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준범 전 국방홍보원장.
[시사위크] 대선일이 50일 앞으로 다가오면서 각 당 후보 간 TV토론이 본격 시작됐다. 3월 18일 국민의당을 시작으로 19일엔 더불어민주당이, 주말엔 바른정당과 자유한국당 등이 잇달아 TV토론 대열에 참가할 예정이다. 바야흐로 대통령 출사표를 던진 사람들끼리 말의 전쟁이 시작된 것이다.

요즘 대선 후보들의 TV토론을 보면 과거에 비해 수준급이다. 더불어민주당의 문재인·안희정·이재명, 국민의당 안철수·손학규·박주선, 바른정당의 유승민·남경필, 정의당의 심상정 후보 등은 저마다의 특징을 잘 살리고 있다.

지난 18일 아침 9시 생방송으로 방영된 KBS 대선후보 경선토론에는 국민의당 세 후보가 나와 정견 발표와 함께 설전도 벌였다. 이들의 특징을 요약해 보자면 안철수 후보는 또박또박 정직하게, 손학규 후보는 순발력 있고 유려하게, 박주선 후보는 투박하지만 감정을 실어 토론을 이끌어 나갔다.
 
진행자가 “누가 본선 경쟁력이 있느냐?”고 묻자 손학규 후보는 자신의 화려한 경력을 열거하며 “그래서 손학규가 돼야 한다”고 즉답을 내놓았다. 그러자 안철수 후보는 “그것은 정치인 중심적인 사고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말한 뒤 “이제 국민들은 정직·유능·미래대비·책임·통합 등 5가지로 평가기준이 바뀌고 있다”고 반박했다. 이에 손학규 후보가 다시 “이제 보니 지금 말한 그 5가지를 다 갖고 있는 사람이 바로 나 아니냐?”고 되받았다.

TV토론의 묘미를 살려 준 장면으로, 두 후보의 순발력과 재치가 돋보이는 순간이었다. 안철수 후보의 말에서는 정직함이, 손학규 후보에게서는 순간 대처능력이, 박주선 후보에게서는 진정성이 돋보인 것이다. 
 
손학규 후보의 순발력은 또 한 번 드러났다. 한 방청객이 그의 잦은 당적 변경을 문제 삼자 영국의 처칠 수상도 그랬다고 상기한 뒤 “하지만 나는 소신과 노선을 바꾸지는 않았다”며 준비된 답변을 내놓았다.

안철수 후보의 답변 태도도 예전보다 많이 진화했음을 알 수 있었다. 여성 방청객이 “과거 청춘 콘서트 시절과 달리 20대들의 지지가 크게 떨어지고 있다. 그 때의 초심이 달라진 것 아니냐?”며 송곳 질문을 던졌다. 이에 안철수 후보는 “내가 부족해서 그럴 것이라 생각한다”고 먼저 사실을 인정한 뒤 “그래서 지금도 노력하고 있고, 앞으로도 계속 노력하겠다”며 시종 겸손모드로 대응했다.

그런 질문에 옳고 그름을 따지려 하지 않고 무조건 인정부터 하고보는 태도는 확실히 과거보다 진화된 것이었다. 현명한 대처방식이라는 평이 뒤따랐다. 안철수 후보는 특히 학습능력이 워낙 뛰어나서 한 번 실수한 것은 두 번 다시 하지 않는다는 장점을 갖고 있다.
  
TV토론에서는 후보자의 발표력이나 말솜씨 뿐 아니라 타인과의 소통능력도 검증해 봐야 한다. 후보자가 소통의 중요성을 얼마나 깊이 인식하고 실천할 수 있는가를 정확히 측정해 봐야 한다. 그것은 말을 잘 하는 것과는 또 다른 문제이기 때문이다.

18대 대선 당시 후보들의 소통능력을 꼼꼼하게 검증했더라면 박근혜 전 대통령 같은 ‘불통의 리더십’을 걸러내지 못해 온 국민이 불필요한 고통을 겪지 않아도 됐을 것이다. 당시 텔레비전을 비롯한 주요 언론들은 전통적인 여당 프리미엄을 관행적으로 따름으로써 제대로 된 검증을 회피했다.

정치인의 말이란 현란한 미사여구로 꾸며진 문학작품이 아니라 보통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는 화합과 공존의 메시지여야 한다. 따라서 비록 ‘눌변(訥辯)’일지라도 진정성이 담겨 있을 때 공감하고 감동하게 된다.
 
19일엔 더불어민주당 네 명의 후보가 경선토론에 출연, 긴장감을 더했다. 두 달 연속 여론조사 1위를 지키고 있는 문재인 후보는 종전의 다소 어눌한 말투에서 벗어나 가끔 위트까지 섞어가는 여유를 보였다. 발표력도 전반적으로 눈에 띠게 좋아졌고, 주요 사안에 대한 논리적 대응도 잘 준비돼 있었다. 결코 과소평가할 수 없는 후보로 변신한 셈이다.

안희정 후보의 정견을 들어보면 다른 경쟁자들 보다 이념적인 스펙트럼이 굉장히 넓은 편이다. 좌와 우, 진보와 보수, 신세대와 구세대를 모두 아우르는 포용의 리더십이 발견된다. 박근혜 전 대통령에 대해 ‘선의’를 운운했던 것도 바로 그런 맥락에서였다.

안희정 후보의 말을 분석해 보면 상당한 인문학적 소양에 바탕을 둔 어휘들이 등장한다. 사람에 따라서는 그것이 추상적이고 이상적으로 이해될 수 있을지 모르지만, 그는 최대한 현실성 있는 개념으로 파악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다른 후보들과의 뚜렷한 차별점이다.
 
