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년은 우리나라 역사에서 혁명의 상징이었다. 일제강점기 시절 독립투사의 길을 걸었고, 군사정권에선 민주화운동의 선봉에 섰다. 국난 앞에서 주저하지 않았던 헌신이 오늘을 만들었다. 이제 나라 잃은 설움도, 국가 권력의 횡포도 없다. 국민 승리의 시대다. 하지만 청년들의 투쟁은 끝나지 않았다. 설 곳이 없다. 현실의 높은 장벽에 부딪혔다. 이들은 말한다. “청년이 위기다.” 이들이 묻는다. “청년을 구할 방법은 없는가.” 이들의 답을 찾아가는 것, 그것이 동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의 역할이 아닐까. [편집자주]

 

문재인 대통령의 청년시절 모습. 김정숙 여사와 캠퍼스 커플로 7년 열애 끝에 결혼했다.  결혼을  앞두고 셋방 구하는 게 걱정이었다는 그의 토로는 요즘 청년들의 고민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래픽=이선민 기자>

[시사위크=소미연 기자] 문재인 대통령이 거제도 피란살이 중에 태어난 사실은 익히 알려져 있다. 1950년 흥남철수 때 고향을 떠나온 실향민이 그의 부모다. 가난을 피해갈 수 없었다. 친구들의 도시락 뚜껑을 빌려 학교 급식을 받아먹던 소년은 공부를 꽤 잘했다. 경남고 문과 1등이 바로 문재인 대통령이었다. 대학에서 역사를 공부하고 싶었지만 부모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꿈을 접었다. 재수를 해서 경희대 법대로 진학했다. 그곳에서 유신반대 시위를 했고, 김정숙 여사를 만났다. 결혼을 결심했을 땐 셋방 구하는 게 걱정이었다. 지금의 청년들과 크게 다르지 않은 모습이다.

이언주 바른미래당 의원은 화려한 경력 뒤에 아버지의 부도로 힘든 시절을 겪은 사연이 있다. 첫 직장을 갖자마자 대출을 받았고, 빚을 갚는데 꼬박 4년이 걸렸다. <의원실 제공/그래픽=이선민 기자>

국회의원들도 마찬가지다. 가슴에 금배지를 달았다고 해서 순탄한 삶을 살아온 게 아니다. 저마다 숨은 사연들이 있다. 1997년 IMF여파로 사업이 부도를 맞고 잠적한 아버지, 가정을 지키기 위해 보험외판원이 된 어머니를 보면서 이를 악물고 공부한 사람이 이언주 바른미래당 의원이다. 서울대 출신의 여성 법조인, 국내 대기업 최연소 임원, 3선 관록의 중진을 꺾고 국회에 입성한 경력만으로는 그를 안다고 말할 수 없다.

이언주 의원은 과거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대학생 땐 날라리였다. 아버지 사업이 탄탄해서 어려운 줄 모르다가 대학 졸업 후 상황이 달라졌다”면서 “온실 속에서 자란 엘리트가 아니”라고 말했다. 사법고시에 합격하고도 자리를 잡기까지 4년이 더 필요했다. 로펌에 들어가자마자 은행에서 대출받은 7,000만원을 갚는데 걸린 시간이었다. 그동안 결혼은 꿈도 못 꿨다. 그는 “빚더미에 앉아있는 저를 누가 결혼하려 하겠나. 그래서 저는 젊은 층의 결혼 고민이 이해가 된다”고 덧붙이기도 했다.

