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진걸 민생경제연구소 소장(전 참여연대 시민위원회 위원장)의 진솔한 이야기

‘세류성해(細流成海).’ 가는 물줄기가 모여 큰 바다를 이룬다는 뜻이다. 낙숫물이 바위를 뚫듯, 작은 힘이 모이면 큰 변화를 일으킨다는 의미와도 맥이 닿아있다. 우리는 이미 지난 촛불혁명을 통해 이를 경험했다. 대한민국의 역사를 바꾼 것은 거대 권력도 아니고 정치적인 어젠다도 아니었다. ‘국민주권’을 위해 행동했던 ‘시민들의 힘’이었다. 하지만 아직 가야할 길이 멀다. 이에 <시사위크>에서는 대한민국 변화를 이끄는 중심, ‘시민운동가’들의 릴레이 인터뷰를 통해 좀 더 나은 세상을 위한 제언을 경청해본다. [편집자주]

 

안진걸 민생경제연구소 소장은 대한민국 NGO 대표 시민운동가다. 각종 집회와 시위현장에서 마이크를 잡고 소리치는 그를 목격하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다. 지난 20년간 대한민국의 변화를 이끄는 선봉에 늘 그가 있었다. <사진/김현수 기자>

[시사위크=정소현 기자] 1991년 4월 26일. 명지대학교 강경대 학생이 시위 도중 경찰의 쇠파이프에 맞아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무자비한 시위진압에 전국 대학생들은 분노했다. 이날 법조인을 꿈꾸던 한 대학생은 법전을 덮었다. 80년 광주 5·18항쟁에 이어, 백주대낮에 대학생까지 두들겨 패 숨지게 하는 나라. 바꿔야 한다고 생각했다. 누군가 나서 목소리를 내지 않으면, 그리고 행동하지 않으면 이런 일이 또 재현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사법고시를 포기하고 시민단체로 향했다. 신발이 닳고 목이 쉬도록 현장을 뛰어다니며 변화와 개혁을 외쳤다. 그렇게 20년. 대한민국은 움직였다. 중심에 그가 있었다. 대한민국 NGO를 대표하는 시민운동가, 안진걸 민생경제연구소 소장(상지대학교 초빙교수·전 참여연대 시민위원회 위원장)은 “행동하지 않으면 절대 세상은 변하지 않는다”고 했다.

80년 광주 5·18항쟁에 이어, 백주대낮에 대학생까지 두들겨 패 숨지게 하는 나라. 바꿔야 한다고 생각했다. 누군가 나서 목소리를 내지 않으면, 그리고 행동하지 않으면 이런 일은 또 재현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사진/김현수 기자>

◇ 잔인한 4월, 법관을 꿈꾸던 청년은 법전을 덮었다

서울 모처에서 그를 만난 건 지난 5월 18일. “5.18광주민주화운동 38주년 기념일에 인터뷰를 하게 돼 뜻깊다”고 인사를 건넨 안진걸 민생경제연구소 소장(이하 소장)은 “끔찍한 역사를 떠올려 보면 사회가 참 많이 달라졌구나 싶어 뭉클하면서도, 여전히 가야할 길이 멀다고 생각한다”고 말문을 열었다.

그의 고향은 전남 화순이다. 광주와의 사이에 ‘너릿재’가 있다. 너릿재는 해방 이후 화순 탄광노동자들이 미군정에 학살된 아픈 역사가 서린 곳이다. 80년에도 슬픈 역사는 이어졌다. 안 소장은 초등학교 2학년이던 당시 광주 시민군들이 ‘김대중을 석방하라 전두환은 물러가라’를 외치며 광주에서 화순으로 넘어오는 걸 목격했다.