이번 대선 후보 가운데 이재명 후보만큼 말의 달인은 없을 것 같다. 그는 촛불집회 내내 ‘사이다 발언’으로 유명세를 탔다. 행정가이자 정치인인 그는 적어도 언어사용에 관한한 확고한 원칙을 지키고 있는 것 같다. 즉, 말은 상대방이 알아들을 수 있도록 그 사람의 눈높이에서 짧고 간결하게 말해야 한다는 것이다.

관념적이고 추상적이며 자신도 잘 모르는 어휘를 사용하는 것은 상대방에 대한 기만이며 자기과시라고 보는 건 아닐까? 언제 들어도 앞뒤가 분명하고 오해의 소지가 없다는 것이 그의 말을 들어 본 사람들의 중론이다.
  
바른정당의 유승민 후보는 다선 국회의원임에도 그동안 TV 노출기회가 많지 않았다. 그의 강한 대구 억양이 시청자들에게 다소 불편한 것도 사실이지만, 그의 말에는 지나칠 수 없는 중량감이 있다. 그의 공약을 봐도 고심 끝에 도출해 낸 흔적을 느낄 수가 있어 결코 가볍지가 않다. 그는 상대방이 좀 불편해 하더라도 할 말은 꼭 하는 스타일의 정치인이다.
 
그는 토론 같은 데서 말할 때 늘 신중하되 지나치게 심각하진 않고, 유머를 잃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사람이다. 그가 지향하는 정치노선을 보면 그야말로 보수 중도에서 조금도 벗어나지 않는다. 정의당과 자유한국당을 제외한 여타 정당들과의 정책연대도 얼마든지 가능할 것으로 보이는 이유다.
 
같은 당 남경필 후보의 말은 문장으로 치면 만연체에 가깝다고 볼 수 있다. 그의 말은 템포가 느리지만 결코 핵심을 비켜가지는 않는다. 약간의 인내심만 발휘한다면 그의 주장에 담긴 진주알을 듬뿍 주워 담을 수 있게 된다. 그가 제시한 모병제 공약은 단순한 선거용 공약이 아니라 오랜 시간 연구 끝에 도출해 낸 현실적인 대안이다. 새누리당을 동반 탈당한 유승민 후보에게 “연대는 무슨 연대냐”며 매섭게 몰아붙이는 모습에서 외모와 다른 결기도 발견할 수 있다.

시청자들에게 뭔가를 보여줌으로써 백 마디 말 보다 강한 이미지를 심어 주는 방법도 있다. ‘남기고 싶은 한 장의 사진’이 좋은 사례다. 과거 노무현 후보의 통기타 치는 모습이 담긴 사진처럼 스토리 있는 사진이 제격이다. 하지만 잘못 골라 낭패를 보는 경우도 없지 않다. 이번 KBS 경선토론에서도 어김없이 사진 이벤트가 등장했는데 후보마다 희비가 엇갈렸다.

안철수 후보는 충남대 강당에서 3000여 학생들 앞에서 강연한 사진을 공개했다. ‘청춘콘서트’ 현장의 모습이었다. 그는 “KAIST 교수시절 한 학생이 내 방에 찾아와 생활고 등을 호소하는데 다 듣고는 함께 펑펑 울었다”고 회고했다.
 
그러면서 “바로 이 장면이 내가 정치에 뛰어든 계기를 만들어 줬고, 언제나 초심을 돌아보게 해 주는 사진”이라고 설명했다. 사진이 전해주는 메시지는 분명했다. 어떤 계기로 정치에 뛰어들게 됐는지를 극명하게 보여 준 확실한 증거물이기 때문이다. 이 때 ‘한 장의 사진’은 시청자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겨주게 된다.

문재인 후보는 군복무 시절 공수부대 복장의 사진 한 장을 공개하면서 폭파병의 임무를 잘 수행해 전두환 장군 등으로부터 표창장을 받기도 했다고 설명했다. 그런데 방영직후 그는 당 안팎으로부터 예상치 못한 비난에 휩싸이고 말았다. ‘지나친 안보 콤플렉스’, ‘그걸 왜 버리지 않았느냐’, ‘전두환 표창장 받았다고 안보무능 없어지지 않는다’ 등 비난공세에 직면해야 했다.

설상가상 광주시민들도 비난대열에 나섰다. 현지에서 ‘5.18 정신 헌법 전문 삽입’을 연설하려 했지만, 5.18 유가족들에 둘러싸인 채 앞뒤를 설명하느라 진땀을 흘려야 했다. 정치권으로부터 뭇 매를 맞은 셈이다. 문 캠프가 그 사진을 고른 것은 다분히 그의 안보관을 문제 삼는 세력을 의식해서였을 것이다. 하지만 결과는 실패작이 되고 말았다.

같은 날 안희정 후보는 1980년 5월 시커멓게 화염이 치솟은 광주 금남로 현장의 흑백사진을, 이재명 후보는 얼마 전 돌아가신 어머니와 함께 찍은 사진을 공개했다. 이재명 후보는 특히 자신이 시장으로 있는 성남 시정에 개입하려는 형과의 불화로 빚어진 불행한 가족사를 털어놓고 국민에게 사죄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이들도 사진을 통한 자기 PR에는 성공한 셈이다.

바야흐로 투표일이 하루하루 다가오고 있다. 이번 대선에서는 당선자에게  인수위를 꾸릴 시간 여유조차 허락하지 않는다. 짧은 선거운동 기간 중 쏟아냈던 말들을 정리하고 이제는 실천으로 보여줘야 할 것이다. ‘인사가 만사’라는 말이 이번처럼 실감나게 들린 적도 드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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