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F 중에서도 특히 과학 이론 자체를 중요하시는 '하드 SF' 장르는 보수적인 성향이 강하다는 인식을 갖고 있다.
SF 중에서도 특히 과학 이론 자체를 중요시하는 '하드 SF' 장르는 보수적인 성향이 강하다는 인식을 갖고 있다.

[시사위크=현우진 기자] 누군가는 과학소설(SF)이 진보적인 장르라고 말하고, 또 다른 누군가는 보수주의자들이 득시글대는 곳이라고 주장한다. 문제는 SF로 분류된다고 해서 다 같은 계파가 아니라는 데 있다. <스타워즈>, <스타트랙>과 같은 스페이스 오페라부터 러브크래프트 류의 호러 소설, SF치고는 유난히 감수성이 넘치는 뉴웨이브도 있다. SF 문학계와 우익 이데올로기를 동일시하는 사람들은 아마도 ‘하드 SF’ 계열의 작가들을 찾아봤을 가능성이 크다.

◇ 공화당 지지자들이 ‘특히 더’ 좋아한 작가들

1978년, 미국인 사회학자 윌리엄 심스 베인브리지와 머레이 M. 달지엘은 학술지 <과학소설 연구>에 <팬들이 인식하는 SF의 형태>라는 제목의 짧은 논문을 발표한다. 이 논문에는 출판사 관계자부터 일반 팬들까지 수천명을 대상으로 SF 작가들에 대한 인식을 설문조사한 결과가 담겨있는데, 개중에는 잡지 편집부 관계자 130명의 정치성향과 좋아하는 작가들의 연관성을 조사한 결과도 포함돼있다.

두 연구자가 이와 같은 연구를 진행한 이유는 간단하다. “과학 소설은 과학적인 분석을 받을 자격이 있기 때문”이다. 당시는 전통적인 질적 문학 분석방식이 SF에도 적용되기 시작하던 시기였지만, 양적 분석은 거의 시도되지 않았던 터라 이 논문은 통계를 통한 작가 분류 연구의 이정표가 됐다. 또한 두 연구자는 자신들의 연구가 “대중적으로 쉽게 이해될 수 있도록” 설문조사 결과를 나타내는 4개의 차트를 첨부했는데, 이 자료들은 과학소설계의 하위 장르들이 어떻게 분화돼있는지 가장 직관적으로 보여준다.

SF 문학계의 '3대장'인 아시모프와 클라크, 하인라인은 모두 하드 SF 계열로 분류된다. /이선민 기자
SF 문학계의 '3대장'인 아시모프와 클라크, 하인라인은 모두 하드 SF 계열로 분류된다. /그래픽=이선민 기자 [사용된 이미지 출처:프리픽(Freepik)]

도표의 오른쪽 위편, 즉 독자들에게 많은 인기를 가지면서 동시에 보수적인 색채를 가졌다는 인식을 받는 작가들의 모임은 ‘하드 SF’라는 이름으로 정의된다. ‘하드 SF’는 SF 중에서도 특히 과학 이론 자체를 중요시하며, 인물과 스토리보다 과학법칙을 이용한 설정 자체가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하위분야의 총칭이다. 새 SF 대작이 발표될 때마다 과연 이 작품이 하드 SF에 속하냐 아니냐를 두고 논쟁이 벌어지는, 다소 원리주의적인 측면도 있다.

가장 유명한 SF 작가 세 명인 아이작 아시모프와 아서 클라크, 로버트 A. 하인라인은 모두 하드 SF 그룹으로 분류되며 래리 니븐의 이름도 보인다. 도표에는 표시되지 않았지만 폴 앤더슨과 고든 R. 딕슨 등도 여기에 속하는 작가들이다. 베인브리지와 달지엘의 조사는 미국의 독자들이 이 작가들의 글에서 보수주의자의 냄새를 맡아냈음을 시사한다. 아이작 아시모프의 경우 설문조사에서 나타난 정치성향과 실제 작품의 상관관계가 0.54로 유달리 강하다는 결과도 나왔다.

◇ 로버트 하인라인과 편리한 인구통계

아이작 아시모프는 하드 SF 작가임에도 진보 성향을 가졌다.
아이작 아시모프는 하드 SF 작가임에도 진보 성향을 가졌다.

