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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이 사랑한 통계⑤] 그들은 왜 통계를 싫어하나
2018. 10. 08 by 현우진 기자 hwjin0216@naver.com
찰스 디킨스는 '어려운 시절'에서 주인공을 괴롭히는 깐깐한 교육자를 통계학 신봉자로 설정했다. 사진은 디킨스를 연기한 영국 배우 사이번 칼로. /뉴시스·AP
찰스 디킨스는 '어려운 시절'에서 주인공을 괴롭히는 깐깐한 교육자를 통계학 신봉자로 설정했다. 사진은 디킨스를 연기한 영국 배우 사이번 칼로. /뉴시스·AP

[시사위크=현우진 기자] <문학이 사랑한 통계>의 제 5편에 한해선 제목을 <문학이 증오한 통계>로 바꿔보는 것이 어울릴 듯하다. 이번 편의 주제는 통계에 대한 거부감을 문학으로 승화한 작가들이기 때문이다. 과녁은 같지만, 이들이 펜을 든 이유는 제각기 다양하다. 통계가 쓸모없다고 생각한 사람도, 통계를 들먹이며 자신의 인생에 간섭하는 사람들을 만난 이도 있으며 더 나아가 통계가 인간의 존엄성을 모독한다고 생각한 작가도 있다.

◇ 찰스 디킨스가 만든 ‘어두운 통계학적 동굴’의 괴물

찰스 디킨스는 아마도 모든 명작소설 작가들 가운데 가장 통계를 싫어한 인물일 텐데, 이유는 그가 통계를 인간의 자유의지와 반대되는 개념으로 여겼기 때문이다. 통계에 대한 디킨스의 혐오는 그의 소설 <어려운 시절>에 고스란히 담겨있다. 사립학교를 운영하는 토머스 그래드그라인드는 공리주의와 합리주의를 바탕으로 학생들에게 획일적인 교육을 강요하는 인물로 그려지는데, 그를 대변하는 키워드 중 하나가 통계다. 그래드그라인드의 방에 대한 묘사는 그의 성격을 가장 잘 보여주는 문단이다.
 

무엇을 증명하는 것이건(사람들이 원하는 것은 보통 무엇이든 증명하는데) 그것들은 신병의 도착으로 끊임없이 강해지는 군대 같았다. 마술에 걸린 바로 이 방에서 가장 복잡한 사회문제가 계산되고 정확한 합계가 나오며 최종적으로 해결되었다-실제로 관련된 사람들이 이 장면을 볼 수 있기만 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마치 천체관측소가 창문 하나 없이도 이루어질 수 있다는 듯이, 그리고 그 안의 천문학자는 별이 총총한 우주를 펜과 잉크와 종이만으로 배열할 수 있다는 듯이, 그래드그라인드 씨는 자신의 관측소 안에서(이런 관측소는 실제로 많이 있다) 자기 주변에 들끓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눈길 한번 던질 필요 없이 그들의 운명을 석판 위에서 결정짓고, 작고 더러운 스펀지 조각 하나로 그들의 모든 눈물을 닦아낼 수 있었다.
『찰스 디킨스, 어려운 시절, 장남수 옮김, 창비』

<어려운 시절>에는 ‘치명적인 통계학적 시계’라는 표현이 여러 번 등장한다. 그래드그라인드의 방에 있는 거대한 괘종시계는 근대화라는 미명 아래 더 경제학적인(효율적인) 삶을 살도록 강요하던 시대상을 반영한다. 그 도구로 가장 자주 사용됐던 것은 바로 통계학이다.
 

그래드그라인드 관측소에 있는 치명적인 통계학적 시계는 일초 일초가 생겨날 때마다 소리를 냈다가, 늘 그러했듯 그 시간을 묻어버렸다.

디킨스가 활동했던 19세기는 통계학이 사회과학으로서 위상을 다져나가던 시기다. 여기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것은 벨기에의 천문학자이자 사회학자인 랑베르 아돌프 자크 케틀레다. 케틀레는 통계를 통해 ‘사회적 법칙’을 찾을 수 있고, 이것을 바탕으로 인간의 행동을 예측할 수 있다고 생각했던 인물이다. 그는 통계가 정책을 마련하는 토대로 활용되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지만 동시에 결정론적 세계관에 빠져 인간(특히 사회하층민)의 자유의지를 무시한다는 비판도 받았다. <어려운 시절>의 후반부에서 그래드그라인드의 아들이 은행털이범으로 전락한 것은 케틀레식 통계결정론에 대한 디킨스의 복수라고 봐도 무방하다.

“벼락을 맞아도 이보다는 덜 놀라겠다!” 아버지가 말했다.
“까닭을 모르겠네요.” 자식이 투덜거렸다. “책임 있는 위치에 고용되는 사람은 많고, 그 많은 사람들 중에서 부정직한 사람도 그만큼 많게 마련이잖아요. 그것이 관례라고 아버지가 말씀하시는 걸 수백 번은 들었습니다. 관례를 제가 어떻게 피하겠어요? 그런 말로 다른 사람들을 위로하셨잖아요, 아버지. 그렇게 스스로를 위로하세요!”

