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심원들이 숙의를 위해 자리를 비운 미국의 법정을 그린 삽화. /뉴시스·AP
배심원들이 숙의를 위해 자리를 비운 미국의 법정을 그린 삽화. /뉴시스·AP

[시사위크=현우진 기자] 어떤 측면에서, 재판은 확률이다. 피고인이 정말 죄를 지었는지 아닌지는 아무도 알 수 없기 때문이다. 판결 기준을 결정하는 인사들은 진짜 범죄자에게 유죄를 구형하는 빈도를 높일 것인지, 아니면 합당한 처벌을 내릴 기회를 포기하고서라도 억울한 판결이 나오지 않도록 하는데 중점을 둘 것인지를 두고 고민해야 한다.

한 명 혹은 두세 명의 판사들이 관여하는 한국의 재판에 비해 일반인이 참여하는 해외 배심원제도는 확률 싸움의 성격이 더 짙다. 재판에 관여하는 사람의 수가 훨씬 많으며(일반적으로 12명) 이들은 전문적인 법률 지식이 없다. 미국이 만장일치 평결제도를 고수하고 있는 반면 유럽 국가들은 대부분 다수결제도를 선호하는데, ‘어떤 배심원 평결제도가 더 나은 결과를 이끌어낼 수 있는가’는 통계학의 오랜 논쟁 주제 중 하나다.

◇ 다수결의 확률 속에 숨겨진 배심원 신뢰도 문제

순수하게 통계학적인 관점으로 접근한다면 만장일치 평결은 지극히 비효율적인 제도다. 다수결에 비해 긴 논의 과정이 필요하지만 정작 잘못된 결론을 낼 확률은 큰 차이가 나지 않는다. 또한 소수파가 다수파에게 동조하는 성향을 보일 수 있다는 사실은 자유로운 토론을 방해하는 요소다. ‘콩도르세의 역설’로 유명한 프랑스의 18세기 수학자 니콜라 콩도르세는 만장일치 평결 속에는 소수파 배심원의 기권이 내포돼있다고 생각했다.

[5번 배심원이 8번 배심원을 또렷이 응시하는 모습을 클로즈 숏으로 잡는다. 5번 배심원은 복잡한 표정으로 그의 말을 경청한다.]
8번 배심원: 투표를 다시 할 것을 요청합니다. 여러분 11명이 무기명으로 투표하는 겁니다. 나는 기권하겠습니다. 여전히 전원이 유죄라고 생각하신다면, 더 이상 반대하지 않겠습니다.
7번 배심원: 좋아요, 해 봅시다.
배심원장: 공정해 보이네요. 모두 동의하십니까?
[모두 고개를 끄덕인다. 8번 배심원은 창가로 걸어가 잠시 바깥을 내다본다.]
『레지날드 로즈, 12인의 성난 사람들』

TV 단막극과 희곡, 그리고 영화로 만들어진 <12인의 성난 사람들> 속 8번 배심원은 공정하고 정의로운 배심원의 상징과도 같은 인물이다. 모든 사람이 피고인 소년의 유죄를 확신하는 상황에서 그는 명확한 논리와 증거를 바탕으로 무죄 가능성을 주장한다. 그러나 그런 8번 배심원조차도 두 번째 투표에서 9번 배심원이 동조하지 않았다면 다수의 뜻을 따라 유죄 평결을 낼 각오를 하고 있었다. 즉 무늬만 만장일치일 뿐, 실상은 12명 중 11명의 찬성을 요구하는 다수결 제도와 마찬가지인 상황인 것이다.

의사결정의 효율성과 평결의 정확성을 모두 높이기 위해 과연 몇 명의 찬성표가 적절한가에 대해선 연구자마다 의견이 엇갈린다. 콩도르세는 10대2의 다수결 투표를, 그와 동시대를 살았던 라플라스는 배심원단 9명의 만장일치를 주장했다. 라플라스는 0.1%의 오심 확률이 이상적이라고 생각했는데, 그 자신의 계산법에 따르면 배심원들이 9대0으로 유죄를 선고했을 때 피고인이 무죄일 확률은 1024분의1로 이와 매우 유사하다.

라플라스의 계산에는 몇 가지 가정이 있다. ▲피고인이 유죄일 확률은 2분의 1이며 ▲배심원의 선험적 신뢰도는 2분의1과 1 사이에서 균일분포를 따른다. 또한 ▲배심원 개개인의 신뢰도는 분석할 수 없지만, 평균적인 신뢰도를 가정하는 것은 가능하다. 라플라스가 배심원의 선험적 신뢰도를 0과 1 사이가 아닌 2분의1과 1 사이로 가정한 이유는 간단하다. 배심원의 신뢰도가 2분의1보다 낮다면, 차라리 동전을 던져 유죄와 무죄를 결정하는 것이 정확도가 높기 때문에 배심원을 쓸 이유가 없다. 배심원제도가 운영된다는 사실 자체가 이들이 적어도 50% 이상의 통찰력은 보여준다는 증거인 셈이다.

레프 톨스토이.
레프 톨스토이.

