 개헌논의는 정치인의 재기를 위한 음모이지 국가와 국민을 위한 청사진이 될 수 없다. 권력구조 논의조차 합의에 이르기 어렵다. 그런데 그런 기본적인 합의도 없이 대통령 임기단축을 이야기하는 것도 헌법과 국민주권주의를 무시하는 처사다.

제왕적 대통령제 아래서 제왕적 정치인들이 자라났다. 자신들이 마음만 먹으면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다는 오만과 독선으로 무장한 낡은 정치인들이다. 이들은 마치 대한민국 헌법을 자신들 뜻대로 좌지우지할 수 있는 듯 거드름을 피운다. 하지만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다. 그들이 지나간 자리엔 비싼 와인과 커피만이 잔해처럼 남는다. 회남자는 세상의 세 가지 위험을 “미덕은 적은데 총애는 많은 것, 재능은 모자라는데 지위는 높은 것, 공적은 없는데 보수는 많은 것”이라고 했다. 동시개헌파 정치인들이 새겨들을 말이다.

대선 동시개헌은 실현될 수 없고 실현돼서도 안된다.

이유는 간단하다. 지금 이 나라의 정치를 이끄는 것은 그런 노회한 정치인 그룹이 아니라 국민들이기 때문이다. 박근혜-최순실 게이트의 한복판에서 이 나라를 다시 일으켜 세운 것도 국민들이고 기어이 범죄자 대통령을 탄핵한 것도 국민들이기 때문이다. 국민들의 요구는 한결같다. 대한민국의 부패 구체제를 끝장내라는 것이다.

공정한 나라를 만들어달라는 것이지 기득권 세력이 계속 권력을 향유하라는 것이 아니다. 국민들의 일자리를 만들어달라는 것이지 낡은 정치인들의 새로운 자리를 만들라는 것이 아니다. 성실하게 노력하면 잘살 수 있다는 믿음을 회복해 달라는 것이다. ‘헬조선’을 살아가는 청춘들의 꿈을 다시 살려달라는 것이다. 국민을 개돼지라고 말하는 정치세력을 말끔히 치워달라는 것이다. 권력을 사유화하고 헌법을 파괴하는 세력이 다시는 이땅에 발붙이지 못하게 해달라는 것이다.

개헌을 하자고 자유한국당을 끌어들이는 것은 촛불민심에 정면으로 도전하는 것이다. 헌재판결에 대한 불복을 공공연하게 말하는 대선후보를 가진 정당과 어떤 연대도 하지 말라는 것이다. 범죄집단에게 면죄부를 주면서 하는 개헌은 그 자체로 헌법정신에 부합하지 않는다.

사월보다 먼저 오는 오월은 없다. 오월은 반드시 사월 뒤에 온다. 개헌은 개혁의 과정에서 국민적 공감대가 충분히 형성된 다음에 해야 한다. 그것이 국민에 대한 도리이고 다음세대에 대한 예의다. 과거를 위한 개헌이 아니라 미래를 위한 개헌이 돼야 한다. 그러므로 개혁으로 신뢰를 얻어야 개헌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정치적 유불리를 떠나 개헌할 것을 대선 공약으로 내걸고, 2018년 지방선거 때 개헌을 하는 것이 그나마 가장 빠른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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