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위크=정계성·최영훈 기자] 김대중 정부 시절 청와대의 지시로 3,000억원을 조성했다는 폭로가 나왔다. 김대중 정부 당시 국정원 국내파트를 담당하던 김은성 전 국정원 차장의 입을 통해서다. 박주원 국민의당 최고위원의 ‘DJ 비자금설 제보 의혹’으로 정치권이 들끓던 와중에 나온 것이어서 파장이 커질 전망이다.
김은성 전 차장은 최근 <주간조선>과의 인터뷰에서 “2001년 상반기 어느 날 신건 당시 국정원장이 청와대 주례보고를 하고 오후 3시 반에서 4시쯤 카폰으로 전화를 걸어와 ‘시중 은행을 통해 3,000억원을 준비하라. 청와대 회의를 통해 결론이 났다’고 지시했다”고 주장했다.
◇ 김은성 “청와대 지시로 3,000억 조성… 용처는 몰라”
김 전 차장의 증언에 따르면, 시중 6개 은행에서 500억 원씩 총 3,000억 원을 마련했다. 한 개 은행에서 3,000억 원을 마련하는 것은 곤란해 6개 은행에서 나눴다고 한다. 시점은 대북송금 사건 다음 해다. 하지만 김씨는 해당 비자금의 용처와 전달방식, 김대중 전 대통령의 인지여부 등에 대해서는 알지 못한다고 했다.
그는 당시 청와대 실세 ○○○씨와 직접 만나 “‘정권 후반기에 은행에서 그런 거금을 빼면 정치문제가 된다. 6개 은행이 관련되어 있어 보안유지가 어렵다. 은행장 이하 본부 담당자들도 국정원의 요청으로 대출이 됐다는 걸 알 것이다. 자칫하면 정권이 넘어간다’고 따졌다. 그러자 ○○○씨가 ‘나만 한 게 아니다’라고 말해, 내가 ‘그럼 대통령님도 아시느냐’고 되물었다. 그는 (답을 못하고) 머뭇거렸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김 전 차장은 “나중에 문제가 됐을 때 검찰이 ‘돈을 국정원 차장이 직접 마련했다’고 하고 청와대가 싹 빠지면 꼼짝없이 내가 엮인다. 그래서 나는 지시를 받고 지휘계통을 통해 돈을 조성했음을 청와대 실세 ○○○씨에게 강조한 것이다. 용처 또한 물어보면 괜히 엮일까봐 묻지 않았다”고 했다.
김 전 차장은 국정원 출신 인사로 국회 정보위원회 전문위원, 대공정책실장, 대전지부장 등을 거쳐 김대중 정부에서 국정원 2차장으로 발탁됐다. 2차장은 국내정보를 총괄하는 위치로 당시 국정원 내에서도 꽤 영향력을 행사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하지만 인터뷰에 밝힌 내용은 구체적인 자금조성 방식이나 경로 등이 적시돼 있지 않고, 김 전 차장의 일방적인 주장이어서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긴 현재로선 힘들다.
김대중 전 대통령 비서실장 출신인 박지원 의원은 “어떤 정귄에서도 이런 큰 자금을 6개 은행에서 조성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만약 이런 일이 있었다면 6개 은행에서 지금까지 조용하겠느냐”고 반문한 뒤 “은행의 생리도 모르는 일로 소설이며 엉터리”라고 지적했다.
◇ 한국당 “실체적 진실 위해 종합적 대책마련 필요”
다만 진실여부를 떠나 정치권은 급속도로 비자금 정국으로 빨려 들어갈 공산이 적지 않다. 문재인 정부의 적폐청산을 ‘정치보복’으로 규정했던 자유한국당은 김대중·노무현 정부까지 조사대상에 포함해야 한다고 주장했었다. 자유한국당 입장에서는 자신들의 주장을 뒷받침할 수 있는 명분을 일부분 확보한 셈이다.
공교롭게도 이날은 무죄로 판결났던 ‘김대중 전 대통령의 100억 원 비자금’ 사건으로 정치권이 몸살을 앓았다. 당시 의혹의 제보자가 박주원 국민의당 최고위원이라는 보도가 나오면서, 당 안팎으로 논란이 거셌다. 국민의당 내 호남계 의원들을 중심으로 진상규명과 함께 박주원 최고위원의 사퇴 및 사과 요구가 이어지는 상황이다.
박 최고위원은 이와 관련 “누구의 비자금이라고 특정해서 말한 적은 없다”면서도 “지금까지 잠자고 있는 CD(양도성 예금증서)가 몇 백억이 있는데 왜 안 찾아가느냐. 제발 의도를 갖고 괴롭히지 않았으면 좋겠다. 사정 당국 관계자도 이름을 밝히고 정정당당하게 앞으로 나서라”는 의미심장한 말을 남겼다.
자유한국당 원내 핵심 관계자는 <시사위크>와의 통화에서 “그동안 말로만 떠돌던 이전 정부의 돈 관련 이야기의 일단이 드러난 것”이라며 “사실이라면 심각하고 중대한 사안이기 때문에 실체적 진실을 밝히기 위한 다각도의 노력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구체적인 방법론에 관해서는 “정치보복대책 특위 차원에서 할지, 진상규명을 위한 또 다른 당 조직을 만들지에 대해서는 당 지도부를 중심으로 검토가 필요하다”라며 “다음 주 신임 원내대표가 선출되면 원내를 포함해 당 차원에서 종합적인 대책을 내야할 것”이라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