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가 사용하는 낱말에 대한 통계는 문학을 보는 새 관점이 될 수 있다. /언스플래쉬
작가가 사용하는 낱말에 대한 통계는 문학을 보는 새 관점이 될 수 있다.

[시사위크=현우진 기자]

그렇다고 툭 집안의 벨라돈나가 골목쟁이네 붕고 부인이 된 다음에 모험을 떠났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J.R.R.톨킨, 호빗, 이미애 옮김, 씨앗을 뿌리는 사람

더할 나위 없이 평범해 보이는 이 문장은 톨킨이 <호빗>에서 1,900여개의 ‘he'를 사용하는 동안 단 한 번 'she'를 쓴 사례다. 물론 사람들이 <호빗>을 펼쳐 놓고 책장을 넘기다가 ‘그’와 ‘그녀’가 등장할 때마다 동그라미를 쳐 가며 셈한 것은 아니다. 컴퓨터의 발달은 긴 텍스트에서 특정 단어나 표현을 찾아내는 기술도 발달시켰으며, 이로 인해 문학을 수학적으로 분석하려는 시도도 활기를 띠고 있다. 명작으로 인정받은 글과 그렇지 않은 글의 차이는 무엇인지, 한 작가의 여러 소설에서 발견되는 공통점은 없는지, 출생지나 성별에 따라 문장의 스타일이 달라지지는 않는지 등이 통계적 분석법이 해답을 줄 수 있는 분야다.

◇ 부사를 대하는 두 가지 방법

많은 사람들이 ‘짧은 문장이 좋은 문장이다’는 격언에 동의한다. 문장의 본래 의미를 잃지 않으면서 길이를 줄이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작품성과 상업성을 인정받은 다수의 작가들은 꾸밈말, 즉 부사를 덜 쓰라고 충고한다. 1993년에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토니 모리슨은 “‘그녀가 부드럽게 말했다’는 문장은 그다지 부드럽지 않다”는 말을 남겼으며, <캐리>, <샤이닝> 등을 저술해 미국에서 가장 잘 팔리는 공포소설 작가가 된 스티븐 킹은 한층 어조를 높여 “지옥으로 가는 도로는 부사로 포장돼있다”고까지 말하기도 했다.

모리슨과 킹의 부사 혐오는 스포츠분석가이자 데이터저널리즘 기자인 벤 블랫이 수천 권의 소설을 뒤져 집계(물론 텍스트본과 프로그램을 이용해서)한 통계자료들에 의해 뒷받침된다. 블랫이 부사의 사용빈도와 ‘굿리드닷컴(아마존의 도서 리뷰 사이트)’ 평점의 상관관계를 분석한 결과에 따르면, 부사가 적게 사용된 소설들은 8편 중 5편 꼴로 높은 점수를 받은 반면 부사가 많이 사용된 소설들에서는 그 비율이 8편 중 약 3편으로 떨어졌다. 아마추어 작가들이 온라인 플랫폼에 게재하는 2차 창작물에서는 문학상 수상작과 베스트셀러보다 훨씬 많은 부사가 사용되는 경향이 나타났다.

작가별·작품 특징별 부사 사용 빈도. /그래프=시사위크 이선민 기자.
작가별·작품 특징별 부사 사용 빈도. /그래프=시사위크 이선민 기자. [사용된 이미지 출처:프리픽(Freepik)]

보다 구체적으로는 다음과 같은 예시가 있다.

▲스콧 피츠제럴드가 부사를 가장 적게 사용한 작품은 그의 소설 중 가장 유명한 <위대한 개츠비>며, 두 번째로 부사를 적게 사용한 작품은 두 번째로 큰 성공을 거둔 <밤은 부드러워>다.
▲찰스 디킨스의 대표작 <두 도시 이야기>와 <위대한 유산>은 그의 소설 15편 중 가장 부사가 적게 활용된 두 작품이다.
▲존 업다이크는 자신이 집필한 소설 26편 중 가장 부사를 적게 쓴 ‘토끼 4부작’으로 퓰리처상을 두 번 수상했다.

물론 예외는 있다. <해리 포터> 시리즈로 영국 200대 부자 리스트에 이름을 올린 J.K.롤링은 전 세계 모든 작가들을 통틀어 가장 부사를 많이 쓰는 축에 속한다.

“너희들은 호그와트를 졸업한 후에 뭘 하고 싶은지 정했니?”
해리가 두 친구에게 물었다. 이제 그들은 대연회장을 떠나서 마법의 역사 수업이 있는 교실로 향하고 있었다.

“아직. 글쎄…… 단 한 가지……” 론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게 뭔데? 어서 말해봐.” 해리가 론을 재촉했다.

“그냥. 오러가 되면 멋질 것 같아서.” 론이 별다른 생각 없이 즉흥적으로 대답했다.

“맞아. 멋질 거야.” 해리가 열렬히 맞장구를 쳤다.

(중략)

“물론 그렇기는 하지. 하지만 그것만이 의미 있는 일은 아니야.”
헤르미온느가 진지하게 대답했다. “그러니까 S.P.E.W.를 계속하는 것도 좋을 것 같고…….”

