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남신 한국비정규노동센터 소장

‘세류성해(細流成海).’ 가는 물줄기가 모여 큰 바다를 이룬다는 뜻이다. 낙숫물이 바위를 뚫듯, 작은 힘이 모이면 큰 변화를 일으킨다는 의미와도 맥이 닿아있다. 우리는 이미 지난 촛불혁명을 통해 이를 경험했다. 대한민국의 역사를 바꾼 것은 거대 권력도 아니고 정치적인 어젠다도 아니었다. ‘국민주권’을 위해 행동했던 ‘시민들의 힘’이었다. 하지만 아직 가야할 길이 멀다. 이에 <시사위크>에서는 대한민국 변화를 이끄는 중심, ‘시민운동가’들의 릴레이 인터뷰를 통해 좀 더 나은 세상을 위한 제언을 경청해본다. [편집자주]

 

이남신 한국비정규노동센터 소장은 비정규직 문제가 우리 사회의 화두로 떠오르는 과정에서 상당히 중요한 역할을 해왔다. <사진/김경희 기자>

[시사위크=권정두 기자] 서울 영등포구청 인근에 위치한 한국비정규노동센터 사무실은 5년 전 처음 찾았을 때와 크게 달라진 것이 없었다. 낡은 사무용 가구에 온갖 책과 서류들이 가득했고, ‘동일노동 동일임금’과 같은 투쟁의 글귀가 적힌 손팻말이 곳곳에 놓여있었다. 마치 영화나 드라마 속에 들어와 있는 느낌이랄까.

사무실은 달라진 것이 없었지만, 그 사이 우리 사회의 ‘비정규직’ 문제는 많은 것이 달라졌다. 문재인 대통령이 취임 후 첫 행보로 비정규직 문제를 다룬 것은 비정규직 문제의 달라진 위상을 상징한다.

과거에 비하면 비정규직 문제가 ‘봄’을 맞은 요즘, 이남신 소장은 여전히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다. 각종 비정규직 투쟁을 지원하는 것은 물론, 최저임금 및 공공부문 비정규직 정규직 전환 문제에 적극 나서고 있고, 비정규직 네트워크 구축 역시 주력하는 사업 중 하나다.

이남신 소장은 “대학 시절 학생운동과 노동운동을 했지만, 사회로 나온 이후엔 성공한 샐러리맨이 되는 것이 목표였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는 결국 비정규직 노동운동가를 대표하는 인물이 됐다. <사진/김경희 기자>

◇ 운명처럼 접어든 비정규직 노동운동가의 길

현장에서 마이크를 들고 비정규직 문제에 대해 목소리를 높일 때면 마치 ‘정의의 투사’ 같은 이미지를 풍기는 이남신 소장이지만, 그는 자신을 한없이 평범하고 소심하기까지 한 사람이라고 말한다.

경남 남해에서 태어난 그는 순천고를 거쳐 서울대 83학번으로 입학했다. 학창시절, 술·담배는커녕 극장에 가본 일조차 손에 꼽을 정도로 학교와 집만 오가는 모범생이었다고 한다. 교사였던 아버지와 성실한 가정주부였던 어머니, 그리고 세 여동생과 함께 온화한 가정에서 많은 관심과 사랑을 받고 자란 아이였다.

그의 인생이 달라지기 시작한 것은 대학에 입학하면서다. 엄혹했던 그 시절, 입학 직후 선배들로부터 광주항쟁 등을 전해들은 그는 학생운동에 투신했다. 또한 인천 주안에서 ‘자취방 야학’ 활동과 위장취업을 하기도 했다.

하지만 자기 자신이 좀처럼 성에 차지 않았다고 한다. “학생운동 할 때 그렇게 많이 잡혔다. 주변 선배들이 선망의 대상이었지만, 소심한 나는 좀처럼 그런 선배들처럼 되지 않더라. 야학과 위장취업 쪽으로 가봤지만 거기서도 어설프긴 마찬가지였다”며 머쓱해했다. 결국 그는 군대를 다녀온 뒤 운동을 접기로 결심했다. 당시를 회상하며 “지금 생각하면 정말 낯 뜨겁지만, 선배에게 ‘더 이상 운동가의 길을 갈 수 없다’고 말했다. 그 시절 내가 주도적으로 한 첫 선택이었다. 첫 선택이 운동을 포기하는 것이었던 셈이다”라고 말했다.

