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태는 오래된 난제다. 대한산부인과의사회 추정치에 따르면, 하루 평균 낙태를 하는 여성은 3,000명에 달한다. 낙태가 대부분 음지에서 불법으로 이뤄진다는 점을 감안하면 더 많을 것이라는 분석이다. ‘임신을 중단할 권리를 요구하는 여성들은 점점 늘고 있다. ‘낙태죄는 이들을 범죄자로 낙인찍는다. 출산은 국가가 정책으로 관리할 만큼 개인과 사회가 고민해야 하는 복잡한 문제다. 낙태는 그 어떤 문제보다 우리사회의 미래와 밀접하게 맞닿아있다. 낙태죄에 대해 꾸준히 이야기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편집자주>

현행 모자보건법에는 인공임신중절이 허용되는 제한적 사유가 명시돼있다. 사진은 해당 기사 내용과 직접적으로 관계 없음 / 뉴시스
현행 모자보건법에는 인공임신중절이 허용되는 제한적 사유가 명시돼있다. 사진은 해당 기사 내용과 직접적으로 관계 없음 / 뉴시스

[시사위크=은진 기자] 현행법에 따르면, 인공임신중절을 하더라도 모자보건법이 정한 일정한 요건에 해당하는 경우 낙태죄로 처벌받지 않는다. 국가가 ‘낙태’를 해도 되는 경우를 따로 구분해놓은 것이다. 크게는 유전적·윤리적·의학적 사유로 분류되는데, 이 허용 사유에도 맹점과 한계가 분명하다.

       <모자보건법 제14조 인공임신중절수술의 허용한계>

1. 본인이나 배우자가 대통령령으로 정하는 우생학적(優生學的) 또는 유전학적 정신장애나 신체질환이 있는 경우

2. 본인이나 배우자가 대통령령으로 정하는 전염성 질환이 있는 경우

3. 강간 또는 준강간(準强姦)에 의하여 임신된 경우

4. 법률상 혼인할 수 없는 혈족 또는 인척 간에 임신된 경우

5. 임신의 지속이 보건의학적 이유로 모체의 건강을 심각하게 해치고 있거나 해칠 우려가 있는 경우

허용 사유에 해당되는 임부는 임신 24주 이내인 경우 배우자의 동의를 받아 합법적으로 인공임신중절수술을 할 수 있다. 위의 5가지 사유는 1973년 모자보건법이 제정됐을 때 당시와 크게 다르지 않다. ‘우생학적 사유’에 속하는 정신장애·신체질환·전염병의 종류와 임신중절이 허용되는 기간이 개정됐을 뿐이다. 법 제정 당시 ‘임신 28주 이내’였으나 의학기술 발달에 따라 태아의 모체 밖 생명 유지 가능성이 높아졌다는 이유로 2009년에 ‘24주 이내’로 축소됐다.

김정혜 한국여성정책연구원 부연구위원은 한국여성단체연합이 주최한 ‘재생산권 확보를 위한 법·제도 개선 방향 모색 토론회’에서 이 같은 인공임신중절수술 허용한계에 대한 문제점을 지적했다. 김 위원은 “태아의 생명권이라는 근거 위에서 우생학적 사유를 (낙태죄 처벌) 예외로 두는 방식은 ‘인간 종의 개선’이라는 우생학적 관점에서 태아의 장애 여부 및 장애 가능성 등에 따라 생명의 가치를 구분한다는 점에서 비판을 받고 있다”고 주장했다.

가장 논란이 되고 있는 부분은 ‘강간 또는 준강간에 의해 임신된 경우’ ‘법률상 혼인할 수 없는 혈족 또는 인척 간에 임신된 경우’와 같은 윤리적 사유이다. 모자보건법은 ‘강간 또는 준강간’일 경우에 인공임신중절을 허용하고 있는데, 이는 비동의간음, 위계·위력에 의한 간음 등의 성폭력 범죄로 인한 임신 또는 성매매로 인한 임신 사례 등을 제외한다는 문제점을 안고 있다.

수사기관이 아닌 산부인과가 강간 또는 준강간으로 인한 임신인지 여부를 가리기 쉽지 않다는 점도 맹점이다. 확실한 강간 피해를 입증하기 위해서는 재판 절차를 거쳐야 하지만, 이 과정에서 임부는 만삭이 되거나 이미 출산을 하게 된다. 마찬가지로 현행법(생명윤리 및 안전에 관한 법률)이 태아의 유전자 검사를 제한하고 있어 생물학적 부가 누구인지를 입증할 수 없는 상황에서 ‘근친 간 임신’을 증명할 방법도 딱히 없다.

이처럼 모자보건법은 최소한의 임신중절 허용 사유를 두고 있지만, 이마저도 현실과 동떨어져 있어 제 역할을 하지 못하고 있다. 때문에 인공임신중절 허용 사유를 보다 폭넓게 적용하고 있는 외국 입법례에 따라 ‘사회경제적 사유’를 추가해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된다. 자녀의 수나 임부의 연령, 경제적 여건 등에 따라 인공임신중절을 할 수 있도록 규정하는 것이다. 핀란드는 자녀가 4명 이상이면 인공임신중절을 할 수 있도록 하고 있고, 노르웨이는 임부의 연령이 16세 미만일 때, 오스트리아는 미성년자일 때 인공임신중절을 허용하는 등의 사회경제적 사유를 두고 있다.

하지만 사회경제적 사유를 추가해 임신중절 허용 폭을 넓히더라도 여전히 문제는 남아있다. 김정혜 위원은 “사회경제적 사유 하에서 여성은 자신의 현재와 미래를 설계하고 스스로의 운명을 결정할 권한을 보유한 주체가 아니라 사회경제적 여건들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임신을 지속할 수 없는 일종의 ‘피해자’로 자리매김 한다”며 “어떤 수준에서 기준점을 마련하게 된다면 임신한 여성들은 국가가 자의적으로 그어둔 선에 의하여 합법적 임신중단의 허락을 받거나 아니면 범죄자가 된다”고 강조했다.

김 위원은 그러면서 “모든 사람, 모든 가족에게 일괄 적용하기에 타당한 임신중단의 기준이란 존재할 수 없다”며 “임신중단의 유일한 기준은 임부의 신체적, 정신적 건강과 임신중단의 안전성이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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