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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종 ‘평양 주석궁에선’] ‘천리마’로 부족했나… 허리 휘는 북한 주민

   
▲ 이영종 중앙일보 통일전문기자.
[시사위크] 북한 관영매체들은 요즘 평양의 뉴타운 선전에 바쁘다. ‘여명거리’로 이름 붙여진 이곳을 두고 “세상에 내놓고 자랑할 만한 현대 건축 거리의 본보기”라고 찬양한다. 지난 5월11일자 노동신문은 “상상했던 것보다 더 희한하고 멋있는 만복의 별천지가 펼쳐져 있었다”며 한 평양 주민의 반응을 싣기도 했다.

여명거리는 지난 4월 13일 완공식을 갖고 입주를 시작했다. 북한 매체에 찬양 선전이 한 달 넘게 이어지고 있는 건 여명거리 건설이 김정은 노동당 위원장의 지시로 시작된 때문이다.
 
집권 6년차인 김정은 위원장은 고층아파트 등을 지은 뒤 핵·미사일 개발에 기여한 과학자와 대학 교수 등에게 무상으로 나눠주는 방식을 구사해왔다. 여명거리도 마찬가지다. 문제는 첨단공법이나 건설자재·장비도 부족한 상태에서 조기완공을 서두르는 속도전 방식으로 공사가 진행되고 있다는 점이다. 북한은 여명거리 70층 주상복합 건물의 외벽타일 공사를 불과 13일 만에 끝내는 등 “기적적인 속도를 내고 있다”고 자랑한다.

이를 두고 건축 전문가들 사이에서는 날림공사 우려가 나오고 있다. 마치 1950~60년대 북한에서 벌어졌던 대규모 부실공사의 전철을 밟고 있다는 것이다. 당시 북한은 ‘평양속도’를 내세워 “14분 만에 집 한 채를 지었다”고 선전했다. 7,000세대분 공사 자재로 2만 가구를 지었다는 발표를 내놓기도 했다. 하지만 부실공사 후유증이 만만치 않자 김일성이 공개석상에서 비판하는 일이 벌어졌다.

김정은 정권 들어서도 무리한 공기단축과 이에 따른 부실공사로 대형 참사를 빚어낸 전과가 있다. 2014년 5월 평양 평천구역에서 23층 신축 아파트 붕괴로 수백 명의 사상자가 난 일은 북한 주민들 사이에 소문으로 파다하게 번졌다. 당시 위성사진 등으로 상황이 공개되고 입소문이 퍼지자 북한도 할 수 없이 관영매체를 통해 사고 사실을 공개하기도 했다. 그런데도 이처럼 여명거리 건설을 선전·선동에 이용하는 건 체제결속을 비롯한 정치적 목적도 작용하고 있다는 분석이다. 만리마속도를 국제사회의 대북제재에 맞서기 위한 움직임으로까지 부풀려 선전하며 김정은을 중심으로 한 충성유도와 단결에 활용하려는 의도란 얘기다. 대북제재에도 불구하고 경제가 차질 없이 돌아간다는 걸 과시하려는 속셈이란 것이다.

주민들은 “천리마로는 부족해서 이젠 만리마까지 등장했냐”라며 괴로워하고 있다는 게 북한 사정에 밝은 탈북 인사들의 전언이다. 만리마는 ‘하루에 만리를 달리는 아주 뛰어난 말’을 일컫는 표현이지만 북한에서는 요즘 노동력을 쥐어짜기 위한 상징물로 자리 잡았다. 만리는 3,927km에 해당하는 거리다. 아무리 명마(名馬)라 해도 하루에 이런 거리를 달리는 건 불가능하다. 그만큼 혹독한 노력경쟁, 즉 서로 생산성이 누가 높으냐를 놓고 다투는 방식의 노동력 끌어내기가 북한 당국에 의해 전개되고 있다는 얘기다.