이명박 박근혜 정권을 거치며 안진걸 소장은 숱한 고초를 겪었다. 그래도 얻은 게 작지 않다. 30개월 미만의 미국산 쇠고기 수입되고 있고, 수입검역체계도 강화됐다. 논란이 많던 한반도 대운하 프로젝트를 백지화 했고, 의료민영화 등에 대해서도 강력한 반대를 명확한 메시지를 던졌다. 최근 대법원이 통신비 원가 공개를 결정한 것도 의미있는 성과였다. <사진/김현수 기자>

화순군민들이 그들을 위해 음식을 나르고 서로를 보듬으며 눈물을 흘리는 모습은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다. 어린 눈에 비친 80년 5월의 모습은 아픔이었고 이해할 수 없는 고통이었다. 훗날 안 소장은 이곳에서 시민들이 계엄군에 의해 잔인하게 학살(‘너릿재 양민학살 사건’) 됐고, 행방불명된 5.18 시민군들이 암매장됐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시민운동가로서의 인연은 어쩌면 이날의 기억과도 무관치 않다. 80년 5월에 이어 박종철·이한열 열사의 사망, 그리고 명지대 강경대 열사의 사망으로 이어진 국가의 폭력. 이후 IMF로 인한 대규모 실업과 자살. 국가는 더 이상 국민들을 안전하게 지켜주지 못했다. 무언가를 해야 한다고 생각했고, 1998년 12월 졸업을 앞두고 참여연대를 찾아갔다.

◇ “지금도 우린 5.18에 빚지고 있다”

그렇게 시작한 시민사회 운동은 20년동안 쉼없이 이어졌다. △반값등록금 △친환경 무상급식 △남양유업 갑을문제 △기업형슈퍼마켓(SSM) 반대 △통신비 원가공개 등 민생문제 최전선에 그가 있었다. △광우병 촛불집회 △다스 BBK 사건 진상규명 △이명박 전 대통령 엄벌△4대강 반대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체결 반대 △‘땅콩갑질’ 대한항공 조현아 고발 △가습기살균제 참사 진상규명 △국정원의 대선개입 △메르스 사태 책임규명 등도 그가 주도하고 투쟁했던 이슈다.

하루 서너 시간만 잤다. 야근과 주말근무도 밥 먹듯 이어졌다. 법원과 집회장소, 경찰서를 뛰어다니느라 새 운동화는 얼마 못가 너덜너덜 거리기 일쑤였다. “그럼에도 행복했다”는 게 안 소장의 말이다. “사회를 바꾸는 일이 쉬울 리 없고, 서민들의 삶에 보탬이 되는 일이 지칠 리 없기 때문”이다. 매일같이 신문을 읽고 참여연대 여러 전문가들과 사안에 대해 토론을 이어갔다. 돈과 권력을 장악한 자들이 한국사회에서 일반 시민과 노동자들을 억압하고 엄청난 폭력을 가하는 현실에서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선봉에 서서 민중의 목소리를 대변하는 것이었다.

‘작은 외침’은 마침내 ‘큰 울림’이 됐다. 2008년 청계광장을 밝힌 촛불은 2016년 광화문광장으로 이어지며 대한민국의 역사를 바꿨다. 이른바 ‘광우병 촛불집회’에서 시작된 2008년 1차 촛불시민혁명은 국가 최고권력을 끌어내린 2016년 2차 촛불시민혁명의 역사적 발판이 됐다. 2018년 3월 이명박 전 대통령 구속 때까지로 보면 촛불시민혁명은 사실상 10년 동안 전개돼 온 셈이다.

2008년에 이어 2016-17로 이어진 촛불시민혁명은 ‘과거에 진 빚’이라는 게 안 소장의 설명이다. 부마항쟁, 5.18, 4.19, 6월항쟁으로 이어지는 민주주의 항쟁의 경험이 쌓이지 않았다면 2016년 같은 대규모의, 아름답고 평화로운 항쟁은 있을 수 없다고 생각해서다. 사진은 지난 2016년 광화문을 가득메운 촛불집회 모습. <뉴시스>

“2차 촛불시민혁명 당시 2,000만명 국민들이 여섯달 동안 길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피 한방울 흘리지 않았고, 다친 사람·구속자 한 명 없이 절대권력자를 끌어내려 감옥에 보냈다. 다른 나라에선 꿈도 못 꿀 일이다. 매우 질서정연하면서 평화롭고 위대한 집회였다. ‘국민의 정부, 국민에 의한 정부, 국민을 위한(of the People, by the People, for the People)’. 링컨이 연설에서나 했던 얘기를 실제 한국에서 보여줬다. 세계 역사상, 세계 혁명 역사상, 세계 민주주의 역사상, 현대역사상 가장 위대한 국민항쟁이다.”

