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문재인 대통령 당선자는 ‘나라다운 나라’, ‘완전히 새로운 대한민국’을 만드는 데 힘쓸 각오다. <더문캠 제공>
[시사위크=소미연 기자] 문재인 대통령 당선자의 어린 시절 장래희망은 역사학자였다. 하지만 부모의 뜻을 거스를 수 없었다. 부친 고 문용형 씨와 모친 강한옥 씨는 6·25전쟁 당시 흥남철수 때 월남했다. 문재인 당선자의 고향 경남 거제는 부모가 피난길에서 처음 정착한 곳이다. 가난할 수밖에 없었다. 터전을 옮긴 부산 영도에서도 판잣집이 들어선 달동네에 짐을 풀었다. 부친이 장사를 하고, 모친이 연탄배달을 해도 끼니를 걱정했다. 부모의 고된 삶을 지켜본 장남은 마음이 아팠다. 그래서 부모의 바람대로 법대와 상대로 진로를 바꿨다.

실제 문재인 당선자는 공부를 잘했다. 부산 최고 명문으로 불리는 경남중학교와 경남고등학교를 졸업했다. 하지만 공부만 하는 모범생과는 거리가 멀었다. 술도 마셨고 담배도 피웠다. 싸움에 말려 친구들과 의리를 지키려다 정학을 당하기도 했다. 때문에 별명도 ‘문제아’였다. 정작 사춘기 시절의 방황은 독서로 달랬다. 학교도서관에 마지막까지 남아 책을 읽었다. 소설로 시작된 독서는 ‘사상계’와 같은 사회비평 잡지로 영역이 확대되면서 우리 사회의 아픈 현실을 마주하게 됐다. 그가 운동권에 뛰어든 배경이다.

◇ 학생운동, 인권변호사로 다져진 ‘사람이 먼저’

문재인 당선자는 재수 끝에 1972년 경희대학교 법학과 4년 전액 장학생으로 입학했다. 그해는 박정희 정권의 10월 유신 선포와 함께 대학마다 탱크가 진주할 정도로 분위기가 살벌했다. 대학생들의 시위가 전국으로 확산되자 박정희 전 대통령은 긴급조치 1, 4호를 발동한 데 이어 1974년 민청학련 사건과 인혁당 사건이라는 대규모 공안사건을 조작 지시했다. 문재인 당선자는 유신반대 학내시위를 주동하다 체포돼 구류처분을 받고 풀려났으나, 이듬해 인혁당 사건 관계자들이 사형을 당하자 또다시 학내시위를 주도했다. 결국 구속됐다.

▲ 문재인 당선자는 유신반대 학생운동 전력 때문에 판사 임용에서 탈락했다. 이후 억울한 사람을 대변하는 변호사가 되기로 결심했으나, 노무현 전 대통령을 만난 이후 삶이 달라졌다. <더문캠 제공>
문재인 대통령 당선자는 석방 직후 징집신체검사와 입영통지서를 받고 강제징집을 당했다. 하지만 군 복무도 열심히 했다. 그는 특전사령부 제1공수 특전여단에 배치돼 1978년 2월 만기 제대할 때까지 특A급 사병으로 불렸다. 폭파과정 최우수와 화생방 최우수 표장을 받았고, 상병 때는 북한이 일으킨 ‘판문점 도끼 만행 사건’에 대한 대응작전에 투입되기도 했다. 문제는 제대 후였다. 복학의 길은 막혔고, 취직은 대학 졸업장이 없어 힘들었다. 그 와중에 맞닥뜨린 부친의 갑작스런 사망은 문재인 당선자를 사법고시의 길로 이끌었다.

문재인 당선자는 부친의 49재를 마친 다음날 전남 해남 대흥사로 들어갔다. 1979년 사법고시 1차에 합격했고, 이듬해 2차에도 합격했다. 2차 합격 통지서는 경찰서 유치장에서 받았다. 1980년 학교로 돌아온 그는 5·18광주항쟁을 사흘 앞둔 15일 서울역 앞 시위에서 발생한 경찰 사망사건의 참고인으로 조사를 받느라 유치장에 갇혔다. 5·17비상계엄확대조치 발동에 따른 조치로 구금기간이 길어졌다. 3차 면접을 앞두고 안기부 직원이 물었다. 데모할 때와 생각이 같냐는 것. 문재인 당선자는 답했다. “내 행동이 잘못됐다고 생각하지 않는다”고.

문재인 당선자는 사법연수원 12기 수료식에서 차석으로 법무부 장관 표창을 받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판사 임용에서 탈락했다. 시위 전력 때문이었다. 결국 부산으로 내려왔다. 모친을 모시며 억울한 사람을 대변하는 변호사가 되기로 결심했다. 그의 귀향은 노무현 전 대통령과 운명적인 만남을 이끌었다. 처음엔 동업자였다. 각종 인권, 시국, 노동 사건을 맡으면서 서로에게 삶의 동반자로 변해갔다. 특히 문재인 당선자는 노무현 전 대통령과 함께 한 1987년 6월 항쟁을 살아온 동안 가장 보람 찬 일이었다고 회고했다.

▲ 문재인 당선자는 참여정부 시절 노무현 전 대통령의 지근거리에서 국정 전반을 보좌했다. 이에 대해 그는 “밖에서 비판하는 것만으로는 절대 알 수 없는 소중한 자산”이라고 설명했다. <더문캠 제공>
두 사람의 인연은 참여정부로 이어졌다. 문재인 당선자는 민정수석 두 차례와 시민사회수석을 거쳐 ‘마지막 비서실장’으로 재임했다. 국정 전반을 보좌하다보니 늘 격무에 시달렸다. 오죽하면 민정수석 1년을 지내는 동안 치아 10개가 빠졌을까. 건강상의 이유로 자리에서 물러났지만 청와대로 다시 돌아왔다. 탄핵안이 국회를 통과하면서 노무현 전 대통령이 위기에 몰린 것. 탄핵 재판을 진두지휘했던 문재인 당선자는 노무현 전 대통령의 서거 이후 상주 역할까지 도맡아했다.

◇ 대선 재수로 더욱 절박해진 정권교체

공교롭게도 노무현 전 대통령의 서거는 ‘정치인 문재인’이 부상하는 계기가 됐다. 2012년 19대 총선 출마가 그 첫 걸음이 됐다. 야권의 험지로 꼽히는 부산 사상구에서 당선한 뒤 그해 6월 18대 대선 출마를 공식 선언했다. 국민적 지지를 등에 업고 13차례에 걸친 당내 경선에서 모두 1등을 차지하며 대선 후보로 선출됐다. 본선 결과는 아쉬웠다. 하지만 의미 있는 기록을 남겼다. 당시 문재인 당선자는 득표수 1,469만표로 48.02%의 득표율을 거뒀다. 야권 대선후보 가운데 역대 최고치다.

대선 패배 이후 깊은 반성과 성찰의 시간을 보냈다. 무엇보다 박근혜 정부의 무능과 참담한 실패를 보면서 책임을 통감했다. 문재인 당선자는 19대 대선 과정에서 줄곧 “세월호와 국정농단 사태로 국민들이 받은 상처를 생각하면 더욱 송구하다”며 고개를 숙였다. 절박함은 커졌다. 반드시 정권교체를 이루고 국민들이 한 목소리로 요구하는 ‘나라다운 나라’, ‘완전히 새로운 대한민국’을 만드는 데 도구가 되고 싶었다. 그는 “정치가 운명처럼 다가왔다면, 이제는 역사적 소명으로 받아들이고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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