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승찬 스토리닷 대표.

촛불은 여성이다. 촛불 시민혁명은 여성주의 시대를 선언한 대변화의 서곡이다. 차별을 반대하는 도도한 물줄기다. 박근혜 탄핵을 외치던 광장의 한복판에서 ‘여성 이슈’는 오랜 억압의 껍질을 깨고 튀어 올랐다.

촛불 1년을 맞아 박근혜-최순실 게이트가 발화된 2016년 10월 24일부터 헌재 탄핵심판이 이뤄진 주말인 2017년 3월 12일까지 소셜 빅데이터를 들여다봤다. 온 국민이 촛불의 추이를 예의주시하던 때다.

이때 트위터, 블로그 등에서 사람들이 언급한 키워드 50개를 분석했다. 50대 키워드를 언급한 횟수는 무려 1억4천여만 건. 이 가운데 가장 압도적인 키워드는 2,800만 건을 기록한 ‘여성’이다. 이는 2, 3위에 오른 1,100만여 건의 ‘국민’과 ‘탄핵’보다 두 배 이상 많은 수치다. 460만 건의 ‘촛불’보다는 일곱 배나 많다. 페미니즘 혹은 여성주의를 직접 언급한 횟수도 160만 건에 이른다.

1위부터 10위까지 상위 키워드를 열거하면 여성, 국민, 탄핵, 언론, 촛불, 미국, 경찰, 세월호, 시민, 검찰 순이다. 무엇이 여성을 이렇게까지 많이 호명하게 했을까. 여러 가지 이유가 있을 것이다. 박근혜 전 대통령이 여성이라는 이유로 비하의 대상이 됐을 때 여성들은 가만히 있지 않았다. 여혐 발언이 이어질 때마다 광장 한복판에서 문제를 제기하고 싸웠다. ‘아낙네’ 같은 발언이 나왔을 때도 그랬고 유명 가수가 여성비하 가사를 썼을 때 그들이 중심 무대에 서는 것을 거부했다.

여성들은 목표를 이루기 위해 나쁜 방법을 쓰는 것을 거부했다. 논란도 있었다. 하지만 과거와 달리 물러서지 않았다. 시민들의 광장에서 더 이상 차별을 허용하지 않았다. 획일적인 목표를 이루기 위해 다양성의 가치를 포기하지 않았다. 촛불혁명은 권력에 대한 단순한 저항을 넘어 함께 살아가는 공동체를 위한 공화주의 혁명이었다. 촛불혁명이 87년 6월 항쟁과 근본적으로 구분되는 지점이기도 하다.

이와 관련해 ‘성소수자 및 동성애’ 키워드가 250만 건을 기록했고 ‘장애인’도 86만 건이 언급됐다. 여성, 성소수자, 장애인 등 사회적 약자의 목소리가 당당하게 울려 퍼졌던 것이다. 촛불 광장은 사회적 약자의 목소리를 수면 위로 끌어올린 다양성의 축제였다.

촛불 1주년이다. 지난해 10월 29일 1차 촛불집회가 열린 이래로 많은 것이 변했고, 또 변하지 않았다. 23차에 걸쳐 1,700만여 명이 참여한 촛불집회는 국가권력을 사유화한 핵심 범죄자들을 탄핵하고 구속했다. 이 평화적이고 전혀 새로운 항쟁은 민주주의 역사를 다시 썼다. 국가권력이 재벌과 결탁해 초유의 권력남용을 범했을 때, 각성된 시민들이 이를 바로잡을 수 있음을 보여줬다. 처음부터 끝까지 평화적이었다. 창의성과 다양성, 생동감이 거리를 가득 채웠다. 독일 프리드리히 에버트 재단은 촛불 시민들에게 2017 인권상을 수여하면서 “세계인들에게 민주주의적 참여에 대한 새로운 기준을 세웠다”고 했다.

촛불 1년, 광장의 민주주의는 직장으로 이어졌는가. 가정으로 이어졌는가. 사회에서 뿌리내렸는가. 국회 입법으로 제도화되고 있는가. 촛불이 드러낸 시민성은 자기반성으로 체화되었는가.