범죄가 사회적 환경의 산물이며 사람은 그것을 실행에 옮기는 도구일 뿐이라고 주장한 케틀레는 인간 스스로의 도덕적 성장을 강조한 디킨스의 표적이 될 만하다. 케틀레의 통계학을 이해하는데 가장 중요한 요소는 ‘평균인’ 개념인데, 이것은 평균값, 즉 통계치가 해당 집단을 객관적으로 묘사하는 숫자로 간주될 수 있다는 논리다. 과학철학자 이언 해킹에 따르면 케틀레는 이 아이디어를 군인들의 키와 가슴둘레를 측정한 한 논문에서 얻었다.

◇ 일반화를 거부하다

'투고자들에게 띄우는 답변'에서 도덕통계학자들을 신랄하게 비판했던 마크 트웨인.
단편소설 '투고자들에게 띄우는 답변'에서 도덕통계학자들을 신랄하게 비판했던 마크 트웨인.

인류의 평균 손가락 개수는 몇 개일까? 모르긴 해도 70억 인구를 대상으로 조사한다면 결과치의 첫 자리는 아마 9일 것이다. 불의의 사고로, 전쟁 등의 폭력으로, 또는 선천적으로 손가락 몇 개가 없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다. 젠체하는 통계학자라면 산술평균 대신 최빈값을 써야 한다고 지적할지도 모르지만, 요지는 너무 많은 것을 다룬 통계는 특정 현상을 파악하는데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물론 외계의 다른 종족이 어떤 크기 어떤 형태로 나타날지는 며느리도 모른다. 하지만 행여, 만의 하나, 최근 집계된 중앙 은하 인구 조사 보고서의 결과가 정확할 거라고 믿고 굳이 그걸 가지고 통계적인 평균을 내고 싶다면 아마 이 우주선에는 대충 여섯 명의 우주인이 타고 있을 거라 추산할 수 있을 테고, 그 추정은 얼추 맞을 것이다. 아마 벌써 그 정도는 짐작하셨으리라 믿는다. 대부분의 통계 조사가 그렇듯, 중앙 은하 인구 조사 보고서 역시 어마어마한 돈을 처들였음에도 불구하고 결과적으로 나온 얘기들은 이미 세상 사람들이 다 알고 있는 것이었다. 은하계의 모든 존재가 2.4개의 다리를 가지고 있고 하이에나를 소유하고 있다는 사실 정도가 좀 새로웠을까. 하지만 이거야 누가 봐도 명백한 사실이 아니었으므로, 결국 조사 결과는 모조리 폐기 처분되었다.
『더글러스 애덤스, 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 김선형‧권진아 옮김, 책세상』

<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 중 ‘안녕히, 그리고 물고기는 고마웠어요’ 편에 등장하는 이 구절은 쓸모없는 통계를 양산하는 정부에 대한 조롱임과 동시에 케틀레의 ‘평균인’ 개념에 대한 비판이기도 하다. 물론 <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 자체가 워낙 많은 주제에 대한 풍자를 담고 있다는 점을 고려하면 더글러스 애덤스가 통계 자체에 대해 특별히 적의를 품고 있다고 해석하기는 힘들다.

통계를 통한 일반화에 염증을 느낀 인물들 중엔 마크 트웨인도 있다. 위트와 풍자로 유명한 작가의 이름을 거론할 때 항상 등장하는 이름인 마크 트웨인은 그의 단편 <투고자들에게 띄우는 답변>에서 도덕통계학(이 역시 케틀레에게 기원을 둔다)을 신랄하게 비판한다.
 

‘덕망 높은 통계학자’ 씨에게- 나는 당신의 통계자료 따윈 전혀 관심 없습니다. 오죽하면 당신이 보낸 종이뭉치를 몽땅 집어 담뱃불을 붙였겠습니까. 난 당신 같은 인간들이 정말 싫습니다. 당신들은 허구한 날 어떤 인간의 몸이 얼마나 망가졌으며, 그 인간의 뇌가 얼마나 불구가 되었으며, 그가 흡연이라는 치명적인 습관에 탐닉하느라, 혹은 더도 덜도 없이 똑같이 치명적인 커피 중독에 빠져서, 간간히는 당구 시합에, 저녁식사 시간에 포도주 한 잔을 먹느라, 그밖에 기타 등등에 빠져 보낸 92년이라는 세월 동안 몇 달러 몇 센트를 아깝게 허비했는지 등을 계산하고 앉았지요. (중략) 당신들은 한 가지 문제에 대해 오로지 한쪽 면밖에 볼 줄 모르는 사람들입니다. (중략) 잘라 말해서, 사람들에게 끝도 없고 넌더리만 나는 ‘도덕적인 통계자료’를 들이밀면서 더도 덜도 말고 당신들처럼 ‘고약’하고 불쾌한 인간이 되라고 허구한 날 현혹하려 들지 말고, 어디 먼 데로 가서 생을 마감하는 편이 좋지 않을까요?

『마크 트웨인, 투고자들에게 띄우는 답변, 김소연 옮김, 예문』

마크 트웨인은 또한 통계에 대한 가장 유명한 경구인 ‘거짓말과 새빨간 거짓말, 그리고 통계’라는 말을 소개한 것으로 잘 알려져 있다. 비록 실제로 이 말을 한 것이 마크 트웨인이 주장한 것처럼 벤자민 디즈데일리인지 확인할 길은 없지만, 적어도 그가 이 말을 처음 인용했다는 사실은 분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