탐정에게 필요한 것은 관찰력과 추리력뿐만이 아니다. <픽사베이> [사용된 이미지 출처:프리픽(Freepik)]

[시사위크=현우진 기자] 뛰어난 탐정에게 필요한 자질은 무엇일까. 역사상 가장 유명한 탐정인 셜록 홈스가 <네 개의 서명>에서 밝힌 바에 따르면 관찰력과 추리력, 그리고 폭넓은 지식이다. 이 중 마지막 요건인 ‘폭넓은 지식’에는 말 그대로 오만가지 분야에 걸친 잡학다식이 포함되는데, 통계도 예외는 아니다. 독자들에게 보다 익숙한 것은 향기만으로 담배 종류를 구분하고 발자국으로 구두의 브랜드를 알아내는 탐정의 묘기들이지만, 때로는 학문의 영역에 속하는 이론적 지식도 사건을 해결하는데 도움이 될 때가 있기 때문이다.

◇ 알파벳 사용빈도로 푸는 수수께끼

웬만큼 유명한 탐정들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은 암호해독에 도전해야 하는 때가 온다. 순수한 지적 노동의 산물인 암호풀이는 위험한 현장을 누비는 탐문수사와는 또 다른 재미를 선사한다. 추리소설에 등장하는 암호 대부분은 치환암호(알파벳 26개 문자 하나하나를 다른 기호로 나타낸 것)인데, 가장 단순한 암호 형태인 만큼 푸는 방법도 정형화돼있다. 어린애 장난 같은 담벼락 낙서에서 범죄의 냄새를 맡은 셜록 홈스와 악명 높은 해적 선장이 보물을 숨긴 곳을 찾고 싶은 윌리엄 레그런드는 모두 치환암호를 푸는 기술을 숙지하고 있는 인물들이다.

<아시겠지만, E는 영어의 알파벳 중 가장 많이 쓰이는데다 짧은 문장 안에서도 제일 흔히 볼 수 있는 글자예요. 이 첫 번째 암호문에 쓰인 열다섯 개의 기호들 중에 똑같이 생긴 것이 네 개가 있으니, 이것들을 E라고 보는 게 타당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아서 코난 도일, 춤추는 인형 그림의 비밀, 봉명화 옮김, 북하우스

<영어에서 가장 빈번하게 나오는 글자는 E이네. 그 다음은 이런 순서지: A, O, I, D, H, N, R, S, T, U, Y, C, F, G, L, M, W, B, K, P, Q, X, Z. 그런데 E는 눈에 띄게 빈번하므로 E가 들어 있지 않은 문장은, 어떤 길이의 문장이든 거의 볼 수 없네.>
에드거 앨런 포, 황금벌레, 홍성영 옮김, 하늘연못

로버트 레완드 교수가 조사한 알파벳의 사용 빈도 그래프. E가 가장 많이 사용되며 그 다음은 T다. <그래픽=시사위크 이선민 기자>

가장 널리 쓰이는 표음문자인 알파벳과 관련한 통계들은 실생활에서도 유용하게 사용된다. 사무엘 모스가 1836년에 개발한 모스부호가 대표적인 예시다. 그는 출판물들을 뒤져 알파벳 사용빈도에 대한 통계표를 만들었으며, 이를 바탕으로 자주 쓰이는 알파벳일수록 짧게 타이핑할 수 있도록 모스 부호를 고안했다. E는 짧은 부호 하나(·), I는 짧은 부호 둘(··), T는 긴 부호 하나(­-)로 나타내는 식이다.

<황금벌레>에 등장하는 키드 선장의 암호문은 모두 159개 기호로 구성돼있으며 이 중 33개(20.7%)가 ‘8’이다. 알파벳 26자 중 한 쪽짜리 문서의 5분의1을 차지할 문자는 E밖에 없다. 때문에 위그노교도 집안 출신으로 ‘한때는 부유했으나 연이은 불행으로 빈궁한 처지가 된’ 윌리엄 레그런드는 키드 선장이 알파벳 E를 8로 치환했다고 간주할 수 있었다. 다만 레그런드는 알파벳 T의 출현빈도가 열 번째에 불과하다고 말했는데, 앞서 그래프로 나타낸 로버트 레완드의 통계조사와 비교하면 이것이 T를 지나치게 무시한 처사임을 알 수 있다.

◇ 누구냐, 넌? 범인을 찾아내는 인체 통계

제한된 공간과 용의자를 설정해두는 일반적인 추리소설에서는 통계가 활용될 여지가 많지 않다. 통계의 신뢰성을 담보하기 위해선 일정 수준 이상의 표본이 필수적이며, 등장인물이 적을수록 숫자보다는 물질적 증거가 활약할 여지가 많기 때문이다. 다만 불특정다수 속에서 원하는 인물을 골라내야 할 때는 통계가 유용한 도구로 사용될 수 있다. 특히 인체와 관련한 통계는 남다른 눈썰미를 가진 탐정과 잘 어울리는 면모가 있다.

35년 동안 정부기관에서 통계자료를 수집하고 정리하는 일을 했던 파커 파인의 말에 따르면 사람들이 불행한 이유는 몇 가지로 요약될 수 있다. 질병과 권태, 남편 때문에 속을 태우는 아내와 아내 때문에 속을 태우는 남편이 그것이다. ‘행복하십니까? 그렇지 않다면 파커 파인 씨와 상담하십시오.’라는 신문광고를 내고 리치먼드가(街) 17번지의 불행청부사로 활약하는 파인은 행동력 대신 통찰력과 심리학을 애용한다는 점에서 아가사 크리스티의 다른 탐정들과 닮았다.