만리마는 지난해 5월 열린 북한 노동당 7차대회에서 당 위원장 김정은의 연설을 통해 본격 등장했다. 김정은은 자신의 집권이후 성과를 스스로 자랑하며 “10년을 1년으로 주름잡아 달리는 만리마 시대를 열었다”고 주장했다. 이후 북한 전역에는 만리마운동 열풍이 거세게 일었다.

만리마운동은 김정은의 할아버지인 김일성이 집권 시기 주창한 천리마운동에서 따온 것이다. 이른바 ‘6.25 전쟁 전후 복구 건설 시기’인 1956년 12월 열린 노동당 전원회의에서 김일성 당시 수상이 주창했다. 한때 북한 전역을 휩쓴 ‘천 삽 뜨고 허리펴기’나 ‘새벽별 보기’ 등이 모두 천리마운동에서 파생된 노력경쟁 운동이다.

문제는 북한 주민들이 집권 6년차에 접어든 김정은의 막무가내식 생산성 향상 요구에 지칠 대로 지쳐있다는 점이다. 속도전을 넘어 각종 ‘전투’라는 명목의 사활을 건 경제 살리기가 이어지고 있다. 지난해만해도 연초부터 김정은의 지시로 ‘70일전투’를 벌였고, 5월 노동당 7차 대회를 마친 뒤엔 곧바로 ‘200일전투’에 나서야 했다. 일 년 열두 달 중 무려 9개월을 ‘마른 수건도 짜는’ 식으로 시달린 것이다.

이런 상황이 벌어진 건 속도전에 대한 김정은의 유별난 집착 때문이란 분석이다. 김정은은 집권 초기부터 과시성 건설·건축 사업을 문어발식으로 벌여놓으면서 공기단축을 통한 조기완공을 요구했다. ‘마식령속도’는 그 원조 격이라 할 수 있다. 강원도 원산 인근 700m 이상 고지에 위치해 ‘말도 쉬어서 넘는다’는 마식령 지역에 12개의 슬로프를 가진 대규모 스키장을 불과 몇 달 만에 속성 건설한 데서 따왔다는 ‘마식령속도’ 때문에 관계자와 주민들은 몸살을 앓아야 했다.

김정은은 평양 순안비행장을 국제공항으로 만들겠다며 수억 달러를 들여 리모델링 했다. 하지만 자신이 주도한 핵·미사일 도발로 국제사회의 대북제재 파고는 높아졌고 일주일에 몇 편에 불과하던 국제 항공노선은 더욱 줄어들고 있는 상황이다. 평양 시내 중심가에서 불과 20km 거리에 자리한 공항을 오가기 위해 고속철도를 놓으라는 현실과 동떨어진 지시를 했다는 사실이 북한 관영매체로 알려지면서 웃음거리가 되기도 했다.

무엇보다 이른바 ‘3난’으로 불리는 식량난·외화난·에너지난에 시달리는 주민들의 삶을 외면한 김정은의 도발행보가 문제로 지적된다. 집권 벽두부터 핵 능력 고도화와 미사일 도발에 매달리면서 국제사회의 대북제재의 수위를 올리는 자충수를 두어왔고, 급기야 후견국인 중국마저도 대북송유 중단과 같은 조치를 심각하게 고려할 수밖에 없는 상황을 만들었다.

상황이 이렇게 되면서 주민들은 “노동당은 못 믿겠다. 우리를 먹여 살리지 못한다. 차라리 장마당을 믿는 게 낫겠다”며 비공식경제에 명줄을 거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1994년7월 김일성 사망 이후 대홍수와 기근으로 200~300만명이 아사했다는 이른바 ‘고난의 행군’ 시기의 트라우마 때문이다. 이제 장마당은 북한 주민들의 생계를 책임지는 산소호흡기 역할을 하고 있다. 북한에게 지금 필요한 건 전설 속 준마인 만리마가 아니라 지친 주민들을 어루만져 줄 새로운 리더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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