강병원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대학시절 학생운동으로 어머니의 건강을 살피지 못한 데 대한 안타까운 마음을 갖고 있다. 그의 정치 인생 이정표가 어머니다. <의원실 제공/그래픽=이선민 기자>

절절한 사모곡을 가슴에 품은 사람도 있다. 바로 강병원 더불어민주당 의원이다. 서른셋에 홀로되신 어머니가 두 아들을 키우기 위해 식모살이부터 튀김집까지 온갖 궂은일을 마다하지 않았다. 그래서 주변 사람들도 서울대에 합격한 그에게 “어머니 생각해서 절대 데모하면 안 된다”고 말했다. 하지만 강병원 의원은 투쟁의 선봉에 섰다. 어머니는 그가 서울대 총학생회장에 당선돼서야 학생운동을 인정했다. 어머니의 당부도 “잡히지 말고 건강 잘 챙기라”고 바뀌었다.

만약 어머니와 함께 할 시간이 많지 않다는 사실을 알았다면 학생운동을 하지 않았을까. 어머니는 강병원 의원이 총학생회장에 당선된 이듬해 췌장암으로 돌아가셨다. 이후 어머니의 손때가 묻은 행운식당은 사라졌지만, 그 시절 어머니가 두 아들을 키우면서 꿈꿨을 행복한 삶이 마음에 남았다. 강병원 의원은 “어머니와 같은 평범한 사람들이 꿈꿨던 행복한 삶을 누릴 수 있도록 노력하자, 그것이 제 정치인생의 이정표”라고 설명했다.

김경진 민주평화당 의원은 천체물리학자가 되고 싶을 만큼 밤하늘을 좋아했다. 검찰 출신임에도 그는 과방위 상임위를 고집하고 있다. <의원실 제공/그래픽=이선민 기자>

“최순실은 검찰 압수수색을 어떻게 알았쓰까(알았을까). 대통령이 알려줬쓰까.(알려줬을까).” 김경진 민주평화당 의원은 최순실 게이트 국정조사 특별위원회 청문회 이후 여론의 관심을 한 몸에 받았다. 우병우 전 청와대 민정수석의 얼굴빛이 변할 정도로 검찰 출신다운 노련한 신문을 보였던 것. 국민들의 답답한 속을 풀어줬던 그는 ‘쓰까요정’이라는 새로운 별명을 얻었다. 별명이 만들어진 계기를 보면 딱 모범생 스타일이다. 하지만 반대다.

김경진 의원은 공부에 흥미가 없었다. 패거리로 몰려다니며 나쁜 짓도 해봤다. 고등학교에 진학할 때도 성적이 커트라인을 간신히 넘겼다. 공부를 본격적으로 시작한 것은 고등학교 2학년 때부터다. 진짜 범생이를 만난 뒤였다. 공부 잘하는 친구에게 자극을 받은 그는 하루에 3~4시간만 자면서 공부에 집중했다. 수학은 배경지식이 없는 탓에 책을 통째로 외웠다. 성적이 뛰었다. 김경진 의원은 천체물리학자가 되고 싶었다.

꿈은 이루지 못했다. 자신은 천문학과 진학을 희망했으나, 아버지의 반대에 부딪혔다. 다른 이유는 없었다. ‘밥 먹고 살기 힘들다’는 것. 김경진 의원은 고려대 법대로 진학했다. 오랜 시간이 지난 지금도 그 시절의 꿈을 간직하고 있다. 국회 상임위 배정에서 과학기술정보방송통신위원회를 줄곧 고집하고 있는 이유다.

윤관석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기자를 꿈꾸며 신방과에 진학했으나 부조리한 사회에 맞서기 위해 학생운동에 이어 노동운동, 시민운동에 앞장섰다. <의원실 제공/그래픽=이선민 기자>

윤관석 더불어민주당 의원의 꿈은 기자였다. 신문방송학과에 진학한 이유였다. 하지만 사회과학에 대한 지적 호기심으로 시작한 공부에서 충격을 받고 꿈을 접었다. 지금까지 알고 있었던 역사와 반대였기 때문이다. 학생운동에 뛰어들었고, 3학년 때는 남영동 치안본부에 잡혀가 한 달 넘게 고문을 받았다. 그는 당시를 “돌아올 수 없는 길을 건넜다”고 표현했다. 대학 졸업 후 노동운동에 투신했다.