그렇게 위장취업이 아닌 정상 취업전선에 뛰어든 그는 이랜드그룹에 입사하게 됐다. 이때만 해도 이곳이 자신의 인생을 완전히 바꿔놓을 거라 상상도 하지 못했다. 이랜드 영업·마케팅 부서에서 ‘성공한 샐러리맨’을 꿈꾸며 누구보다 열심히 일했다. 학생운동이나 노동운동을 했던 자신의 과거를 반성까지 하면서 말이다. 그렇게 이곳에서 아내를 만나 가정을 꾸렸다.

그러던 어느 날, 회사에 노조가 설립됐다. 종교적 색깔이 짙은 이랜드그룹은 당시 노동 강도가 상당히 심했고, 직원들 사이에서 노조에 대한 반응이 좋았다고 한다. 다만, 이남신 소장은 어쩔 수 없이 노조에 가입만 했을 뿐 적극 활동하진 않았다. 대의원이 되기도 했으나, 활동을 잘 하지 않아 욕을 먹었을 정도다.

하지만 운명이란 자석은 자꾸만 그를 노동운동의 길로 잡아끌었다. 1997년 57일 파업에 끝까지 반대하다 참가한 그는 파업이 끝난 뒤 “아무도 안 하려고해서” 노조 상근 사무국장을 맡게 됐다. 회장 비서실 쪽에서 근무하던 아내는 ‘노조 상근자’ 남편을 둔 부담감으로 퇴사했다. 이때부터 이남신 소장은 노조 일에 ‘올인’하기 시작했고, 그의 인생은 완전히 새로운 길로 접어들었다.

사회적으로도 큰 파장을 일으켰던 2007년 이랜드 투쟁으로 이남신 소장은 직장을 잃었다. 사진은 당시 이남신 소장의 모습. <사진=이남신 소장 제공>

지금의 이남신 소장을 만든 결정적 계기는 2000년 265일 파업과 2007년 510일 파업이다. 이 두 파업은 당시 사회적으로 큰 파장을 일으켰고, 특히 비정규직 문제를 화두로 떠오르게 만들었다. 정규직 노조 간부였던 이남신 소장은 이 같은 비정규직 투쟁을 이끌며 사비까지 털어 넣었고, 구속을 당하기도 했다. 또한 2007년 파업을 마치는 과정에서 다른 간부들과 함께 자진 퇴사하며 결국 회사를 떠나게 됐다. 다른 조합원들의 복직을 위한 희생이었다. 이후 민주노총에서 요직을 거친 그는 한국비정규노동센터로 와 오랜 기간 비정규직 문제를 위해 활동하고 있다.

◇ “내가 바꾸지 않으면, 내 문제는 달라지지 않아”

인터뷰 내내 이남신 소장은 “원치 않았는데”, “어쩔 수 없이”, “아무도 안 하려고 해서”라는 말을 많이 했다. 하지만 그 말에서 오히려 그의 강한 책임감이 느껴졌다. 앞장서서 나서는 것을 좋아하지 않으면서도, 아무도 하지 않으려 할 때 자신을 던지는 결정적인 책임감 말이다. 힘센 척 으스대다가도 결정적인 순간 도망가는 사람이 있는가하면, 평소엔 지극히 평범하고 조용하면서도 결정적인 순간 옳은 말을 할 줄 아는 사람이 있다. 이남신 소장은 전형적인 후자다. 부당한 현실과 책임감 앞에 회피하지 않은 것, 그것이 지금의 그를 만들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힘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 이남신 소장은 ‘사람’이라고 답했다. “평범하고 소박하지만, 더불어 사는 세상을 일상에서 실천하는 사람들이 주변에 많았다. 그들에게 좋은 영향을 받고 의리와 도리를 지킨 것 뿐”이라며 뜻을 함께하다 먼저 세상을 떠난 옛 동지들, 자신을 믿고 따라와 준 비정규직 마트 아주머니들 등 많은 이들을 떠올렸다. “지금도 어떤 선택을 할 때면 옛 동지들을 떠올린다. 그때 그 친구라면 지금의 나에게 어떤 말을, 어떤 평가를 할까 생각하며 초심을 잃지 않으려 한다”는 그다.

이남신 소장은 지금의 삶을 살아올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로 아내를 꼽으면서도, 미안한 마음을 감추지 못했다. <사진/김경희 기자>

그러면서 그는 야학 시절 이야기를 꺼냈다.

