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재인 대통령이 당선 후 첫 인선에 대해 청와대 춘추관에서 직접 브리핑하고 있다. <뉴시스>

[시사위크=정계성 기자] 19대 대선은 역대 어느 선거보다 변수가 많았던 선거로 기록된다. 최순실의 국정농단으로 문재인 후보가 대세론을 형성하기 전까지 확실한 ‘상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대권을 꿈꾸는 유력 정치인들은 너도나도 ‘큰 그림’을 그리며 선거판에 뛰어들었다. 수십년 정치밥을 먹은 관계자들이나 고참 기자들도 복잡한 선거구도에 혀를 내두를 정도였다.

‘문재인 대세론’이 형성된 이후에는 ‘대항마’ 찾기로 흐름이 변화했다. 그 과정에서 반기문 전 유엔사무총장이 부상했다가 낙마했고, 황교안 전 총리, 안희정 충남지사, 안철수 국민의당 후보, 홍준표 자유한국당 후보 순으로 지지층 대이동이 일어났다. 대항마 찾기의 한 방편으로 정운찬 전 총리 등이 포함된 ‘제3지대 통합설’도 꾸준히 제기됐다.

◇ 현역의원 연쇄탈당 막아냈던 문재인의 ‘스킨십’

결과적으로 ‘변수’ 차단에 성공한 문재인 후보가 무난히 당선됐지만 위기는 있었다. 안철수 국민의당 후보의 부상이 대표적인 사례다. 당시 일부 여론조사에서 안철수 후보의 지지율이 문재인 후보를 능가하는 결과도 나왔었다. 민주당 선대위에 몸담았던 관계자들도 “아찔했던 순간”이라고 입을 모은다.

당내 정치인들의 탈당러시도 위험요소였다. 김종인 전 민주당 대표가 탈당을 감행했고, 최명길 의원과 이언주 의원이 뒤를 이었다. 박영선 의원이나 이종걸 의원 등 당내 중진급의 후속탈당이 이어졌다면 ‘문재인 대세론’이 흔들리는 것을 막기 어려웠다. 문재인 캠프 공보를 맡고 있던 한 관계자는 “겉으로는 내색하지 않았지만, 내부적으로는 판도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굉장히 예민했다”고 털어놨다.

일촉즉발의 순간 빛났던 것은 문재인 후보의 스킨십이었다. 문 후보는 탈당설이 돌았던 의원들에게 자신이 직접 수차례 전화를 걸었고, 촉박한 선거운동 기간에도 2~3차례 방문해 설득작업에 나섰다. 문 후보의 이 같은 노력에 탈당을 고심하던 당내 현역의원들이 마음을 돌리게 됐다.

당시 탈당을 고민하던 한 의원은 이렇게 회고했다고 한다. “늦은 감은 있었지만, 문 후보가 몇 차례 전화를 걸고 직접 찾아와 탈당을 만류했다. 필요하다면 문재인은 직접 움직이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집권의지와 함께 절박함이 있었고, 스킨십이 참 좋았다.”

◇ “문재인은 절실했고, 안철수는 거만했다”

안철수 국민의당 후보가 대선 전 마지막 기자회견을 하는 모습 <뉴시스>

캠프 내 실무자들 등 하부조직을 챙기는 것도 인색하지 않았다. 이동시간이 촉박한 경우가 아니라면, 문 후보는 선거운동이 끝나고 국회의원·지역관계자·율동팀과 일일이 악수와 포옹을 나눴다. 이는 문재인 캠프 내에 큰 잡음 없이 선거를 치를 수 있는 밑바탕이 됐다.

우상호 선대본부장은 “(문 후보가) 한 분 한 분 설득해서 우리 쪽으로 끌어오는 모습을 보면 (2012년 대선과) 상당히 달라진 모습”이라며 “‘문재인이 달라졌다’고 평가받기에 미흡하지 않다”고 설명했다.

반면 안철수 후보의 경우 스킨십과 당내 장악력에서 문제를 보였다는 평가다. 특히 안 후보를 중심으로 ‘반문재인’ 세력이 뭉칠 기회가 분명히 있었지만, 후보 스스로 기회를 살리지 못했다는 얘기다. 대선 당시 ‘제3지대’에서 활동했던 한 관계자는 “안철수 후보가 직접 나서서 설득하고 끌어오는 모습을 보여주지 못했다”며 “문재인은 절실했지만, 안철수는 거만했다”고 평했다.

국민의당 내에서도 비슷한 문제제기가 이뤄졌다. 김대호 사회디자인연구소장은 국민의당 대선평가토론회에서 “안철수의 성공신화에는 파트너들과의 협력이 없었다”고 판단했다. 그러면서 “2011~2012년의 안철수 현상은 아예 정당의 뒷받침을 받지 않았고 2016년 국민의당 돌풍도 정치파트너들과 협력은 부차적이었다”며 “영웅주의·엘리트주의에 함몰되면 자신을 맹종하는 소수 측근들로 강고한 사조직 블록을 형성하고 모든 것을 이를 중심으로 끌어가게 돼 있다”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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