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부분의 영화는 현실을 반영한다. 대중의 인식 변화를 이끌어 내는 영향력을 발휘하기도 한다. 하지만 ‘성(性)인지’적 관점에서 보면 한국 영화 속 현실은 ‘반쪽짜리’일 뿐만 아니라 우리 사회에 만연해 있는 ‘여성 혐오’와 ‘성불평등’을 부추기고 있는 듯하다. 양성평등과 다양성이 존중되는 사회에 대한 열망은 갈수록 높아지는데 한국 영화는 여전히 제자리걸음을 하고 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한국 영화는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야 할까. <편집자 주>

 

2017년 개봉한 한국 상업 영화 흥행 성적 상위 25편 중 일부 포스터. <각 영화 배급사 제공>

[시사위크=이영실 기자] “여성 앙상블은 팔리지 않는다는 게으르고 멍청한 생각을 하는 인간들 때문이다.” (케이트 블란쳇)

할리우드 배우 케이트 블란쳇이 영화 ‘오션스8’ 개봉 후 가진 인터뷰에서 “주연이 전부 여자로 꾸려진 영화가 왜 이제야 나왔다고 생각하냐”는 질문에 내놓은 대답이다. 지난달 13일 국내에서도 개봉한 ‘오션스8’은 ‘오션스’ 시리즈의 스핀오프로 여성 버전 영화다. 다이아몬드를 노리는 여자 도둑들의 이야기를 담았다. 케이트 블란쳇 외에도 산드라 블록, 앤 해서웨이, 사라 폴슨, 헬레나 본햄 카터, 리한나 등 할리우드의 쟁쟁한 여배우들이 대거 출연했다.

케이트 블란쳇의 말처럼 세계 영화의 중심지인 할리우드에서도 여성 캐릭터를 주연으로 내세운 영화는 흔치 않다. 그러나 ‘오션스8’처럼 남자 배우들이 독식해온 영화 속 캐릭터가 여성으로 교체되는 ‘젠더 스와프’ 흐름이 감지되고 있으며 여성 캐릭터를 주연으로 내세운 다수의 영화들이 개봉을 앞두고 있다. 특히 전 세계적으로 신드롬급 인기를 끌고 있는 마블 스튜디오가 첫 여성 히어로를 단독으로 내세운 영화 ‘캡틴 마블’ 개봉을 예고해 뜨거운 관심을 얻고 있다.

여전히 남성 캐릭터가 주를 이루고 있는 영화들이 장악하고 있는 할리우드지만 여성 중심 영화에 대한 지속적인 관심과 끊임없는 시도가 진행 중이라는 점은 고무적이다.

그렇다면 세계 5위 규모(미국영화협회가 발표한 2017 세계 박스오피스 기준)를 자랑하는 국내 영화 시장은 어떨까? ‘여배우 기근’이라는 말을 빼놓고는 설명할 수 없을 정도로 한국 영화에서 여성은 배제되거나 이야기 중심에서 밀려난 모습이다.

2017년 개봉한 한국 상업 영화 흥행 성적 상위 25편(다큐멘터리, 애니메이션 제외) 중 남성 캐릭터 중심 서사를 다룬 영화는 22편에 달했다. 반면 여성 캐릭터를 주인공으로 내세운 작품은 3편에 불과했다. <이영실 기자>

지난해 개봉한 한국 상업영화의 실태를 들여다보면 이 같은 특징이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영화진흥위원회(이하 영진위) 영화관입장권 통합전산망을 기준으로 2017년 개봉한 한국 상업 영화 중에서 흥행 성적 상위 25편을 대상(다큐멘터리, 애니메이션 제외)으로 양성을 균형 있게 다뤘는지 살펴봤다. 남성 쏠림 현상이 확연했다. 25편 중 남성 캐릭터 중심으로 전개되는 영화는 22편에 달했다.

‘택시운전사’, ‘공조’, ‘범죄도시’, ‘군함도’, ‘청년경찰’, ‘더 킹’, ‘꾼’, ‘강철비’, ‘남한산성’, ‘프리즌’, ‘살인자의 기억법’, ‘보안관’, ‘브이아이피’, ‘특별시민’ 등이 남성 중심 서사를 담았다. 이러한 탓에 대부분의 영화들이 남성 원톱 영화이거나 두 명의 남성 캐릭터가 활약하는 영화 또는 세 명 이상의 남성 주인공이 등장하는 멀티 캐스팅의 흐름을 보였다.

