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상미 감독의 첫 장편영화 ‘폴란드로 간 아이들’가 베일을 벗었다. /커넥트픽쳐스 제공
추상미 감독의 첫 장편영화 ‘폴란드로 간 아이들’가 베일을 벗었다. /커넥트픽쳐스 제공

[시사위크=이영실 기자] “기차역에서 아이들을 처음 만났을 때, 생전 처음 보는 까만 머리, 까만 눈의 동양 아이들이었습니다. 우리는 그 아이들이 누가 누구인지도 분간할 수 없었죠. 그러나 우리가 확신할 수 있었던 건, 그 아이들은 우리의 유년시절의 일부였다는 것이었습니다. 아이들에게는 선생님이 아닌 엄마, 아빠가 필요하다는 걸 직감적으로 알았죠.” - 프와코비체 양육원 원장 유제프 보로비에츠 인터뷰 중

1951년, 한국전쟁고아 1,500명이 비밀리에 폴란드로 보내졌다. 폴란드 선생님들은 말도 통하지 않는 아이들의 상처를 사랑으로 품었고, 아이들도 선생님을 ‘마마’, ‘파파’라 부르며 새로운 가족으로 받아들였다. 그러나 8년 후, 아이들은 갑작스러운 북한 송환 명령을 받고 폴란드를 떠나게 된다. 반세기가 넘는 시간이 흘렀고 아이들의 생사조차 알 수 없지만, 폴란드 선생님들은 지금까지도 아이들을 그리워하며 눈물을 흘리고 있다.

‘폴란드로 간 아이들’은 1951년 폴란드로 보내진 1,500명의 한국전쟁고아와 폴란드 선생님들의 비밀 실화, 그 위대한 사랑을 찾아 남과 북 두 여자가 함께 떠나는 치유와 회복의 여정을 담은 다큐멘터리 영화다. 배우이자 감독 추상미의 첫 장편 영화이자 그가 준비 중인 극영화 ‘그루터기들’의 준비 과정을 담은 프리뷰 작품이기도 하다.

‘폴란드로 간 아이들’은 우리가 알지 못했던 한국전쟁고아들의 8년간의 발자취를 따라가며 전쟁이 가져다준 비극과 상처를 비춘다. 나이에 비해 작고 마른 몸, 머리에는 이가 득실하고 폐에는 기생충이 가득하다. 육체적 고통뿐 아니라 아이들은 불안과 공포 등 심리적 고통을 호소한다. 깨끗한 침대 위 잠자리가 마련돼 있는데도 침대 밑으로 들어가 벌벌 떨었다는 아이들. 추상미 감독은 당시 아이들이 처한 상황과 그들이 느꼈을 공포를 담담하게 전하는데, 자극적인 묘사나 극적인 장치 없이도 가슴을 치게 만든다.

아이들의 닫힌 마음을 연 이들은 파란 눈의 이방인들이었다. 프와코비체 양육원에서 한국전쟁고아들을 보살폈던 폴란드 교사들은 아이들의 엄마와 아빠가 돼 사랑으로 품어줬다. 새로운 환경에 두렵고 낯설었을 아이들은 폴란드 교사들의 진심 어린 보살핌에 점차 안정을 찾아갔고, 상처를 치유했다. 스크린에 담긴 흑백사진 속 행복한 미소를 짓고 있는 아이들의 모습은 사랑스러우면서도 아프다.

폴란드 교사들은 60년이 넘는 시간이 흘렀음에도 아이들과 나눈 사소한 기억까지 보관하고, 그들을 떠올리며 눈물을 흘린다. “아이들에게 우리가 사랑한다고 꼭 전해달라”면서 연신 흐르는 눈물을 닦아내던 유제프 보로비에츠 원장의 모습은 먹먹한 감동을 안긴다. 하지만 ‘왜?’라는 의문도 함께 든다. 낯선 나라에서 온 다른 민족의 아이들을 이들은 왜 이토록 사랑하고 그리워하는 걸까.

‘폴란드로 간 아이들’은 추상미 감독과 탈북여성 이송의 특별한 여정을 담는다. 해당영화 스틸컷 /커넥트픽쳐스 제공
‘폴란드로 간 아이들’은 추상미 감독과 탈북여성 이송의 특별한 여정을 담는다. 해당영화 스틸컷 /커넥트픽쳐스 제공

추상미 감독은 ‘상처 입은 치유자’라는 메시지를 통해 이에 대한 답을 제시한다. 폴란드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군에 의해 많은 핍박과 공격을 받았다. 또 동부는 소련에 의해, 서부는 독일에 의해 분할되는 수모도 겪었다. 치열한 항전 끝에 폴란드는 독일의 패전으로 독립을 맞이하지만, 고아원의 90% 이상이 전쟁고아로 가득 찼을 정도로 폴란드는 수많은 인명피해와 재산 손실을 입었다.

실제로 폴란드 교사들 중 상당수가 전쟁고아 출신이었다. 이미 경험을 통해 아픔을 겪었던 폴란드 선생님들은 아이들의 마음을 누구보다 깊이 공감했고, 헌신적인 사랑으로 그들의 상처를 치유했다. 지우고 싶은 개인의 상처이자 역사의 상처는 그렇게 선하게 사용돼 또 다른 누군가의 ‘치유자’가 된 셈이다. 폴란드 교사들의 위대한 사랑은 이념과 사상, 국경, 계층, 세대를 뛰어넘는 평화의 메시지다.

추상미 감독은 폴란드로의 특별한 여정에 배우를 꿈꾸는 탈북여성 이송과 함께 했다. 추 감독은 한국전쟁고아들의 발자취를 따라가며 과거를 짚으면서도, 현재를 살아가고 있는 탈북 젊은이들의 상황과 고민을 영리하게 엮으며 이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이 생각해볼 만한 메시지를 던진다. 또 서로 다른 삶을 살았고 전혀 다른 성격을 지닌 남과 북, 두 사람이 서로를 이해하고 공감하는 과정은 남북 관계가 급변하는 이 시대에 우리가 겪어야 할 모습과 닮아있어 깊은 공감대를 자극한다.

배우에서 감독으로 변신한 추상미 감독은 쉽지 않은 소재와 무거운 주제를 담담하게 담아내면서도 묵직한 메시지를 전달한다. 극적인 장치 없이도 뭉클한 감동과 여운을 남기며 군더더기 없는 연출력을 자랑한다. 폭넓은 연기 스펙트럼을 자랑했던 ‘배우’ 추상미를 당분간 볼 수 없다는 사실은 아쉽지만, ‘감독’ 추상미가 전하는 감동이 그 빈자리를 꽉 채울 듯하다. 오는 31일 개봉, 러닝타임 79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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