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세영 태영그룹 회장과 아들 윤석민 부회장은 지난달 SBS미디어그룹에서 사퇴했다. 이명박 정권 시절 4대강 비판보도를 막고, 태영건설이 4대강 사업을 수주했다는 논란이 제기된 이후다. <뉴시스>

[시사위크=권정두 기자] 요즘 우리나라의 최대 화두는 적폐청산이다. 이러한 화두는 박근혜 전 대통령과 최순실,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불러왔다. 각기 다른 환경에서 전혀 다른 삶을 살아온 이들이었지만, 뚜렷한 공통점이 있었다. 대를 이어 사회 정의 및 질서 위에 군림하며, 적절한 시점에 잘못을 바로잡지 못한 것이 쌓이고 쌓여 결국 터져버렸다는 점이다.

재계순위 40~50위권에 이름을 올리고 있는 태영그룹은 이들과 닮은 구석이 많다. 적폐청산이 화두인 지금 완전히 새롭게 태어나지 못한다면 향후 더 큰 몰락으로 이어질 수 있다.

◇ SBS에서 불러난 부자(夫子)

태영그룹이 최근 주목을 받은 이유는 SBS 때문이다. 태영그룹은 윤세영 회장 등 오너일가가 태영건설을 지배하고, 태영건설이 방송사업 부문 중간지주사격인 SBS미디어홀딩스를 지배하고 있다.

윤세영 회장과 아들 윤석민 부회장은 지난달 “경영과 소유를 분리하겠다”며 SBS미디어그룹에서 물러나겠다는 뜻을 밝혔다. 윤세영 회장 등이 SBS 보도에 개입했다는 주장이 제기되고 이것이 확산되자 부담을 느낀 것으로 보인다.

SBS노조 측은 윤세영 회장이 이명박 정권 시절 논란 속에 강행된 4대강 사업에 대해 비판적 보도를 내지 못하도록 압력을 가했다고 주장했다. 비판적 보도를 내보낸 기자를 직접 면담하고, 이후에도 변화가 없자 아예 발령을 냈다는 것이다. 노조는 또한 박근혜 정권 당시 “박근혜 정권을 도우라”는 내용의 보도지침이 내려졌다고 주장했다.

윤세영 회장은 정권의 하수인 노릇을 했음을 인정하기도 했다. 그는 “우리가 안고 있는 어려움을 개선하기 위한 과정에서 절대 권한을 갖고 있던 당시 정권의 눈치를 일부 봤던 것도 사실”이라며 “과거 저의 이런 충정이 지금 와서 돌이켜보면 공정방송에 흠집을 낼 수 있다고 생각한다”고 밝혔다.

하지만 SBS노조 측은 ‘사퇴쇼’에 불과하다며 비판의 목소리를 멈추지 않았다. 이사임면권은 그대로 유지한 만큼, 생색내기에 불과하다는 지적이다.

윤세영 회장은 박근혜 정권을 도우라는 취지의 보도지침도 내린 것으로 알려져 파문이 일었다. <뉴시스>

◇ 노태우 때 얻은 방송사업권, 이명박 4대강에 부역

태영그룹이 걸어온 길을 되짚어보면, 단순히 두 사람의 SBS미디어그룹 사퇴로 넘어갈 문제가 아니라는 점을 알 수 있다.

6.25전쟁으로 월남한 가정에서 자란 윤세영 회장은 어머니의 각별한 교육열로 서울대 법대에 입학했다. 이후 국회의원 3선을 지낸 고(故) 이동녕 회장이 이끌던 봉명그룹에 입사했고, 보좌관으로서 고 이동녕 회장의 의원 생활을 도왔다. 이때 정계에 많은 인맥을 쌓은 것으로 알려진다.

고 이동녕 회장이 정계에서 물러난 뒤에는 1973년 태영건설을 설립해 본격적인 사업가의 길로 들어서게 된다. 초기엔 녹록지 않았지만, 1988년 서울올림픽을 앞두고 각종 건설 공사가 늘어나면서 빠르게 성장할 수 있었다.

결정적인 변곡점은 1990년대 초 찾아왔다. 당시 노태우 정권이 방송법을 개정하며 민간방송 설립 허가에 나섰고, 태영건설이 여기에 지원해 사업권을 따냈다. 건설회사인데다 지원한 다른 기업에 비해 규모도 훨씬 작았기 때문에 특혜논란이 거세게 제기될 수밖에 없었다. 특히 윤세영 회장은 당시 공보처 장관과 막역한 사이였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후 컬러TV의 보급이 크게 늘고, 방송콘텐츠산업이 빠르게 발전하면서 SBS도 급성장했다. 특히 KBS, MBC와 함께 3대 지상파 방송국으로서 막강한 영향력을 지니게 됐다.

하지만 윤세영 회장은 이를 오·남용하고 말았다. 앞서 언급했듯 SBS의 4대강 사업 비판 보도를 막은 동시에 태영건설은 굵직한 4대강 사업권을 따냈다. 또한 “박근혜 정권을 도우라”는 지시가 내려진 때에는 SBS 출신이 청와대 및 방송통신위원회의 요직에 앉은 바 있다.

심지어 다른 건설사들의 비리를 보도하며 태영건설은 쏙 빼놓거나, 태영그룹이 운영하는 인제 스피티움 홍보에 SBS를 적극 활용하는 모습까지 보였다. 공공재인 방송을 사유화하고, 시청자와 국민을 우롱한 것이다.

◇ SBS 사퇴로 끝? 재발방지·견제장치 만들어야

자신이 가진 힘을 잘못 사용한 것은 박근혜 전 대통령이나 최순실, 이재용 부회장도 마찬가지였다.

태영그룹의 적폐청산이 중요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지금 제동을 걸지 못하면 2대, 3대엔 더 심각한 문제가 드러날 수 있어서다.

윤세영 회장의 아들인 윤석민 부회장은 재계에서 가장 빨리 임원에 오른 인물로 유명하다. 1989년 학업을 마친 직후 26세의 나이에 태영건설 기획담당 이사로 입사했다. 남들은 최종목적지로 여기는 임원이 그에겐 출발점이었다.

윤석민 부회장은 역대 재계 오너일가 중 가장 젊고 빠른 시기에 임원이 됐다. <뉴시스>

이처럼 출발점부터 특별했던 그가 오랜 세월 아버지 윤세영 회장 곁에서 본 것, 그리고 배운 것은 무엇일까. 적어도 정의나 도덕에서는 거리가 멀 것으로 보인다.

태영건설은 그동안 무수히 많은 담합사건에 연루됐고, 2004년엔 당시 MBC 소속으로 재벌 비리를 취재하던 이상호 기자에게 명품가방을 슬쩍 건넸다가 망신을 당하기도 했다.

2014년 벌어진 한 사건도 꽤나 의미심장하다. 인제 스피티움이 운영권 분쟁에 휩싸였을 당시 윤석민 부회장의 측근으로 알려진 한 임원이 용역을 동원해 폭력을 행사한 혐의로 구속됐다. 해머 등을 든 300여명의 용역들이 분쟁을 겪던 상대 회사에 폭력을 가한 것이다.

우리가 청산해야할 적폐가 감옥 안 인물들에만 그치지 않는다는 것. 태영그룹이 말해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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