반면 엔딩 크레디트에 여배우가 가장 처음 나오는 여성주연 작품은 나문희 주연의 ‘아이 캔 스피크’와 염정아가 활약한 ‘장산범’, 그리고 김옥빈의 원톱 액션물 ‘악녀’ 등 단 세 편에 불과했다.

범위를 넓혀 봐도 마찬가지다. 영진위는 2017년부터 한국 상업영화를 기준으로 성인지 통계 집계를 시작했는데, 지난 2월 발표된 ‘2017년 한국 영화산업 결산’ 보고서에 따르면 지난해 개봉한 상업 영화 중 여성 주연 작품은 애니메이션과 다큐멘터리를 제외한 총 66편 중 17편(25.8%)에 불과했다. 반면 남성주연 작품은 49편으로 74.2%를 차지했다. (총제작비 10억원 이상이거나 최대 스크린수 100개 이상인 작품 기준)

한국 영화엔 왜 여배우가 없을까? 아니 더 정확히 말하면 여배우가 출연할만한 작품과 캐릭터가 없다는 말이 더 정확할 듯싶다. 영화에 최소한의 젠더 개념이 반영돼있는지 가늠하기 위해 고안된 ‘벡델테스트’를 통과한 작품 수가 이를 설명한다.

벡델테스트는 1985년 미국의 여성 만화가 엘리슨 벡델(Alison Bechdel)이 남성 중심 영화가 얼마나 많은지 계량하기 위해 고안한 영화 성 평등 테스트이다. 벡델테스트를 통과하려면 ▲이름을 가진 여자가 두 명 이상 나올 것 ▲이들이 서로 대화할 것 ▲대화 내용에 남자와 관련된 것이 아닌 다른 내용이 있을 것 등의 세 가지 기준을 만족해야 한다.

이 테스트가 성 평등 인지를 평가하는 절대적 기준이라 할 수는 없지만 현재까지 꽤 중요하게 활용되고 있다.

지난해 흥행 성적 상위 25편의 한국 상업 영화들 중에서 벡델테스트를 통과한 작품은 단 5편에 지나지 않았다. ‘군함도’, ‘아이 캔 스피크’, ‘특별시민’, ‘장산범’, ‘악녀’가 세 가지 조건을 모두 충족시켰다. <이영실 기자>

얼핏 생각하면 어렵지 않은 조건으로 보인다. 그러나 실제로 테스트를 진행해본 결과 세 가지 조건을 모두 충족하는 영화를 찾기란 쉽지 않았다. 지난해 흥행 성적 상위 25편의 한국 상업 영화들 중에서 벡델테스트를 통과한 작품은 단 5편에 지나지 않았다. ‘군함도’, ‘아이 캔 스피크’, ‘특별시민’, ‘장산범’, ‘악녀’가 세 가지 조건을 모두 충족시켰다.

여성 캐릭터가 주인공인 영화 ‘아이 캔 스피크’와 ‘장산범’, ‘악녀’ 외에 벡델테스트를 통과한 작품은 ‘군함도’와 ‘특별시민’이다. 그렇다고 해서 이 두 영화가 여성 중심적인 영화라고 말할 수는 없다. 먼저 ‘군함도’에는 이름을 가진 여자가 이강옥(황정민 분)의 딸 이소희(김수안 분)와 에이바(이정현 분)가 등장한다. 두 사람은 나름의 서사가 있고 서로 힘을 합쳐 어려운 상황을 극복하려 하지만 영화에서 중심인물이라고는 할 수 없다. 또 성적으로 불편한 장면이 다수 표현돼 있어 인상을 찌푸리게 한다.

반면 ‘특별시민’은 상대적으로 여성 캐릭터들의 비중이 높고 주체적으로 그려진다. 박경(심은경 분)과 제이(문소리 분), 양진주(라미란 분)와 임민선(류혜영)이 주요 캐릭터로 활약한다. 여기에 조연 변아름(이수경 분)까지 더하면 이름을 가진 여성 캐릭터가 5명이나 등장한다.

세상의 반은 여자인데 영화 속 세상은 전혀 다른 모습이다. 남성들이 중심에 서서 극을 이끌어가는 동안 여성은 뒤로 밀려났다. 누구에게나 다 있는 이름도 여성에게는 박하기만 하다. “머리 자르고 남자 역할을 맡을 생각도 했다”는 배우 김희애의 농담에 웃을 수만은 없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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