<“저를 보기 전부터 레이디 에스터가 아니라는 걸 알았다고 하셨죠? 어떻게 아셨나요?”

“통계 덕분이죠.”

“통계요?”

“네. 미셀데버 경과 그 부인은 모두 푸른 눈입니다. 그런데 영사가 레이디 에스터에 대해 말하면서 이글거리는 ‘검은 눈’이라고 하더군요. 그래서 무언가 잘못됐다는 것을 알았지요. 갈색 눈의 부모 밑에서 푸른 눈의 아이가 나오는 경우는 간혹 있지만 그 반대의 경우는 없답니다.”>
파커 파인 사건집, 아가사 크리스티, 김시현 옮김, 황금가지

분자생물학에 따르면 눈동자 색깔은 멜라닌 색소에 영향을 미치는 3쌍의 염색체에 의해 결정된다. 6개 유전자가 모두 우성일 경우 짙은 갈색 눈을 갖게 되며 열성 유전자 세 개가 섞이면 초록색, 6개 유전자가 모두 열성이면 파란색이다. 자녀의 눈동자 색깔은 부모로부터 절반씩 물려받은 유전자에 의해 정해지는데, 부모의 눈이 모두 갈색인 경우 자녀는 75%의 확률로 갈색 눈을 갖게 된다. 푸른색 눈일 확률은? 6.25%(16분의1)로 ‘간혹 있는’ 수준이다. 반면 부모가 모두 푸른색 눈일 경우 자녀의 눈동자 색깔은 99%의 확률로 푸른색이다. 초록색 눈일 가능성이 약 1%며 갈색 눈일 확률은, 파커 파인의 말처럼 전무하다.

<흑과 다의 환상>, <삼월은 붉은 구렁을> 등으로 유명한 일본의 소설가 온다 리쿠. <뉴시스>

온다 리쿠의 대표작 <흑과 다의 환상>은 40대에 접어든 나이가 돼 다시 만난 대학 동창생들의 이야기다. 네 남녀가 외딴 섬으로 떠난 여행에서 옛 기억을 하나 둘 되짚어나간다는 플롯 자체도 매력적이지만, 작품의 미스터리한 분위기를 한층 더 짙게 만드는 것은 서로 다른 성격을 가진 주인공들이 이야기 곳곳에서 내놓는 소소한 수수께끼들이다. 세쓰코가 초등학생 시절 지명수배자의 검거를 도운 에피소드도 그 중 하나다.

<“어느 날, 이유는 잊어버렸지만 엄마랑 역에 갔었거든. 아마 먼 데서 오는 친척을 마중 나갔을 거야. 엄마는 작은어머니랑 이야기하고 있고, 나는 대합실을 돌아다니고 있었어. 그런데 대합실을 둘러보는데 왜 그런지 자꾸 마음에 걸리는 남자가 있는 거야. 눈에 띄지 않고, 느낌이 온화한 남자였거든. 책을 읽으면서 열차를 기다리고 있었어. 물론 모르는 사람이었지만, 왠지 너무너무 신경이 쓰여 죽겠더라고. 그래서 나 혼자 안절부절못했어.”

세쓰코가 입술을 핥았다.

“점점 심장이 두근두근 뛰데. 하지만 나도 왜 그런지 그 이유를 모르겠는 거야. 그래서 도저히 가만히 앉아 있을 수가 없어서 서성거리는데, 역 구내에도 파출소가 있잖아? 파출소에 붙은 그 포스터가 눈에 들어왔어. 그 순간, 저기 앉아 있는 사람이 그 포스터에 나온 사람이구나 하고 번쩍 깨달았어. 서예학원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늘 보던 얼굴이구나 하고.”

(중략)

“처음에는 경찰도 반신반의했어. 젊은 경찰관이었는데, 어리둥절해하더라고. 지명수배 중인 범인이 이런 데 태평하게 앉아 있으리라고는 생각 안하잖아. (중략) 하지만 내가 너무 확고하게 주장하니까 안에 있던 나이 든 경찰관이 나왔어. 머리가 희끗희끗하게 새고 몸집이 다부진 아저씨였는데, 나를 보면서 정중하게 묻더라고. ‘얘야, 어떻게 포스터에 나온 그 사람인 줄 알았지? 저기 앉아 있는 사람은 선글라스도 마스크도 안 했잖아?’하고. 그래서 내가 이렇게 대답했거든. ‘귀가 똑같이 생겼어요.’하고.”>
흑과 다의 환상, 온다 리쿠, 권영주 옮김, 북폴리오

어린아이의 말 속에 범인을 추적할 단서가 숨겨있다는 설정은 온다 리쿠가 자주 사용하는 추리 기법이다. 귀, 특히 귓구멍은 지문이나 홍채처럼 사람마다 서로 다른 모양을 하고 있으며 대부분의 경우 외부에 노출돼있다. 이는 어린 시절의 세쓰코가 지명수배범을 알아볼 수 있었던 이유이자 생체인식 산업계가 귀를 새 연구 대상으로 주목하고 있는 이유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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