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허스토리’가 관객들의 마음에 묵직한 울림을 선사할 수 있을까. < NEW 제공>

[시사위크=이영실 기자] “부끄러워서. 나 혼자 잘 먹고 잘 산 게…”

잊지 말아야 할 또 하나의 역사(history)가 스크린에 펼쳐진다. 위안부 문제를 소재로 한 영화 ‘허스토리’(감독 민규동)를 통해서다. 누군가에게는 외면하고 싶은 그저 오래된 이야기일 수 있지만 현재까지 진행 중인 ‘역사’이고 끝나지 않은 ‘아픔’이다.

1991년 8월 김학순 할머니가 일본군 위안부 피해 사실을 최초로 증언하면서 세상을 뒤집어 놓는다. 부산에서 여행사를 운영하며 홀로 딸을 키우던 사업가 문정숙(김희애 분)은 같은 해 10월 부산 지역에 ‘정신대 신고 전화’를 개설하고 피해자 할머니들의 사연을 접하게 된다.

이 과정에서 문정숙은 16년간 자신의 집안 살림을 맡아 준 배정길(김해숙 분)이 위안부 피해자였던 사실을 알게 되고 아무것도 모른 채 살아온 것에 대한 부끄러움을 느낀다. 문정숙은 재일교포 변호사 이상일(김준한 분)의 도움을 받아 일본을 상대로 할머니들에 대한 사죄와 보상을 요구하는 재판을 시작한다.

‘허스토리’는 1992년부터 1998년까지 6년 동안 일본 정부에 당당히 맞선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과 그들을 위해 함께 싸웠던 사람들의 뜨거운 이야기를 담았다. 당시 일본을 발칵 뒤집을 만큼 유의미한 결과를 이뤄냈지만 제대로 알려지지 않은 채 역사 속에서 잊혀져 왔던 관부 재판 실화를 소재로 한다. 10명의 원고단과 13명의 변호인이 시모노세키(下關, 하관)와 부산을 오가며 치러진 재판이라고 해서 ‘관부 재판’으로 불린다.

관부 재판은 일본 정부를 상대로 한 수많은 위안부 소송 중 유일하게 일부 승소를 받아낸 재판이다. 1990년 후반 당시 동남아 11개국에서 일본 정부를 상대로 위안부 재판 소송 중이었으나 유일하게 관부 재판만이 일부 승소를 거두고 국가적 배상을 최초로 인정받았다.

‘낮은 목소리’(1995, 감독 변영주), ‘귀향, 끝나지 않은 이야기’(2017, 감독 조정래), ‘아이 캔 스피크’(2017, 감독 김현석) 등 그동안 위안부 문제를 다룬 몇몇의 영화들이 관객들과 만났다. 하지만 ‘허스토리’는 또 다른 느낌을 준다. 개개인의 서사에 집중해 스토리적 요소를 강화했고 여성의 이야기라는 점에 초점을 맞췄다. 불편한 회상 장면이나 묘사도 없다. 그럼에도 충분히 그들의 아픔에 뜨거운 눈물이 흐른다.

배우 김희애(왼쪽)와 김해숙이 ‘허스토리’로 관객과 만난다. < NEW 제공>

“위안부 영화라고 하면 희생양이나 꽃다운 나이에 짓밟힌 자존심, 민족 전체의 큰 상처 하나로 언급됐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위안부 피해자들에 대해) 다 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우리가 모르고 있는 할머니들 각각의 아픔을 구체적으로 다뤄야 한다고 생각했다. 상징적인 존재가 아닌 한 명의 여성으로서, 한 명의 인간으로서 용기 내서 싸웠던 모습들을 보여주고 싶었다.” (민규동 감독)

‘허스토리’는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의 개개인의 아픔과 서사에 집중한다. 주변의 시선을 피해 살아오다가 재판 과정을 통해 용기를 얻게 되는 배정길, 힘들었던 삶만큼 거칠고 직선적인 성격을 가진 박순녀(예수정 분), 소극적이지만 따뜻한 마음을 지닌 서귀순(문숙 분), 그리고 과거의 아픔으로 인해 마음의 병을 안고 살아가는 이옥주(이용녀 분)의 모습은 그들이 겪은 끔찍한 과거에 대한 구체적 묘사나 재현 없이도 눈물샘을 자극한다.

