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준범 전 국방홍보원장.
[시사위크] 최근 일본의 한 지한파 외교관이 쓴 책 한 권이 한국인들의 감정을 자극하고 있다. 2010년부터 2년 반 동안 주한 일본대사를 지낼 때까지 12년 동안 지한(知韓)을 넘어 친한(親韓)으로까지 우호적인 인물로 알려진 무토 마사토시(武藤正敏·70)씨가 쓴 책이 바로 그것이다.

제목이며 표지 제본 등은 저자의 의도와는 무관하게 출판사 측 편집자가 정하기 마련이지만, 우선 제목부터가 삐딱하게 꼬여 있다. ‘한국인으로 태어나지 않아 다행’이라는 제목만으로도 독자들은 한국에 대해 좋지 않은 감정을 연상할 것이다.
 
책 표지의 좌측 상단에 주먹을 불끈 쥐고 있는 문재인 대통령의 얼굴 사진을 클로즈 업 해 놓았고, 그 밑에 ‘왜 지금 문재인인가! 벌어진 입이 다물어지지 않는다’고 쓴 카피가 달려 있다. 표지에 나와 있는 카피를 읽어보면 놀랍게도 지난 겨울 광화문 촛불 시위 때 태극기를 흔들며 ‘반(反) 문재인’을 외치던 국내 자칭 보수단체들의 주장과 흡사하다.
 
한국에서 6개월간의 촛불 명예시민 혁명의 산물인 문재인 대통령과 그 정부를 어떻게든 흠집 내고, 자유한국당을 비롯한 한국 내 ‘반(反) 문재인’ 세력과의 갈등을 부추기려는 불순한 의도가 깔려 있음을 어렵지 않게 간파할 수 있다. 그는 이 책에서 한국의 대통령 문재인을 ‘친북·반일의 최악의 대통령’이라고 매도하는가 하면 ‘오로지 북한만을 생각하는 사람’으로 몰아붙이고 나섰다.

무토 씨는 이번 대선에서 한국인이 대통령을 잘 못 뽑았다고 주장한다. 이 무슨 해괴한 논리인가. 남의 나라 대선결과를 놓고 이러쿵저러쿵 가치 평가를 하는 것 자체가 얼마나 무례한 일인가? 더욱이 당선된 대통령을 잘못 선출했다고 거침없이 말하는 것은 외교사에 유례를 찾기 힘든 도발적 망언이 아닐 수 없다.

책의 서장을 보면 ‘문재인 크라이시스가 일한(日韓)을 덮친다’고 돼 있고, 그 1장에는 ‘최악의 대통령 문재인은 누구인가’라며 문재인 대통령을 신상 털기 식으로 소개하고 있다. 출범한지 한 달 밖에 안 된 문재인 정부가 무슨 위기이며, 최악의 대통령이라고 단정 짓는 근거는 무엇인가? 또 그렇게 판단하는 주체는 도대체 누구이고, 그 이유는 무엇인가?
 
또 이 책 제 2장은 ‘집요한 반일(反日)의 광풍(狂風)이 몰아치고 있다’고 했다. 한일 양국간에 위안부 문제 등 갈등이 존재하는 것은 엄연한 현실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광풍이 분다고 말할 정도는 정말 아니다.
 
무토 씨는 ▲흔들리는 위안부 합의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정대협) 활동 ▲강제징용자에 대한 판결 ▲한일 군사정보보호협정(GSOMIA)의 향방 등을 한·일간 광풍의 사례로 들고 있다. 하지만 이런 문제들은 양국 사이에 이미 오래전부터 부상해 왔던 것으로 ‘광풍’이란 표현은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 양국관계가 그가 우려할 만큼 위기상황이 아니라는 근거는 이것 말고도 얼마든지 많다.

지난 1일 도쿄에서 이 책이 나오자 재일 한국인은 물론 전·현직 특파원들은 하나같이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중앙일보 남정호 논설위원은 “그동안 무토 대사가 한국 내에서 했던 언행대로라면 일본인 모두가 욕을 해도 끝까지 이 나라를 감싸야 할 인물이 바로 무토였다”면서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그러면서 그는 일본 지성을 향해 “누구보다도 한국을 감싸줘야 할 전직 대사가 등 뒤에서 칼을 꽂는 행동을 서슴지 않으면 어떻게 일본을 믿고 일 할 수 있겠느냐고 묻고 싶다”고 말했다.
 
무토 전 대사는 40년간의 외교관 생활 중 무려 12년을 한국에서 근무한, 자타가 공인하는 지한파 외교관이었다. 그는 일본 외무성내 한국 전문가 집단인 ‘코리안 스쿨’의 멤버로, 2010년 대사 부임 당시 금의환향이라도 하는 듯 열렬한 환대를 받았었다. 세 차례나 한국에서 근무한 끝에 얻은 대사 자리였다.
 