미래에 대한 불안이 없지 않았다. 노동단체 운동으로 비정규직을 전전했다. 생계비를 벌기 위해 우유배달을 하던 시절이 있었다. 그 모습을 아버지는 못마땅하게 생각했다. 어머니에게 의절하라고 말할 정도로 부자간의 상처가 컸다. 지금은 아버지에 대한 원망 대신 후회만 남았다. “운동에만 집중하다 불효를 저질렀다”는 생각에 마음이 아팠다. 빚진 마음은 다시 서민과 청년을 위한 정치로 보답하고 싶다는 게 그의 각오다.

박영선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엄격한 아버지 밑에서 모범생으로 자랐다. 하지만 앵커 및 기자 시절 전해지는 이야기에 그의 강단 있는 모습이 그려진다. <박영선 의원 페이스북 및 온라인 커뮤니티/그래픽=이선민 기자>

박영선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학창시절부터 모범생으로 불렸다. 수도여고 방송반의 레전드로 불린 그의 방송국 입사는 당연한 수순으로 보였다. 첫 직장은 KBS 춘천 방송국이었다. 아버지가 집을 나가서 사는 것에 반대해 서울에서 출퇴근을 했다. 왕복 9시간이 걸렸다. 결국 그만두고 MBC에 다시 입사했다. 그곳에서 정계로 나오기 전까지 무려 22년 동안 근무했다. 강단 있는 모습은 지금과 같았다. 박영선 의원은 보도지침이 있던 그 시절, 마감뉴스에서 그날 보도되지 않은 뉴스만 골라서 내보냈다. 경위서를 쓰는 날이 많았다.

정작 박영선 의원이 좌절의 시기로 꼽은 때는 대학시절이다. 아버지가 원하던 대학이 아니라는 이유로 등록금 지원을 끊었다. 무엇보다 민주화운동에 동참하지 못했던 게 죄책감으로 남았다. 그는 “완고한 아버지 때문에 민주화운동을 못했다. 빚을 갚자는 마음으로 정치를 시작했다”고 밝힌 바 있다. 박영선 의원은 내리 4선을 달성했다. 여성 최초로 국회 법제사법위원장과 원내 교섭단체 대표를 역임했다.

심상정 정의당 의원은 교사를 꿈꾸며 대학에 진학했으나 연애가 하고 싶어 참여했던 시위에 인생이 바뀌었다. <심상정 의원 블로그 및 온라인 커뮤니티/그래픽=이선민 기자>

심상정 정의당 의원이 운동권 학생으로 현상수배까지 내려진 일화는 유명하다. 1985년 구로동맹파업을 주도한 혐의였다. 당시 창신동 사무실에서 TV를 보다가 9시 뉴스에 현상수배가 내려진 사실을 확인하고 지붕으로 올라갔다. 지붕을 타고 그곳을 빠져나와 잡히지 않았다. 잠실 아파트 철조망을 넘어 88고속도로에서 차를 얻어 타고 도주한 적도 있었다. 그렇게 9년을 도망 다녔다. 그야말로 운동권의 전설이었다. 본래 그의 꿈은 교사였다.

운동권에 뛰어들게 된 계기는 하나였다. 사랑을 찾고 싶었다. 별명인 ‘심블리(심상정 러블리)’다운 답변이었다. 심상정 의원은 “연애를 해보려고 해도 남학생 뒤를 쫓아다니면 영락없이 운동권 학생이었다. 도대체 어떤 곳이길래 저렇게 사람이 몰리나 궁금해서 들어갔다가 제가 더 센 운동권이 됐다”고 털어놨다. 사실 그는 열정적인 성격이다. 고교 야구를 좋아해 리포터를 자처했고, 가수 조용필이 좋아서 쫓아다닌 시절도 있었다. 서울대 초대 총여학생회장이 바로 심상정 의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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