이들의 성장도 큰 울림을 선사한다. 피해자가 손가락질 받는 세상에서 아픔을 숨긴 채 그늘 속에 살아야 했던 할머니들은 재판이 진행될수록 자신의 고통과 마주하고 당당히 맞선다. 자신들을 색안경 끼고 바라보는 택시 기사에게 “우리가 국가대표다”라고 외치는 모습은 코끝을 찡하게 만든다.

또 ‘허스토리’는 ‘여성의 이야기(herstory)’라는 점을 분명히 한다. 남성들의 사관인 ‘히스토리(history)’가 아닌 여성들이 자신의 목소리로 직접 써 내려간 역사 이야기를 전한다. 단순히 과거의 사건으로 지나가는 역사가 아닌 뜨거운 용기로 단 한 번의 역사를 이뤄낸 할머니들과 그들을 위해 애쓴 사람들의 연대와 공감이 진정성 있게 그려진다.

‘허스토리’에서 걸크러쉬 매력을 선보인 김희애 스틸컷.< NEW 제공>

여성 사업가이자 원고단의 단장 문정숙이 그 주축이 된다. 바쁜 사업 탓에 살림은 뒷전이고 육아에도 소홀한 그녀는 사춘기를 겪고 있는 딸에게 빵점 엄마다. 위안부 피해 신고 센터를 차리게 된 것도 영업정지를 당한 회사의 이미지를 살리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문정숙은 그들의 아픔을 알게 될수록 점점 자신의 삶이 부끄럽다.

결국 피해자 할머니들을 위해 모든 것을 할애한다. 문정숙은 “대체 왜 이 재판에 그렇게 집착하냐”는 친구 신사장(김선영 분)의 물음에 “부끄러워서. 나 혼자 잘 먹고 잘 산 게”라고 소리친다. 23번의 재판이 끝난 후에도 할머니들과 함께 하는 문정숙의 변화와 성장은 ‘허스토리’가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다.

영화 ‘허스토리’ 스틸컷. (왼쪽부터) 이용녀 예수정 문숙 김해숙 김희애< NEW 제공>

여배우들의 활약도 반갑다. 남성 캐릭터들이 주를 이루고 천편일률적인 소재의 영화가 쏟아지고 있는 한국 영화시장에서 관록의 여배우들이 대거 등장하는 ‘허스토리’는 그 존재만으로도 귀하다. 개인의 삶은 뒤로한 채 오직 재판을 위해 고군분투하는 문정숙 역을 맡은 김희애는 그동안 볼 수 없었던 ‘걸크러시’ 매력을 발산하며 중심축을 담당한다. 김해숙은 배정길의 감정 변화를 완벽히 표현한다. 특히 법정에 서서 일본을 향해 “인간이 돼라”라고 울부짖는 모습은 ‘허스토리’의 명장면 중 하나다.

예수정과 문숙, 이용녀도 깊은 연기 내공으로 작품의 완성도를 높인다. 일상 속에 감춰진 지울 수 없는 아픔을 담담히 표현해내며 먹먹함을 안긴다. 김선영의 활약도 돋보인다. 문정숙의 친구 신사장으로 분한 김선영은 거침없는 입담과 능청스러운 연기로 감초 역할을 톡톡히 하며 분위기를 환기시킨다.

완벽한 해피엔딩이라고는 할 수 없다. 위안부 문제라는 소재가 주는 답답함도 있을 수 있다. 분노가 치밀어 오르고 먹먹함에 눈물도 흐른다. 그러나 신기할 정도로 불편함이 남지 않는다. 끔찍한 아픔이지만 담담하게 그려낸 민규동 감독의 힘인 듯하다. 그동안 용기를 내지 못했다면 이번이 절호의 기회다. 그녀의 이야기이자 너와 나, 그리고 우리의 이야기 ‘허스토리’를 꼭 봐야 하는 이유다. 오는 27일 개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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