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승태 전 대법원장의 재임시절 벌어진 사법부 재판거래 의혹으로 한명숙 전 국무총리의 불법 정치자금 수수 사건에 대한 유죄 판결이 재조명되고 있다. 측근인 황창화(사진에서 오른쪽) 전 국회도서관장은 “한명숙 전 총리가 억울한 옥살이를 했다”고 주장했다. <뉴시스>

[시사위크=소미연 기자] 황창화 전 국회도서관장은 고개를 끄덕였다. 양승태 전 대법원장의 재임시절에 벌어진 재판거래 의혹에서 의문이 풀렸다는 뜻이다. 한명숙 전 국무총리의 불법 정치자금 수수 혐의에 대한 대법원 선고가 느닷없이 결정된 점, 대법원 소부에서 전원합의부로 교체된 점, 파기환송 예상을 뒤엎고 유죄 판결이 내려진 점에 ‘왜?’라는 질문을 가져온 그는 당시 법원행정처에서 작성한 것으로 알려진 ‘한명숙 판결 이후 정국전망 및 대응전략’ 문건을 주목했다.

황창화 전 관장은 14일 <시사위크>와 만난 자리에서 “판결 이후의 상황을 논의했을 정도면 이전부터 관심을 갖고 정치적으로 관여했을 가능성이 높다고 볼 수 있다”고 말했다. 물론 구체적 정황이 담긴 문건은 확인되지 않았다. 그가 주목한 문건 역시 사법행정권 남용 의혹 관련 특별조사단이 비공개 결정을 내렸다. 이를 두고 황창화 전 관장은 “지금 문제가 되고 있는 문건들은 일부에 불과하다. 한명숙 전 총리 관련 문건을 포함해 모두 공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 “양승태-박근혜 독대 수상했다”
 
한명숙 전 총리를 대신해 목소리를 높인 그는 이른바 ‘한명숙 지킴이’로 알려졌다. 재판의 처음과 끝을 지켰다. 한명숙 전 총리의 법정투쟁기를 담은 <피고인 한명숙과 대한민국 검찰>의 저자가 바로 황창화 전 관장이다. 2006년 5월 국무총리실 정무수석으로 첫 만남을 가진 뒤 지금까지 인연을 이어오고 있다. 한명숙 전 총리는 그를 여전히 ‘황 수석’이라고 부른다. 세월이 흘러도 변치 않은 믿음의 표현이다. 이심전심이다. 황창화 전 관장은 한명숙 전 총리의 ‘무죄’를 알리는데 책임감을 가졌다.

한명숙 전 총리는 두 가지 사건으로 불법 정치자금 수수 혐의를 받았다. 첫 번째 사건은 무죄로 선고됐다. 곽영욱 전 대한통운 사장에게 5만 달러를 받았다는 의혹에 대해 법원은 신빙성이 없다고 판단했다. 이를 예상한 듯 검찰은 무죄 선고 하루 전날 별건 수사를 시작했다. 한만호 전 한신건영 대표에게 9억원을 받았다는 의혹이다. 당시 법정에서 한만호 전 대표는 “한명숙 전 총리에게 돈을 준 적이 없다”고 밝혔다. 돈을 준 사람도, 받은 사람도 없는 셈. 하지만 2심 법원은 1심 법원의 판결과 달리 유죄를 선고했다.

황창화 전 관장이 다시 한 번 목소리를 높였다. 그는 “지금도 2심 판결문이 기억난다. 반성의 기미가 없다는 게 양형의 이유였다”면서 “1심에서 무죄를 선고받았는데 무슨 반성을 하란 말인지 너무 황당했다. 지금 보니 2심 재판부 배정부터 한명숙 전 총리의 재판을 두고 논의가 있었던 것 같다”고 설명했다. 실제 양승태 사법부 시절 법원행정처에서 세월호 참사 재판부의 임의 배정을 검토한 문건도 나왔다. 뿐만 아니다. 올해 2월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의 항소심에서 집행유예를 판결한 정형식 판사가 한명숙 전 총리의 2심 재판장이었다.

