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대중 전 대통령과 노무현 전 대통령, 그리고 문재인 현 대통령 <뉴시스>

[시사위크=정계성 기자] 1997년 대선 분수령은 ‘병역문제’였다. 당시 신한국당 이회창 대선 후보는 아들의 병역비리 의혹이 커지면서 지지율이 곤두박질치는 상황이었다. 눈덩이처럼 불어나는 의혹을 피하기 위해 이회창 후보 측은 김대중 후보의 병역문제를 걸고 넘어졌다. 김대중 후보가 존재하지도 않는 부대에서 병역을 이행했다는 주장이었다.

물론 김대중 후보는 당시 법령상 병역의무대상자는 아니어서 법적인 문제는 없었다. 그러나 6.25 전쟁 당시 ‘해군 경비대 소속 목포해상방위대’에서 근무했다는 본인의 주장이 입증되지 않을 경우, 정치적 타격은 클 것이 예상됐다. 상대후보 측은 자녀의 병역비리 의혹에 이른바 ‘물타기’를 시도할 것이 불을 보듯 뻔했다.

◇ 흑막의 제보자 덕에 병역의혹 해소한 DJ

당장 캠프와 새정치국민회의에서는 비상이 떨어졌다. 김대중 후보의 병역기록을 증명할 방법을 찾아내는 게 급선무였다. 측근들은 후보의 증언을 바탕으로 당시 목포해상방위대 근무했던 사람들을 수소문했고, 다른 한편으로는 한국전쟁사 등 해당 부대의 존재를 확인할 수 있는 사료를 뒤졌다. 국방부에는 모든 군부대의 연혁사 자료를 요청했다. 한 자료에서 ‘해안방위대’라는 문구가 나와 캠프가 고무됐으나, 김대중 후보는 “해상방위대였다”며 재차 자료조사를 당부했다.

그러나 좀처럼 증인과 부대의 존재를 입증할만한 자료는 나오지 않았다. 그러던 와중 미상의 인물로부터 한 통의 전화가 캠프로 걸려왔다. 당시 국방부가 있었던 용산 삼각지 근처의 모 다방에 가보라는 것이었다. 캠프 관계자는 다방에서 서류 봉투에 든 부대연혁사 복사본을 얻을 수 있었다. 해군 목포경비부 연혁사에는 정확하게 ‘목포해상방위대’라는 명칭과 존재를 확인할 수 있는 내용이 있었다. 뿐만 아니라 소속 장교의 ‘성추문’ 관련 사건이 있었다는 자료까지 나오면서 부대가 실존했다는 결정적 증거로 작용, 국방부로부터 확답을 받는 계기가 됐다.

이처럼 병역문제를 깔끔하게 마무리한 김대중 후보는 대선승리까지 거머쥐면서 정권교체의  염원을 이뤄냈다. 결정적 제보를 받았던 캠프 관계자는 대선이 끝난 이후 미상의 제보자를 찾았다고 한다. 그러나 영화 ‘택시운전사’에 등장했던 김사복처럼 찾을 수 없었다. 전화통화 목소리를 통해 국방부에 근무하는 호남사람으로 추정했을 뿐이다.

◇ ‘대의명분’을 중시하는 호남민심

당시 일을 직접 담당했던 관계자는 이렇게 회상했다. “대선이 끝나고 정권인수가 끝났을 무렵, 국방부를 돌아다니며 당시 제보자를 찾았다. 나중에 알고 보니 부대연혁사에 ‘목포해상방위대’가 존재했다는 점을 이미 국방부는 인지하고도 우리에게 자료를 전달하지 않고 있었더라. 그 내용은 국방부 내에 어느 정도 소문으로 알려져 있었고, 보다 못한 제보자가 등사해 우리에게 몰래 전하려 했던 것 같았다. 고마움을 표시하고 싶었지만 결국 제보자는 나타나지 않았다. 어떤 위험이 도사리고 있더라도 감수하고 정권교체를 해야 한다는 호남사람들의 염원이 아니었겠나.”

제2의 창당을 모토로 국민의당 당권을 쥔 안철수 대표 <뉴시스>

나아가 문재인 대통령을 향한 호남지역의 민심도 같은 맥락에서 해석했다. ‘정권교체’ ‘적폐청산’의 열망은 1997년 때와 비교해 결코 작지 않았고 이것이 결국 표로 연결됐다는 것이다. 대선 때 비록 문 대통령을 지지하지 않았던 사람들까지 문재인 정부를 지지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일각에서는 ‘전략적 투표’라는 이름으로 평가절하하기도 한다. 그러나 실은 ‘정권교체’ ‘지역감정 해소’ 등 대의명분에 대한 ‘가치투표’라는 얘기다. 영남출신 후보를 두 번이나 당선시키는 데 호남이 역할을 한 것도 이 때문이다.

따라서 안철수 대표의 최근 행보는 다소 아쉽다는 평가다. 섣부른 중도행보로 호남민심과 멀어질 수 있다는 점에서다. 최근 안 대표는 바른정당과 정책연대를 추진하는 등 중도로의 확장 가능성을 엿보고 있다. 명시적인 것은 아니지만 당 안팎에서는 전당대회 도전 시점을 기준으로 ‘탈호남’ 행보라는 평가를 한다. 이면에는 다음 대선행보를 위해서는 호남에 묶여서는 안 된다는 판단도 내린 것으로 분석된다.

이에 대해 이 관계자는 “호남은 대의명분에 따라 움직이지 큰 선거에서 결코 정치적 이해타산으로 움직이지 않는다”며 “안 대표가 다음 대선을 본다면 중도확장 혹은 다당제와 같은 계산적 이야기를 할 게 아니라, 대의명분을 세우고 힘들더라도 밀고 가야 했다”고 안타까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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