물론 이 가정을 뒷받침하는 근거는 없다. 논리적 추론보다 인간의 실수에 관심이 많은 소설가들은 배심원들의 무관심과 무지가 그릇된 평결을 이끌어낼 가능성을 배제하지 않았다. 톨스토이의 소설 <부활>에서 마슬로바가 시베리아로 유형을 간 배경에는 배심원단의 안이한 태도가 있었다.

라블레가 쓴 글 중에 이런 것이 있다. 어느 법률가가 재판을 청탁받고는 온갖 법률 조문의 예를 지적하면서 무의미하기만 한 라틴어 법률서를 이십여 페이지나 낭독한 다음에 소송자들에게 주사위를 던지게 해서 짝수가 나오면 원고가 이기고 홀수가 나오면 피고가 옳다고 했다.
이 경우도 그와 조금도 다르지 않았다. 이렇게 결정이 나버린 것은 모두의 의견이 일치했기 때문이 아니라, 첫째는 재판장이 언제나 말하던 것, 즉 배심원들이 질문에 대답할 때 ‘유죄이나 단 살해할 의도는 없었음’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는 것을 잊었기 때문이고, 둘째는 대령이 처남의 아내 이야기를 너무 장황하게 지껄였기 때문이고, 셋째는 네흘류도프가 너무 흥분해 있었기 때문에 살해할 의도가 없었다는 단서가 빠진 것에 미처 생각이 미치지 못했고 절취할 의도가 없었다는 단서만으로도 기소가 기각될 수 있는 줄로 알았기 때문이다. 넷째는 배심원장이 질문 내용과 답신서를 다시 낭독하고 있을 때 표트르 게라시모비치가 자리를 비운 채 밖에 나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가장 큰 이유는 모두들 피곤해져서 조속히 여기에서 빠져나가길 원했고, 그래서 빨리 끝낼 수 있을 듯한 의견에 찬성했기 때문이었다.
『레프 톨스토이, 부활, 박형규 옮김, 민음사』

◇ 만장일치제도와 감상적 평결, 그리고 매수

유죄를 원하는 검사든 무죄를 원하는 피고인이든, 배심원단 전원의 동의가 필요한 만장일치제도 하에선 원하는 평결을 이끌어내기 위한 전략이 바뀔 수밖에 없다. 우선 피고인의 무죄를 원하는 입장에서는 열두 명의 배심원 중 한 명만 설득하면 유죄 평결을 막을 수 있다.

그녀의 말도 안 되는 증언은 듣기조차 민망할 정도였다. 하지만 배심원단에는 세 명의 어머니가 있었다. 미스 칼리, 바바라 볼드윈 부인, 그리고 맥신 루트. 루시앙은 그들 중 한 명을 타깃으로 삼고 있었다. 한 명의 현혹만으로도 충분했다.
예상했던 대로 패드깃 부인은 금세 눈물을 터뜨렸다. 그녀는 아들이 그런 끔찍한 범죄를 저질렀을 리가 없다고 했고, 만약 배심원단이 그렇게 믿는다면 자신도 묵묵히 받아들이겠다고 했다. 하지만 왜 어린 아이를 죽여야 하는지 의문을 제기했다. 자신의 아들을 죽이면 세상이 무슨 이득을 얻게 되겠느냐고 물었다. (중략) 과장된 연극으로 시작되어 애절한 청원으로 끝이 나 버린 그녀의 증언에 배심원들 대부분이 고개를 떨구고 바닥을 뚫어져라 내려다보았다.
『존 그리샴, 최후의 배심원, 최필원 옮김, 북@북스』

반대로 누군가가 배심원을 매수하거나 협박해 유리한 평결을 이끌어내려 할 경우, 만장일치제도 하에선 배심원 전원을 포섭해야 한다. 이것은 다수결에 비해 만장일치가 가지는 장점이다. 물론 다수결제도의 옹호론자들은 12명이든 10명이든 매수하기 어려운 것은 매한가지라고 주장할 것이다.

“방금 본 게 뭐지?” 나는 묻는다.
“배심원 부당 교섭의 증거지.”
“어쩌면 우연한 만남일지도 모르잖아?”
“배심원에게 접근하는 건 위법이야.”
“그 사람 말고도 열한 명이나 있잖아.”
“그 사람은 배심장이야!”
“그래, 하지만 과반수 평결을 얻으려면 배심원 열 명이 필요해.”
“배심 불일치는? 세 명만 반대하면 되잖아.”
“세 명을 확보했을지도 모르겠네.”
“하지만 그러면 재심으로 갈 테고, 다른 배심원으로 처음부터 다시 하게 되겠지. 그게 노벅한테 무슨 도움이 되겠어.”
『마이클 로보텀, 내 것이었던 소녀, 김지선 옮김, 북로드』

범죄소설작가 마이클 로보텀의 고향인 오스트레일리아와 그가 작가로서 활동했던 잉글랜드는 모두 10대2 다수결제도를 받아들이고 있다. 따라서 피고인의 입장에서는 배심원 10명을 확보해 자신에게 유리한 평결을 내거나, 못해도 3명을 확보해 불리한 평결이 도출되는 것을 막으려 시도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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