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하도겸 칼럼니스트
우리말에 ‘띄엄띄엄’이라는 말이 있다. 사전적으로는 붙어 있거나 가까이 있지 않고 조금 떨어지면서 거듭되는 간격이 짧지 않고 긴 모양을 가리킨다. 우리 주변에 띄엄띄엄 이어지지 않고 단절되어 벌어진 간격이 있는 것에는 어떤 것이 있을까? 공간, 시간, 사람들의 관계든 무엇이나 이어지지 않고 끊어졌음에도 불구하고 띄엄띄엄 이어져 있을 수 있다. 우리의 기억도 그런 것이 아닐까?

우리 삶의 기억은 완벽하지 못하다. 세월의 아픔이 남긴 자연의 흔적인지 아니면 인위적으로 왜곡된 고통의 파편 때문인지 알 수 없다. 하지만 우리의 기억은 띄엄띄엄 단절되어 있다. 그리고 참으로 멀리 이어져 있고 시간 아니 의식의 흐름 속에서 그 간격은 점점 더 넓혀져만 가는 느낌이다. 그러고 벌어진 만큼이나 그 이상의 시공간이나 관계의 사이사이에는 보다 더 뭉뚱그려져 기억할 필요조차도 없는 무던한 일상으로 채워져 있기도 하다.

마치 정원에 핀 두 그루의 꽃나무들 사이에 있는 풀, 흙, 바람, 아지랑이 등은 그 이름조차 불려지지 않았기에 기억의 대상조차 되지 못하는 것들이 있다. 하지만 그것이 일상이든 아니면 여백이든 그 무엇이든 간에 간격을 채워주는 소중한 것이 아닐까? 물론 우리 삶의 기억들 사이에 벌어진 간격. 그곳에 채워진 선명하지 못한 것들의 모습 가운데는 자연스럽게 또는 인위적으로 지워진 기억도 함께 하고 있다.

▲ 반야용선도 앞에 선 서윤희 작가
삶을 반추하는 수행자들은 그런 기억의 간격을 그림으로 나타내면 어떤 시각화가 가능할까 늘 궁금해하며, 깊은 명상에 잠긴다. 그리고 명상 속에 보여진 실상과 추상의 연속 속에서 가끔 기억이 단절된 곳에 추상 속에서 실상을 찾기도 한다. 그리고 그 실상이 바로 고통의 상처이며 거기에는 한때는 애틋했던 그리움이 배어있기도 하다. 그리고 그런 그리움이 있기에 선명한 실상의 모습은 더욱 더 값진 ‘아름다운 추억’이 되는 것은 아닐까?

그렇게 사유하며 기억과 간격 모두에게 의미를 부여하는 과정은 고통이나 상처에 대한 기나긴 치유과정의 행복의 길이기도 하다. 그리고 그 과정을 거친 후의 기억의 간격은 그 자체로서 또 하나의 기억의 간격을 만들어 내며 살아가기도 한다.

오는 22일(토)까지 개최되고 있는 OCI미술관 서윤희 개인전 ‘기억의 간격’의 또 다른 이름은 화원(畵苑)이다. 화원에 여러 가지 뜻이 있겠지만, ‘그림동산’이라고 하면 이해가 쉬울 듯 싶다. 기억 속에 드러난 그리고 드러나지 않은 모양들을 그려서 층층이 쌓아올린 동산이라는 의미는 어떨까? 그리고 언젠가 기억이나 왜곡조차 무의미해지는 ‘무아’나 ‘열반’의 경계에서 사라진 동산은 어떤 모습을 보일까?

▲ 기억의 간격. 열반도
서윤희 작가는 기억 속 행복했던 일상과 더불어 상처로 남은 일들을 작품 속에서 풀어내어, 화해와 치유의 메시지를 전한다. 신작 <기억의 간격_반야용선도>(2017)는 5m 대형 한지에 바닷물, 닥나무 등 자연물의 흔적을 내고, 갖가지 천연 염료로 색을 더해 얼룩을 남긴 작품이다. 아미타불이 극락으로 향하는 반야용선도에 상처를 주고 입은 중생들을 태워 가는 모습을 통해 용서를 암시한다. 아울러 작품 <기억의간격 홍연>과 <기억의 간격 비망>에서는 그리던 인물들을 생략하고 흔적만 남기며, 유한한 시간을 사는 우리가 세속의 껍질을 벗고 궁극적으로 자연으로 돌아가기 전까지 조금씩 삶과 기억을 내려놓는 과정들도 암시한다.

요즘 티베트니 달라이라마를 팔면서 ‘명상’ 마케팅을 하는 적지 않은 승려들이 있다. 가봐도 행복하지 않으니 결국 상처받은 이들은 시간과 돈을 뜯기며 다시 상처를 입게 될 따름이라고 한 수행자는 전한다. 조계사 바로 옆 OCI미술관 전시관에서 만난 한 관람객은 “반야용선도를 비롯한 서 작가의 작품들을 만나는 것만으로도 ‘치유’가 되며, ‘명상’이 무엇인지 알겠다”고 전한다. 관람 역시 무료이며 작품은 판매도 하지 않는데, 여기서 얻은 ‘행복’은 무엇으로 보상해야 할까? 화가가 할 수 있는 보시는 바로 이런 것인가 보다.

※ 서윤희 작가는 이대 미대 동양화과에서 학사와 석사를, 한국화과에서 박사를 받았다. 국립창동미술창작스튜디오 4기 작가 및 제29회 중앙미술대전 선정작가로 제7회 송은미술대상전에서 우수상을 수상했으며, 2015년에는 제56회 베니스비엔날레특별관 참여작가로 수십차례 ‘기억의 간격’을 테마로 개인전을 열고 있다.

저작권자 © 시사위크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