안 소장은 10년 촛불시민혁명을 ‘과거에 진 빚’으로 정의했다. 부마항쟁, 5.18, 4.19, 6월항쟁으로 이어지는 민주주의 항쟁의 경험이 쌓이지 않았다면 2016년 같은 대규모의, 아름답고 평화로운 항쟁은 있을 수 없다고 생각해서다.

그래서 안 소장의 이메일 계정 아이디는 ‘NGO8518’이다. ‘모든 NGO는 80년 5.18에 빚을 지고 있다’는 뜻이다. “서슬퍼런 시절, 누군가의 희생과 투쟁이 없었다면 현재 2만여 NGO와 시민사회는 존재하지 못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안진걸 소장의 ‘수첩’은 ‘족첩(足帖)’으로 불린다. 빽빽하게 메모된 그의 수첩은 발로 뛴 기록이기 때문이다. <사진/김현수 기자>

◇ 그의 가방 속 ‘참여연대 회원가입서’의 의미

안 소장은 지난 4월 사무처장 임기가 종료되며 참여연대를 떠났다. 좀 더 새로운 생각을 가진 후배들이 주도할 수 있도록 자리를 내주는 것이 옳다고 생각해서다. 소회를 묻는 질문에 “홀가분하고 기쁘다”는 말이 돌아왔다.

“이명박-박근혜 시대를 살면서 하루하루 편하지 않았다. 하지만 촛불시민혁명이 일어나고, 상식적인 정부가 들어서고, 좋은 정책이 펼쳐지니 그때 힘들었던 건 다 잊었다. 됐다. 세상이 좋아지면 됐다, 어떤 보상도 바라지 않는다. 참여연대를 그만둘 수 있었던 것도 그런 이유다. 여전히 이명박-박근혜와 싸우고 있었다면 그만두지 못했을 것이다.”

안진걸 소장은 여전히 가방에 참여연대 회원가입서를 갖고 다닌다. 틈만 나면 시민들이나 학생들에게 가입을 권유한다. “행동해야만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사진/김현수 기자>

그럼에도 아직 갈 길이 멀다. 촛불시민혁명이 궁극적으로 성공하려면 ‘국민의 삶이 바뀌었다’는 평가를 받아야 하기 때문이다. 안 소장은 최근 창립한 민생경제연구소에서 민생살리기를 위한 경제민주화운동을 이어갈 방침이다. 힘들게 일하고 받은 월급이 교육비·의료비·통신비·주거비·이자비로 줄줄 새지 않도록 대책을 세우고, 시민행동으로 이어질 수 있는 계획을 세우고 있다.

이제 소속은 ‘민생경제연구소’이지만, 안 소장은 여전히 가방에 참여연대 회원가입서를 갖고 다닌다. 틈만 나면 시민들이나 학생들에게 가입을 권유한다. “행동해야만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어서”다. 미세먼지에 관심이 있으면 미세먼지에 대해 불만만 제기하지 말고 실제 미세먼지를 위해 활동하고 싸우는 시민단체에 가입해야 한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다.

“우리 헌법에 나와 있는 것처럼 대한민국의 주인은 국민이고, 국민은 행복을 추구할 권리가 있다. 그 권리를 지키기 위해선 반드시 ‘행동’해야 한다. 이미 우린 역사를 통해 경험했다. 세상은 결코, 저절로 좋아지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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