물론 ‘하드 SF’ 계열에 속하는 수십 명의 작가들이 모두 같은 정치성향을 가졌을 리는 없다. 자신의 정치성향을 공개할 일이 없었던 수많은 작가들은 둘째 치고서라도 가장 유명한 소설가 두 명만 비교해도 알 수 있는 사실이다. 로버트 A. 하인라인은 베트남 전쟁과 레이건 행정부의 방위정책에 찬성했으며 <스타쉽 트루퍼스>로 군국주의를 찬양한다는 비판도 받았다. 반면 보수적 정치성향과 작품의 연관성이 강하다는 평가를 받았던 아이작 아시모프는 민주당원이다. 그는 언론사에 베트남 전쟁에 반대하는 광고가 실리도록 후원했으며, 1972년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TV 방송에 출연해 민주당 후보였던 조지 맥거번을 공개적으로 지지하기도 했다.

그렇다면 우파 성향을 가진 독자들이 ‘하드 SF’로 분류되는 작가들을 선호하는 것은 우연일까? 베인브리지와 달지엘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작가의 실제 성향과 별개로, 과학과 기술의 발달에 긍정적이라는 하드 SF의 특성상 보수 성향을 가지는 독자들이 이들의 작품을 선호하는 경향이 나타났다는 것이 두 연구자의 설명이다.

인구통계는 하드 SF 작가들과 다른 SF 분야, 혹은 순문학 작가들의 차이점을 잘 보여주는 사례다. 인구통계는 전체주의 권력이 시민 개개인을 관리하고 재단하데 이용될 수 있다는 점에서 일반적으로 소설가들에게 환영받지 못하는 소재다. 찰스 디킨스는 통계를 사회 억압의 상징으로 봤으며, 조지 오웰처럼 미래의 디스토피아를 그린 작가들도 마찬가지였다. 반면 하인라인을 비롯한 하드 SF 계열의 작가들은 단순히 미래 사회를 묘사하는 도구로 활용하는 경향을 보여준다.

새벽 3시경, 갑자기 벌떡 일어났다. 잠이 확 깼다. 불이 들어오자 눈을 깜빡이며 불빛을 보았다. 몹시 기묘한 꿈을 꾸었는데, 악몽까지는 아니었지만 꼬마 리키가 인구 통계 섹션에 게재된 걸 모르고 그냥 넘어가는 내용의 꿈이었다.
그럴 리가 없지. 주위를 둘러보고 일주일 치 신문이 눈에 들어오자 겨우 안심했다. 가끔 그러듯이 잠들기 전에 처리기에 쑤셔 넣어 폐기시켰을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신문을 침대 위로 가져와 인구 통계 섹션을 다시 읽었다. 이번에는 모든 카테고리를 꼼꼼히 읽었다. 출생, 사망, 결혼, 이혼, 입양, 개명, 입원, 퇴원까지 다. 관심 있는 소제목만 보고 섹션을 대충 훑어 내려가는 동안 리키의 이름을 보고도 그냥 넘어갔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리키가 결혼을 하거나 혹은 아이를 낳았을 수도 있지 않은가.
로버트 A. 하인라인, 여름으로 가는 문, 오공훈 옮김, 시공사

초월적 존재에 의해 운영되는 무기상점을 통해 자신의 몸을 지켜야 하는 세계를 그린 A. E. 밴 보그트의 SF소설 ‘무기 상점’은 원래부터 정치철학적인 시사점으로 주목받은 작품이다. 소설 속 전체 줄거리와는 큰 연관성이 없는 한 대목에서는 인구조사의 미래를 슬며시 엿볼 수 있다. 내행성계 곳곳에 체인점을 둔 무기상점이 제공하는 실시간 인구통계가 그것이다.

태양계 191억7,446만3,747명
지구 111억9,324만7,361명
화성 10억9,729만8,604명
금성 51억4,105만3,811명
위성 17억4,286만3,971명

그가 보고 있는 와중에도 숫자는 오르락내리락 하거나 원래 있던 곳에서 위나 아래로 자리를 바꾸는 등 계속 변했다. 사람들은 죽고, 태어나고, 화성이나, 금성, 목성과 지구의 위성으로 이주하고, 돌아오고, 매 분마다 수천 개의 우주항에서 쏟아져 나오고 있었다. 아주 넓은 관점에서 보면 삶은 이렇듯 계속되고 있었다.
A. E. 밴 보그트, 무기 상점, 고호관 옮김, 오멜라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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