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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규제의 올가미-유통 ①] ‘용어의 역설’ 유산법의 민낯
2018. 10. 31 by 범찬희 기자 nchck@naver.com

침체된 경제를 되살리는 돌파구로 규제 개혁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높다. 이 같은 요구에 문재인 정부도 뜻을 같이하고 있다. 지난 8일 청와대 국무회의 자리에서 문 대통령은 “규제에 발목이 잡혀 신기술과 신산업이 싹도 피지 못하고 사라지는 일이 없어야한다”며 규제 개혁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하지만 문 정부의 규제혁신 5법 등 혁신 노력은 일부 정치권의 반대에 부딪혀 지지부진하게 진행되고 있는 상황이다. 이에 <시사위크>에서는 각 산업군별 ‘손톱 밑 가시’는 무엇인지 살펴보고, 규제 완화의 필요성을 점검한다. [편집자 주]  

프랑스와 일본 등 유통 선진국들이 대규모 점포를 상대로 한 규제 정책을 해제하고 있는 가운데 국내에서는 의무휴업일 수를 확장하는 등 규제를 강화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사진은 국내 한 대형마트의 모습. / 뉴시스

[시사위크=범찬희 기자] 유통산업발전법(이하 유산법) 개정안이 초읽기에 들어가면서 유통가가 울상이다. 복합쇼핑몰까지 대형마트와 마찬가지로 월 2회 의무휴업이 시행될 경우 영업에 상당한 지장이 불가피해 보인다. 국회는 복합쇼핑몰 의무휴업 등이 담긴 ‘유통산업발전법 일부개정법률안’의 연내 통과를 앞두고 있다.

◇ 유통산업발전법, ‘발전’ 아닌 ‘규제’에 매몰 

유산법이 유통가의 뜨거운 감자가 된 건 2012년 무렵부터다. 국내에 대형마트가 서서히 들어서기 시작한 1997년 ‘유통산업의 효율적 진흥과 균형 있는 발전을 꾀한다’는 취지로 도입이 이뤄졌지만, 본격적으로 이름이 알려진 건 이로부터 15년이 흐른 뒤다. 2012년 대형마트의 영업시간 제한과 의무휴업 규정이 신설된 게 유산법이 유명세를 타게 된 결정적 계기다.

유산법은 최근 몇 년 사이 규제에 포커스를 맞춰 진화를 거듭해 왔다. 대형마트의 자율성에 제동이 걸린 2012년, 오전 0시부터 8시까지로 제한된 영업시간은 1년 뒤 0시에서 10시로 두 시간 연장됐다. 매월 하루 또는 이틀로 느슨하게 도입된 의무휴업 규정도 매월 공휴일 중 2회 타이트해졌다. 전통시장 주변에 대형마트 입점을 제한하는 전통상업보존구역도 500m에서 1km로 두 배 확대됐다. 

유산법의 진화는 여전히 현재 진행형이다. 23일 의안정보시스템에 따르면 현재 31건의 유통산업법 일부개정법률안이 발의돼 계류 중이다. 이들 계류 법안의 상당수는 규제 강화와 연관이 깊은데, 대표적인 것이 대규모점포의 의무휴업일을 월 4회로 늘려야 한다는 내용이다. 

백화점과 면세점의 영업시간을 제한하고 의무휴업 대상에 포함시키려는 움직임도 일고 있다. 이외에도 추석과 설날엔 반드시 휴업하고, 전통상업보존구역 지정범위를 1km에서 2km로 확대해야 한다는 제안도 이뤄진 상태다.

규제가 곧 상생이라는 사고방식은 세계적 흐름과도 어긋난다는 지적이다. 프랑스와 일본 등 한국이 상당 부분 참고하고 있는 유통산업 선진국에서는 형평성보다 효율성에 초점을 맞춰 규제 완화 기조로 돌아섰다. 

프랑스에서는 인구 기준으로 대규모 유통점포의 규모를 제한하는 정책을 폐지하는 등 유통산업의 규제를 점차 완화하고 있다. <그래픽=이선민>
[사용된 이미지 출처:프리픽(Freepik)]

◇ ‘유산법의 역주행’ 올가미 푸는 유통 선진국 

한국경제연구원이 지난 연말 발표한 ‘프랑스·일본 유통산업 규제 변화 추세와 시사점’이라는 보고서에 따르면, 2008년 프랑스는 유통산업을 심각하게 왜곡한다는 비판을 받아온 ‘라파랭법’을 도입 12년 만에 폐지했다.

1996년 제정된 라파랭법은 대형점포의 면적을 제한하는 내용을 핵심으로 한다. 전신인 ‘로와이에법’에서의 인구 기준을 폐지하고 매장면적의 상한선을 1,000㎡에서 300㎡로 하향 조정했다. 하지만 라파랭법은 유럽위원회(EC)로부터 유럽공동체조약에 의해 존중받아야 할 사업소 설립의 자유 및 서비스 제공의 자유원칙에 위배된다는 지적을 받아왔다. 한마디로 시장의 자유원리에 어긋난다는 얘기다. 이 같은 비판을 받아들여 프랑스는 2008년 인구 2만명 이상 일 때에만 1,000㎡ 이상의 점포를 허용한다는 내용을 골자로 하는 ‘경제현대화법’을 도입했다.

일본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일본판 유산법인 ‘대점법’(대규모 소매점포에 있어서 소매업의 사업활동의 조정에 관한법률)이 폐기된 지 이미 오래다. 지난 2000년 대형마트 등의 면적과 영업시간, 휴업일수 등을 제한해 온 대점법은 소매점 주변 도시 환경 보호에 초점을 둔 ‘대점입지법’으로 변경이 이뤄졌다. 대형마트로 인해 주변에 교통정체나 주차, 소음 등의 문제가 발생하는 경우에만 영업에 제한을 줄 수 있도록 했다. 일본에서는 대점법이 폐지되기 전인 1990년대에도 영업시간 규제를 완화하는 방향으로 점차 정책이 변화돼 왔다. 

안승호 숭실대 경영학과 교수는 “온라인 유통채널이 급성장하고 있는 가운데서 일자리 창출과 지역 경제 활성화에 기여하는 오프라인에 족쇄를 채우는 건 규제 대상을 잘못 설정한 셈”이라며 “대형점포의 영업활동이 제한되면 주변 상권까지 위축돼 집적효과가 사라지게 되며, 나아가 대형마트와 복합쇼핑몰에서 여가를 즐기고자 하는 국민들의 라이프스타일까지 국가가 침해하는 꼴”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