부임 이듬해인 2011년 발생한 동일본 대지진 때는 한국인들이 십시일반으로 성금을 모아 전달하자 “이토록 한국인의 정을 느낀 적이 없었다”며 최대한의 감사를 나타냈다. 2년여 한국근무를 마치고 떠나는 그에게 박근혜 정부가 수교훈장을 주자 “한국과 40여년 인연을 맺어온 것을 행복으로 생각한다”고 감사의 뜻을 표하기도 했다.
 
모두 5장으로 구성된 이 책을 보면 한국에 대한 혐오감을 주기로 작심한 것 같다는 인상을 지울 수가 없다. 앞서 말한 1, 2장에 이어 3장에서는 ‘국가도 국민도 고립시키고 있는 한국’, 4장에서는 ‘이처럼 가혹한 사회에서 살아갈 수 없다’고 하는 등 마치 한국·한국인에 대해 깊은 애정을 표시하는 것 같은 애국 코스프레를 하고 있다.  
 
마지막 5장에서는 한 술 더 떠 ‘유화(宥和)는 한층 더 김정은의 폭거를 부른다’로 끝을 맺고 있다. 북한과는 절대 협력과 평화를 논해서는 안 되고, 오로지 적대적인 강경 대처만이 한반도의 안전을 보장할 수 있다며 한국 내 극우 보수주의자들을 선동하는 불순한 의도가 그대로 드러나 보인다.

무토 씨가 ‘한국인은 머리가 아니라 하트(심장)로 생각한다’고 여러 차례 비판한 데 대해 동아일보 심규선 고문은 “일본은 차가운 머리만 있고 따뜻한 심장이 없어 국제사회에서 늘 더 이상 성장하지 못한다”고 반박했다. 무토 전 대사는 지난 촛불집회에 대해 “한국인은 분노에 몸을 맡기고 촛불집회로 달려가고 문재인 대통령을 선택했다”고 주장하는 등 온 세계가 경탄해 마지않았던 촛불시민혁명의 의미를 애써 축소하고 깎아 내렸다.
 
현직 대통령 탄핵 위에 출범한 문재인 정부에 대해 일본 정부의 여론은 국내와는 달리 “악의와 반감으로 가득 차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 1970년대 재일교포 간첩단 사건으로 19년이나 무고한 옥살이 끝에 몇 년 전 출소해 일본 리쓰메이칸 대학에서 연구고문으로 근무하고 있는 서승 씨는 이렇게 말한다.
 
“이런 맹랑한 주장의 배경에는 일본군 위안부 문제 등 일본에 역사청산을 주문하는 진보세력과 대북 대화노선을 표방한 문재인 대통령에 대한 반감이 깔려 있다. 북한은 무조건 무력으로 굴복시켜야 한다는 골수·냉전·호전주의자의 오만과 구태에 다름 아니다.” 
 
그는 이어 “남북 간에 갈등의 평화적 해결을 도모하는 한국정부의 자세는 지극히 당연하며, 대북 제재에 앞장서는 일본을 보면 약자를 집요하게 괴롭히고 의기양양한 골목대장의 모습이 겹친다”고 말했다.
 
또 “일본은 문재인 대통령의 민족화해 정책을 폄하하고, 강경 대응하라고 훈계하는 무례를 서슴지 않고 있으며, 바로 이것이 지금도 청산되지 않는 동아시아의 가해자와 피해자의 역사적 구조”라고 지적하며 “아베 총리가 북한의 미사일 발사를 기화로 도쿄의 전철운행을 정지시켜가면서까지 전쟁위기를 부추기고, 일본의 군사화와 개헌추진에 악용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무토의 이번 책은 한일 간 우호증진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이 책은 심지어 한국의 극우 친박 세력들을 선동해서 문재인 정부에 맞서 싸우라고 부추기는 듯한 불순한 의도가 엿보인다. 무토가 책에서 노린 것도 한국 내 이념갈등을 확대하고 내분을 조장하는 전통적인 이간책(離間策)이 아닐까?

일본 도호쿠 대학의 이인자 교수(문화인류학)는 그런 황당무계한 책을 쓴 무토에 대해 “기껏 그런 정도의 사람이었구나 하고 쿨하게 인정하고 내버려 둘 수 있는 자긍심을 가졌으면 한다”고 한국인들에게 주문했다. 크게 주목할 만한 인물도 못 되니 우리가 통 크게 그냥 무시해 버리고 넘어가자는 얘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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