특히 정형식 판사는 양승태 전 대법원장과 가까운 사이로 알려졌다. 양승태 전 대법원장이 이재용 부회장의 1심 판결을 앞두고 형사13부를 신설한 뒤 정형식 판사를 임명하고 항소심 재판을 배당했다는 게 박영선 더불어민주당 의원의 주장이다. 사법부의 재판거래 의혹이 담긴 문건을 기획한 임종헌 전 법원행정처 차장도 양승태 전 대법원장의 측근으로 분류되고 있다. 결정적인 정황도 포착됐다. 바로 박근혜 전 대통령과 양승태 전 대법원장의 독대다. 독대는 한명숙 전 총리의 대법원 판결이 나오기 2주 전에 이뤄졌다.

한명숙 전 총리는 오는 8월이면 출소 1년을 맞는다. 그간 건강을 추슬러왔던 그는 자신의 삶을 정리하는 차원에서 집필을 시작할 계획이다. <뉴시스>

황창화 전 관장은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 이후 한명숙 전 총리가 상대 진영의 정적이 됐다. 장례위원장으로, 눈물의 조사로 친노진영의 최전선에 있었던 사람이 바로 한명숙 전 총리였다”고 말했다. 박근혜 정권에서 재판거래가 있었다면 “한명숙 전 총리가 가장 큰 선물이 됐을 것”이라는 추측이 가능했다. 그는 지난날을 떠올리며 답답한 심경을 나타냈다. 지금의 사법농단 사태는 한명숙 전 총리에 대한 배반이었다. 한명숙 전 총리는 재판을 받는 내내 “민주주의의 마지막 보류인 재판부를 존중해야 한다”는 입장을 견지해왔다.

황창화 전 관장은 “재심 신청을 고려하고 있다”고 밝혔다. 실추된 명예를 회복해야 한다는데 이견이 없었다. 하지만 서두르지 않았다. 그는 “우리 못지않게 억울한 판결이 많다. 우리가 앞장설 경우 자칫 정쟁으로 빠지거나 정치적 오해를 살 수 있는 만큼 다른 분들의 억울한 누명이 먼저 벗겨져야 한다고 생각한다”면서 “그 과정에서 한명숙 전 총리도 자연스레 누명을 벗을 기회가 있을 것”이라고 기대했다.

◇ 독일에서 ‘치유의 시간’… 책 집필 구상도 

현재 한명숙 전 총리는 독일에서 머무르고 있다. 베를린자유대학 측으로부터 초청을 받아 방문학자 자격으로 출국한지 3개월이 지났다. 당초 약속된 기간은 한 학기지만 연장 가능성이 높다. 주변의 시선을 피해 조용한 시간을 보내기에 적합했다. 황창화 전 관장은 “베를린 기후가 춥다고 알려져서 걱정했는데, 요즘은 날씨가 워낙 좋다고 하더라. 그동안 바쁘고 힘들게 지내온 만큼 치유의 시간이 필요한 것 같다”고 말했다.

향후 한명숙 전 총리는 책을 낼 계획이다. 가제는 ‘허스토리(Herstory)’다. 독재정권에서 맞서 싸우던 재야운동가로, 헌정사상 첫 여성 총리로, 야권 탄압을 온몸으로 견뎌냈던 자신의 삶을 정리하는 차원이다. 재밌는 것은 한명숙 전 총리와 박근혜 전 대통령의 묘한 인연이다. 한명숙 전 총리가 1979년 크리스천 아카데미 사건으로 처음 구속됐을 때 박정희 전 대통령이 사망했다. 이후 한만호 사건으로 두 번째 구속되자 박근혜 전 대통령이 탄핵을 당했다. 황창화 전 관장은 “정말 희한하다”며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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