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상기 법무부 장관 후보자가 인사청문회 준비를 위해 27일 오후 사무실이 마련된 서울 광화문의 한 빌딩으로 출근하고 있다. <뉴시스>

[시사위크=정계성 기자] 제자들은 박상기 법무부장관 후보자를 “행동하는 지식인을 강조했던 사람”으로 회고했다. 부지런히 습득한 지식을 바탕으로, ‘더 나은 세상’을 위해 실천해야 한다는 말을 수업 등을 통해 누차 얘기했다고 제자들은 입을 모았다.

이런 맥락에서 박상기 후보자는 학생들의 자치 학술활동을 적극 독려했다. 2001년 연세대 법과대학에 입학한 A씨는 이렇게 설명했다.

“법대 내 학내 자치단체는 ‘학회’로 구성됐었다. 과거에는 학생운동에 매진했는데 민주화 이후 순수 학술단체로 점점 자리를 잡았다. 철학과 사학, 시사 등 학술토론에 매진하는 학회를 박상기 교수는 유독 좋아했다. 학회마다 지도교수가 있었지만 교수가 세미나에 참석하는 경우는 거의 없는데 박 교수는 직접 찾아와 논평을 했다.”

제자들을 독려하는 것뿐만 아니라, 박 후보자는 자신의 사회활동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 경실련 등 시민단체에 몸담아 ‘사법개혁’에 목소리를 냈던 것이 대표적 사례다. 특히 노무현 정부 때는 법무부 정책위원, 대법원 사법개혁위원회에 참여해 사법개혁을 주도했던 경험도 있다. 당시 재학 중이던 B씨는 “자부심”을 말했다.

“연세대가 법학 계통에서는 사실 비주류로 통했다. 그런데 박상기 교수가 전면에 나서 사법개혁을 주도하고 법조계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모습을 보며 든든했다. 사법시험 준비기간 동안 박 교수가 주장했던 학설이 언급되고 다뤄질 때면 뿌듯함과 자부심이 느껴졌다.”

법대 내 모 교수와 총여학생회가 충돌했을 때 학생들의 편을 들어준 일화도 전해진다. 해당 교수는 자신의 수업시간에 여성비하 발언으로 논란을 불렀고, 총여학생회가 이를 문제 삼으면서 사건이 커졌다. 교수와 학생단체의 대립이 격해지자, 박 후보자가 학생들의 의견에 힘을 실어주면서 사건이 마무리됐다.

C씨는 당시를 이렇게 회고했다. “‘남학생은 막노동하고 여학생들은 몸을 팔아서라도 책을 사서 공부하라’고 교수가 수업시간에 말했고, 이것이 나중에 문제가 됐다. 교수와 총여학생회가 중앙도서관에 서로 대자보를 붙이며 격하게 싸웠는데 학교 전체가 시끌시끌 했다. 결국 박 교수가 나서서 교수에게 자제를 촉구한 것으로 기억한다. 논란을 일으켰던 교수는 결국 학교를 떠났다.”  

일부 졸업생들은 박 후보자의 엄격했던 학사관리를 떠올리기도 했다. 학생들이 ‘낭만’ 혹은 ‘학생운동’을 핑계로 수업을 빼먹거나 학업에 열중하지 않는 것을 박 후보자는 참지 못했다고 한다.

2008년 졸업한 D씨는 “학업성취도나 수업참여도가 미진한 제자들에 대해서는 학번·학년을 고려하지 않고 평가가 가차 없었다”며 “나중에 상대평가로 전환되면서 등수별로 A학점을 받는 학생들이 많아졌지만, 절대평가 시절에는 C와 D 학점이 많아서 ‘CD플레이어’로 악명이 높았다”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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