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동경제학파의 권위자인 리처드 세일러 교수가 2017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로 선정됐다. <뉴시스/AP>

[시사위크=현우진 기자] ‘합리적 인간’은 오랫동안 주류경제학파의 이론을 설명하는 효과적인 도구였다. 경제주체로서의 개인은 언제나 수치와 확률에 근거한 결정을 내리며 자신의 이익만을 추구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경제적 선택에는 보다 복잡한 심리가 영향을 미친다는 주장이 일부 학파에서 제기되면서 인간의 합리성뿐 아니라 비합리성을 설명하는 길도 조금씩 열리고 있다.

스웨덴 노벨상위원회는 9일(현지시각) 행동경제학의 권위자로 손꼽히는 리처드 세일러 시카고 경영대학원 교수를 2017년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로 선정했다. 이번 노벨경제학상에는 발표 전 콜린 캐머러 캘리포니아 공과대학 교수 등 일부 행동경제학자들이 유력한 후보자로 거론되는 등 행동경제학파의 높아진 위상이 잘 드러났다.

◇ 행동경제학파, 경제학의 소외계층에서 차세대주자로

외신과 경제학계는 노벨상위원회의 선택을 호평하는 분위기다. 적기에 받아야 할 사람이 받았다는 반응이 주를 이루고 있다.

블룸버그는 10일(현지시각) 세일러 교수의 수상을 보도하며 “주류경제학파가 논의의 방향을 잘못 잡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고 입장을 밝혔다. 특히 지난 2008년 금융위기를 기점으로 경제학계의 기계적 접근법에 대한 문제의식이 높아졌다는 분석이다. “어느 때보다 세계 경제와 시장이 유동적이고 일관성 없는 시기다”는 블룸버그의 발언은 ‘실제 사람들의 실제 행동’을 설명하려는 세일러 교수의 노력이 긍정적으로 평가되는 근거가 됐다.

이코노미스트도 9일(현지시각) “경제학과 심리학을 접목시킴으로서 편향된 인식이 경제적 선택에 얼마나 깊은 영향을 주는지 통찰했다”며 세일러 교수의 수상을 지지했다. 세일러 교수가 다수의 저작과 강연을 통해 행동경제학파에 대한 대중의 인식을 제고시켰다는 사실이 중요하게 다뤄졌다. 특히 그의 가장 유명한 저서인 ‘넛지’는 정부·기업이 합리적 인간상 대신 행동경제학적 통찰을 채택해 정책의 효율성을 꾀할 수 있다는 사실을 드러낸 것으로 조명 받았다.

행동경제학파는 최근 들어 미국·유럽의 공공정책분야에서 활동영역을 넓혀가는 중이다. 세일러 교수와 함께 행동경제학을 연구했던 캐스 선스타인 하버드대학 교수는 백악관 규제정보국의 전 책임자이기도 하다. 영국 내각은 지난 2010년 행동과학 전담반을 꾸려 정부 예산을 감축하는 임무를 맡겼다. 이코노미스트는 “세일러 교수의 수상은 본인의 성취뿐 아니라 그가 대표하는 가치의 중요성이 재발견됐다는 증거이기도 하다”고 평했다.

◇ ‘넛지 이론’은 나의 선택권을 말살하는가

반면 ‘넛지 이론’을 여론조작의 일종으로 취급하며 위험성을 강조하는 입장도 있다. 개인의 자유를 강조하는 보수·자유주의자들에겐 경제주체 개개인이 깨닫지 못하는 사이 선택을 유도하는 ‘넛징’이 전체주의의 망령으로 보일 수 있기 때문이다. 영국의 과학전문지 ‘뉴 사이언티스트’가 넛지 이론을 ‘강박의 또 다른 이름’이라고 표현한 것 또한 같은 맥락이다.

일견 다양한 선택권을 보장해주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론 특정 선택을 유도하는 상품구조인 ‘선택설계’가 그 예시다. ‘선택적 가입’ 대신 일괄가입 후 탈퇴신청자를 받는 오스트리아의 장기기증제도나 ‘5년 만기’ 등의 옵션이 없는 결혼제도는 모두 현상유지를 선호하는 인간의 특성을 이용해 각각 높은 장기기증률과 낮은 이혼율을 이끌어냈다. 긍정적으로 해석될 여지가 높은 사례들이지만, 중요한 것은 경제주체들이 선택지를 충분히 인지하고 있었느냐다.

조지메이슨 대학의 경제학 교수이자 블룸버그 칼럼리스트인 타일러 코웬은 이를 두고 “보수주의자들은 오히려 세일러 교수의 수상을 더 반가워해야 한다”고 평가했다. ‘넛지 이론’이 사회적 보수주의의 현대화에 기여했다는 점에서 보수주의 사고에 가장 크게 기여한 현세대 이론으로 뽑힐 만하다는 것이 코웬 교수의 시각이다. 도덕과 전통을 중시하는 사회적 보수주의는 넛지 이론을 지역공동체의 유지를 설명하는데 사용하곤 한다.

코웬 교수는 넛지 이론의 명암에 대해 “자유의 강화로 볼 것이냐, 교묘한 조작으로 볼 것이냐는 이론이 실제로 구현되는 맥락과 함께 판단돼야 한다”며 중립적 태도를 취했다. 다만 코웬 교수는 “넛지 이론을 대체하려는 시도는 선택의 자유가 아니라 (사회적)폭력을 낳을 것이다”며 행동경제학에 대한 논의와 연구는 지속돼야 한다고 당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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