아직은 이런 질문들이 불편하다. 촛불의 동력으로 압도적인 정권교체를 했다. 물론 이것만으로도 대단하다. 하지만 권력의 교체는 변화의 시작에 불과하다. 더 나아가야 한다. 더 깊어져야 한다. 더 치열해야 한다. 우리의 공동체를 더불어 살 만한 곳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시민의식의 변화가 필요하다. 민주공화국을 향한 대장정은 이제 막 시작됐을 뿐이다.

살충제 계란이 만들어지고 팔린다. 여성의 안전을 위협한 생리대 논란도 뜨겁다. 여성에 대한 혐오와 폭력 또한 끊이지 않는다. 강원랜드와 공공기관의 취업특혜는 어떤가. 극심한 안보위협 속에서도 방산비리 소식이 터져 나온다. 장애인들은 여전히 시설에 갇혀 있다. 장애인 특수학교 설립을 반대하는 주민들도 촛불 한 번쯤은 들었을 것이다. 우리나라의 온갖 교회들은 입만 열면 동성애 혐오에 매달린다. 성소수자 인권은 배제되기 일쑤다. 직장내 성희롱과 프랜차이즈의 갑질논란도 크게 줄어들지 않았다.

국회는 234명 탄핵찬성의 순간을 까맣게 잊은 듯하다. 촛불광장이 애타게 요구했던 재벌개혁, 검찰개혁, 정치개혁 이슈는 아직 법제화의 길 위에 올라서지 못했다. 협치를 이야기하긴 쉽다. 하지만 협치의 길을 찾기는 어렵다.

일반적으로 협치의 1차적 책임은 여당에 있다. 하지만 촛불시민이 제기한 그 무수한 과제들을 단지 여당이 추진한다는 이유로 야당들이 반대만 한다면 우리의 해법은 달라져야 한다. 방문진 이사 지명의 공정성을 문제 삼아 자유한국당은 국감을 보이콧했다. 그런데 국감장에 나온 고영주 방문진 이사장은 버젓이 자유한국당 의원총회에 참석한다. 비상식적 반동의 극치다.

이런 자들이 개혁의 발목을 잡고 과거로 회귀하려 할 때 시민들은 국가와 사회를 한 걸음이라도 전진시키는 방향에서 야당을 압박할 필요가 있다. 물론 여당도 협치를 위한 노력을 더 해야 한다. 234 탄핵 연대를 개혁 연대로 이끌 방안을 찾아야 한다. 그것이 촛불 1년 앞에서 정치권이 가져야할 태도다.

우리는 모두 사회적 편견에 맞서야 한다. 용기가 필요하다. 용기는 더욱 장려될 필요가 있다.

여성에 대한 차별과 폭력은 공동체를 망가뜨리는 제1의 적이다. 장애인에 대한 격리와 차별은 우리 스스로를 격리시키고 억압한다. 성소수자에 대한 혐오와 폭력은 다름을 인정하고 존중할 때만 성립 가능한 공화주의 가치를 파괴한다. 촛불 1주년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새로운 전진’이다. 거대함을 넘어 작은 것에서부터 희망을 쌓는 것이다. 거대한 광장의 촛불은 아주 작아져서 직장과 가정과 사회에서 밝게 빛나야 한다. 작은 행동의 전염성은 가차 없다.

“사회는 당신이 행동하는 대로 만들어진다.”

<민주주의의 정원>에서 에릭 리우와 닉 하나우어가 한 말이다. 민주주의는 정원처럼 가꾸지 않으면 금세 잡초로 뒤덮인다. 민주주의는 작고 섬세한 노력 속에서만 유지된다. 때로는 투쟁이 필요하고 때론 토론이 필요하다. 민주주의를 지키고 가꾸는 핵심은 시민의식이다.

그들은 같은 책에서 이렇게 충고한다.

“우리에게 ‘진정한 시민의식’이 주는 가장 큰 과제는 시장과 국가가 점진적이고 때론 감지하기 어려운 방식으로 우리의 시민의식을 몰아내려는 경향을 가졌음을 끊임없이 자각하고 경각심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마치 끓는 물속에서 서서히 죽어가는 개구리의 우화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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