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남한산성’이 개봉 이틀 만에 100만 관객을 돌파했다. 영화는 병자호란을 배경으로 당시 인조가 피신해있던 남한산성이 무대가 됐다. <영화 ‘남한산성’ 포스터>

[시사위크=홍숙희 기자] 영화 ‘남한산성’은 스포일러가 필요 없다. 이미 역사 속 병자호란이 영화의 결말이다. 때는 1636년이다. 조선의 16대 왕 인조는 청나라의 침입에 남한산성으로 피신한 뒤 45일 동안 대항을 이어갔다. 하지만 강화도 함락 소식에 결국 삼전도로 나와 항복했다. 이름하여 ‘삼전도의 굴욕’이다.

인조는 항복의 표시로 3배9고두를 해야 했다. 상복을 입고 3번 큰절을 하며 머리를 땅바닥에 9번 박는 것이다. 절하는 소리를 청나라 태종의 귀에 들리도록 하기 위해서다. 인조의 이마에선 피가 흘러내렸다. 항복의 대가는 더 컸다. 배상금은 물론 소현세자와 봉림대군, 척화파 신하, 백성 20만명을 인질로 보냈다.

청의 신하 나라가 된 조선은 훗날에도 비극이 계속됐다. 소현세자는 조선으로 돌아온 지 2달도 채 되지 않아 갑작스런 죽음을 맞았고, 봉림대군(효종)은 어이없게도 종기 치료 중 과다출혈로 사망했다.

영화 ‘남한산성’을 관람하기 전 주목할 부분은 영화의 배경이 된 병자호란의 발생 원인이다. 임진왜란 이후 명나라는 멸망의 길을 걷고 있었다. 이 틈에 청나라의 전신 후금의 세력이 커지고 있었다. 당시 15대 왕 광해군은 후금에게 후환을 당할 수 있다는 판단 하에 명나라와 후금 사이에서 중립을 지켰다. 하지만 광해군의 반대파 서인들이 인조반정을 일으키면서 상황이 달라졌다.

왕위에 오른 인조는 광해군과 달리 배금친명 정책을 추진했다. 후금을 배척하고 명과 가까이 지내겠다는 것. 이에 후금은 조선을 침략하며 전쟁을 일으켰다. 바로 정묘호란이다. 전쟁에서 패배한 인조는 후금에게 생필품을 제공하게 됐다. 이후 청으로 이름을 바꾼 후금은 조선에 대한 압박을 가하기 위해 척화론을 주장하는 신하를 압송하라는 명령을 보냈다. 인조는 이를 묵살했다.

청나라는 다시 침입을 했다. 병자호란의 배경이다. 승패는 이미 예정돼 있었다. 14만명에 달하는 청의 군사가 몰려왔지만, 조선의 군사는 2만명도 되지 않았다. 정작 인조가 피신해있던 남한산성에선 전투가 일어나지 않았다. 청나라는 천혜의 요새에서 전투를 벌일 경우 타격이 적지 않을 것이라 생각하고 공격 대신 성안의 물자와 식량이 떨어지기를 기다렸다. 처음부터 조선이 이길 수 있는 전쟁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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