“동갑내기인 두 여공이 있었다. 이 친구들은 낮에 힘들게 일하고 와서 녹초가 돼 밤에 공부를 했다. 나중에 좀 친해지고 난 뒤에 이 친구들이 내게 ‘너는 나중에 우리랑 같이 할 수 있어?’라고 묻더라. 명문대에 다니는 네가 여공인 자신들과 끝까지 뜻을 같이 할 수 있겠냐, 너는 어차피 떠날 것 아니냐, 너는 우리와 처지가 다르지 않느냐는 물음이었다. 여태껏 그 친구들에게 노동자의 권리나 노동해방 같은 이야기를 했던 나는 막상 그 질문에 답을 하지 못했다. ‘그럴게’라고 말하기엔 무책임한 것이었고, ‘그럴 수 없다’고 말할 수도 없었다. 지금도 그때 장면이 또렷하게 생각나고, 내 가슴에 팍 박혀있다. 어쩌면 지금까지 살아온 내 삶의 과정이 그때 그 친구들의 물음에 대한 답이 아니었나 생각한다.”

이남신 소장은 자신의 삶을 바꾸고, 더 나아가 세상을 바꾸기 위해 대단한 결기나 이론, 이념 등이 필요한 것은 아니라고 강조한다. 촛불혁명 당시 광장에서 촛불을 든 시민들이 모두 대단한 ‘혁명가’는 아니었듯 말이다.

그는 “일상 속 작은 것부터 개선해나가는 것, 그래서 조금이라도 바꾸고 한 걸음이라도 앞으로 나가는 것, 그게 중요하다. 비상식에 맞선 작은 실천들이 모이면 자신의 삶은 물론 세상도 바꿀 수 있다는 것을 촛불혁명이 보여주지 않았나. 이제는 촛불혁명의 승리를 각자의 일상으로 가지고 와야 한다. 그러기 위해선 자기 품을 내야 한다. 공짜로, 또는 누군가의 시혜로 내 삶이 바뀌는 것을 바라는 건 바람직하지 않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그러면서 ‘당사자의 힘’을 언급했다. “촛불혁명은 주권 당사자인 시민들이 촛불을 들었기에 승리를 거둔 것이다. 미투운동도 마찬가지고, 여러 성과를 낸 노조들도 모두 당사자들이 목소리를 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당사자가 나서지 않고 바뀌는 것은 없다”는 것이다.

이남신 소장은 “우리 국민의 대다수인 노동자들이 자신의 권리를 적극 찾아 나섰으면 좋겠다. 지금의 법과 제도 안에서도 정말로 좋아질 수 있는 것들이 많다”고 말했다. <사진/김경희 기자>

이남신 소장은 또한 ‘사람’을 거듭 강조했다. “학생운동을 시작하게 된 결정적인 계기가 전태일 열사와 광주사태였다. 혈기왕성했던 젊은 시절엔 전태일의 분신과 광주항쟁의 시민군이 마음을 흔들었는데, 지금은 전태일의 풀빵과 광주항쟁의 주먹밥이 더 눈에 들어온다. 우리에게 지금 필요한 것은 분신이나 시민군이 아니라 풀빵과 주먹밥에 담긴 밥을 나누는 마음 아니겠는가”라며 서로 뜻을 모으고 연대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그가 사람들에게 꼭 전하고 싶다고 밝힌 메시지는 노동자 권리의 중요성이다. 그는 “노조, 최소한 노사협의체라도 있으면 정말 많은 것이 달라진다. 노동자는 자신의 권리를 챙길 수 있고, 사용자들도 극단적인 갈등에 이르는 것을 미연에 막을 수 있다. 노조에 붙었던 편견과 오해를 깨고, 의식을 개선하는 것이 시급하다”고 강조했다

끝으로 그는 “노조가 있으면 임금도 올라가고, 더 좋아진다는 건 누구나 안다. 문제는 소위 찍힐까봐 걱정하는 것이다. 괜히 앞장섰다가 피해만 입을까 걱정하고, 그저 중간에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며 “노조에 대한 생각을 바꾸고, 노조 활동에 나설 수 있도록 동기를 제공할 필요가 있다. 개인적으로는 문재인 대통령이 ‘노조해서 노동자의 권리를 찾으라. 그 과정에서 피해를 입는다면 국가가 보호하겠다’고 천명했으면 좋겠다. 그러면 정말 많은 사람들이 노조활동을 하고, 우리 사회가 더 나아지지 않겠나”라고 청와대를 향한 당부도 잊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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