그 말을 듣자, 해리와 론은 은근슬쩍 시선을 딴 데로 돌렸다.
『J.K.롤링, 해리 포터와 불사조 기사단, 최인자 옮김, 문학수첩』

번역 과정에서 생략된 단어까지 포함하면, 롤링은 A4용지의 절반도 채 되지 않는 이 짧은 대화문에서만 모두 6개(shortly, slowly, slightly, fervently, thoughtfully, carefully)의 부사를 사용하는 묘기를 선보인다. 스티븐 킹이 그녀를 가리켜 “싫어하는 부사가 단 하나도 없는 사람”이라고 말한 이유를 알법하다.

◇ 단어로 보는 작가: 예의 바른 오스틴과 연보랏빛 나보코프

제인 오스틴의 소설에는 늘 통찰력과 재치를 겸비한 중·상류층 여성과 부유하고 쾌활한 상류층 남성이 등장한다. 18세기 영국사회를 무대로 한 그녀의 소설들에서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주제들(타인에 대한 이해와 배려, 거만함에 대한 비판 등)은 대부분 ‘착한 삶’과 관련돼있다. 이는 벤 블랫식 문학통계분석으로도 확인할 수 있는데, 오스틴의 대표작 <오만과 편견>에는 정중함·공손함을 뜻하는 두 단어 ‘polite’와 ‘civility’가 각각 25번과 42번 사용되며 ‘예절(manner)’은 무려 143번 등장한다.

담자색을 뜻하는 'mauve'는 나보코프가 가장 좋아하는 단어 중 하나다. /언스플래쉬
담자색을 뜻하는 'mauve'는 나보코프가 가장 좋아하는 단어 중 하나다.

제인 오스틴의 정반대편에 있는 작가를 뽑아보라면 블라디미르 나보코프의 이름이 나올 법하다. “나는 교훈적인 소설은 읽지도 않고 쓰지도 않는다”는 나보코프 본인의 말처럼 그가 만든 인물들은 대부분 자신의 욕구에 충실한 사람들인데, 그의 소설에서 도덕성의 빈자리를 채우고 있는 것은 다양한 색깔들이다. 알파벳이나 숫자에서 색깔을 연상하는 능력을 가진 나보코프는 색채를 통한 묘사를 자주 활용했다.

담자색이나 연보라색, 때로는 그냥 자주색으로 번역되는 ‘mauve’는 나보코프의 대표작 <롤리타>에서 모두 7번 등장한다. 횟수 자체는 많은 편이 아니지만 일반적으로 자주 쓰이는 단어가 아니다 보니 다른 작가들의 소설보다는 확연히 많이 활용된 사례에 속한다. 벤 블랫의 조사에 따르면 나보코프의 책에서 등장하는 모든 단어 대비 ‘mauve'의 출현빈도는 미국 브리검영대학의 <문어체 영어 표본> 속 예문들보다 44배 많다.

아무튼 길 건너편, 즉 우리 집 정면에 잡초가 무성한 공터가 있었는데,
그곳에는 각양각색의 관목이 자라고 벽돌 한 무더기와 널빤지 몇 장이 나뒹굴고
가을철 길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초라한 담자색이나 노란색 꽃들이 여기저기 물거품처럼 피어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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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쨌든 내가 아는 것은 그때 나는 그녀가 내 곁을 영영 떠나버렸다고 확신했다는 점뿐이다.
마을을 반쯤 둘러싼 무심한 연보랏빛 산맥을 바라보자니
무수히 많은 롤리타가 허겁지겁 산을 오르며 헐떡거리고 깔깔거리고 또 헐떡거리다가
서서히 안개 속으로 사라져가는 장면이 눈에 선했다.

교차로 너머 저 멀리 보이는 가파른 산비탈에 하얀 바위로 만든 거대한 W자는 바로 고뇌(woe)의 첫 글자인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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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담자색 꽃이 만발한 아몬드나무. 점묘화 같은 담자색 꽃가지에 날아가 걸린 초현실주의적인 팔 하나.
『블라디미르 나보코프, 롤리타, 김진준 옮김, 문학동네』

한편 나보코프의 담자색 사랑을 가장 잘 보여주는 문장은, 한국어 번역본에서는 의미를 쉽게 알아보기 어렵다.

이윽고 나는 (비유적으로 말하자면) 술잔을 던져 깨뜨리고 과감하게
(왜냐하면 그때쯤에는 이런 환상에 취해버린 나머지 나 자신의 소심한 성격을 과소평가했으므로)
언젠가는 큰 헤이즈를 윽박질러-아니, 이건 과격한 표현이고-
살살 찔러 작은 헤이즈와 놀아나겠다는 상상까지 해보았다.

나보코프가 ‘윽박지르다(blackmail)’의 반대말로 사용한 ‘살살 찌르다(mauvemail)’는 본래 영어에 없는 단어다. 유럽에서 고등교육을 받은 지식인이며, 때때로 느끼는 폭력적인 충동을 억누르는데 익숙한 험버트 험버트는 협박이나 거친 어휘와는 거리가 있는 인물이다. 담자색의 초라하고 무심한 이미지는 관용적으로 사용되는 검은색보다 그의 성격을 더 잘 드러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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