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김재필(미 델라웨어대학 사회학 박사)

[시사위크] 僞學日益(위학일익), 爲道一損(위도일손). 노자의 《도덕경》 제48장에 나오는 구절인데, 무슨 말인지 알겠나? 학문의 길은 하루하루 쌓아가는 것이고, 도의 길은 하루하루 없애 가는 것이라는 노자의 말이 사실 잘 이해가 안 되지? 나도 처음 《도덕경》에서 저 구절을 접했을 때는 무슨 말인가 했네. 공부를 하면 지식이 점점 쌓여가야 정상인데, 그게 좋은 게 아니라니 당황할 수밖에. 《도덕경》제20장에는 절학무우(絶學無憂)라는 표현도 나오네. 배우는 일을 그만 두면 근심이 없어진다는 뜻이야. 그럼 노자는 왜 이렇게 배움(學)에 대해서 부정적이었을까?

배움에 대한 노자의 주장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학문에 대한 유가(儒家)의 입장을 알아야 하네. 맹자가 말한 ‘사단(四端)’이 무엇인지는 알지? 맹자는 우리 인간들은 사단, 즉 측은지심(惻隱之心), 수오지심(羞惡之心), 사양지심(辭讓之心), 시비지심(是非之心)을 갖고 태어난다고 주장하네. 그것들은 인간이라면 누구나 갖고 있는 도덕적 가능성과 실마리들이야. 유가에서는 우리들이 갖고 있는 그런 잠재적 가능성을 계발하기 위해서 학문과 교육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지. 누구나 그런 가능성을 계발하면 하늘을 알 수 있을 뿐만 아니라 하늘과 하나가 될 수 있다고도 주장해. 그래서 학문을 통해 인성을 계발하고 수양하여 최고의 경지에 이른 사람이 이른바 ‘호연지기(浩然之氣)’를 가진 군자야. 이런 식으로 유가에서는 서양의 계몽주의자들처럼 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하네.

반면에 노자는 우리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누구나 이미‘참된’존재라고 생각해. 《도덕경》에서 갓난애(嬰兒)가 도의 상징으로 자주 등장하는 것도 이 때문이야. 노자는 그렇게 태어난 인간이 인위적인 교육을 통해 원래의 자연적인 모습을 잃어버리는 게 문제라고 주장하지. 18세기 말의 서양 낭만주의자들이나 루소처럼 문명이 인간을 타락시킨다고 생각하는 거야. 그래서 노자는 ‘도의 길은 하루하루 없애 가는 것(爲道一損)’이라고 말한 거야. 머릿속에 있는 헛된 지식, 즉 분별지(分別智)들을 하나하나 내다버릴 때(unlearning)에만 잃어버린 자연성을 회복하여 다시 갓난애 상태로 돌아갈 수 있다고 주장해. 그렇게 해서 ‘함이 없는 지경(무위)’에 이르면 이루어지지 않는 일이 없다는 거지.

나는 《도덕경》 제48장을 읽을 때마다 이 땅의 많은 지식인들을 생각하네. 노자가 살았던 2500년 전에 비하면 지금은 이른바 배운 사람들이 엄청나게 많아. 지금은 좀 떨어졌지만 대학진학률이 80%를 오르내리던 때도 있었으니까. 해년마다 국내외 대학에서 박사 학위를 새로 취득하는 사람도 많고,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교수들도 많아. 하지만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이 노자가 살았던 춘추전국시대보다 더 나아졌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을까? 유가에서 말하는 것처럼 많은 사람들이 교육을 통해 인의예지(仁義禮智)를 갖춘 군자가 되었을까? 나는 더 많이 배운 사람들일수록 더 이기적인 존재로 ‘소인’이 되는 게 우리 사회의 문제라고 생각하네. 자기 자신과 가족의 이익과 안락 외에는 별로 관심이 없는 사람들이 이른바 많이 배운 사람들 아닌가? 요즘 인사청문회에 나와 이것저것 변명하느라 쩔쩔매는 장관 후보자들을 보게나. 문제가 없는 후보가 하나도 없는 걸 보면서 그동안 우리가 어떤 세상에서 살고 있었는지 알겠더라고.

예전에 리영희 교수가 어떤 책에서 “지식이 아무리 많아도 의식이 없으면 그 지식은 죽은 지식이다”라고 했던 말이 생각나네. 어쩌면 나를 포함한 많은 사람들이 그런 ‘죽은 지식’을 갖고 지식인 행세를 하고 있는지도 몰라. 게다가 전체가 아닌 아주 작은 부분만 보고 모든 걸 아는 것처럼 허세를 부리고 있는지도 모르고. 그렇게 살아왔다고 솔직하게 인정하면 노자의 말이 맞은 것 같네만… 노자의 말을 다시 읽으면서 이만 마치겠네. “학문의 길은 하루하루 쌓아가는 것./ 도의 길은 하루하루 없애 가는 것./ 없애고 또 없애/ 함이 없는 지경無爲에 이르십시오./ 함이 없는 지경에 이르면/ 되지 않는 일이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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