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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이 사랑한 통계⑫] 우연을 핑계 삼아
2018. 12. 27 by 현우진 기자 hwjin0216@naver.com
현대 소설가들 중 가장 적극적으로 우연성을 활용하는 작가인 폴 오스터. /뉴시스·AP
현대 소설가들 중 가장 적극적으로 우연성을 활용하는 작가인 폴 오스터. /뉴시스·AP

[시사위크=현우진 기자] 오랫동안 문학계에서 우연은 금기의 대상이었다. 뜻밖의 만남이나 사고, 과도한 불행에 근거한 전개는 독자의 불신을 사고 몰입을 방해하며, 이는 결국 이야기의 힘을 떨어트리기 때문이다. 현대의 문학가들은 ‘우연성’을 옛 작가들의 관습으로 치부하며, 현대소설이라면 개연성이라는 특징을 가져야 한다고 말한다.

하지만 현실에서와 마찬가지로 문학 속에서도 우연성을 완전히 배제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우연 또한 결국 삶의 한 부분이기 때문이다. 어떤 작가들은 더 논리적인 플롯보다도 더 정교하게 기획된 우연을 만들어내기 위해 머리를 싸매곤 한다.

◇ 이야기의 시작과 끝을 만드는 우연들

교통사고는 소설과 시나리오 등에서 가장 빈번하게 등장하는 '우연한 요소'다.
교통사고는 소설과 시나리오 등에서 가장 빈번하게 등장하는 '우연한 요소'다.

작가들은 종종 이야기를 새로운 국면으로 전개하기 위해, 또는 갈등을 끝마치기 위해 등장인물의 죽음이라는 극단적인 방법에 손을 댄다. 가장 널리 사용되는 ‘죽음의 형태’는 물론 교통사고다. 빠른 속도로 질주하는 자동차는 가장 흔한 사망 원인이며, 질병과 달리 지면을 많이 할애할 필요도, 자살처럼 별도의 동기를 만들어야 할 이유도 없다.

잠시 후 그녀가 팔을 휘젓고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어스름 속으로 달려 나갔다. 그가 문을 나서기도 전에 상황은 끝나버렸다.
신문에서 이름 붙인 이른바 ‘죽음의 차’는 멈추지 않았다. 짙어지는 어둠 속에서 튀어나와서는 잠시 비극적으로 비틀거리더니 길모퉁이를 지나 모습을 감추었다. 마이케일러스는 차의 색깔조차 정확하게 기억하지 못했다. 처음 찾아온 경관에게는 연두색이라고 말했다. 뉴욕 쪽으로 향하던 다른 차 한 대가 100야드를 지나서야 멈추었고, 운전자가 머틀 윌슨이 끔찍한 죽음을 맞이한 현장으로 달려왔다. 그녀는 걸쭉한 붉은 피가 먼지와 엉겨 있는 도로 위에 엎드려 있었다.
- 스콧 피츠제럴드, 위대한 개츠비, 김영하 옮김, 문학동네

개츠비의 운명을 바꿔놓은 교통사고는 사고 자체뿐 아니라 그 이전의 과정들도 우연의 연속이었다. 개츠비와 톰이 차를 바꿔 타고, 윌슨은 도시를 떠날 결심을 했으며, 윌슨의 아내는 조던을 톰의 아내로 착각하는 등 데이지가 톰의 불륜 상대를 들이받기 전까지 몇 가지의 사건들이 꼬리를 물고 일어났다. <위대한 개츠비>를 직접 번역한 소설가 김영하의 표현에 따르면, 이들은 모두 ‘표적을 빗나간 화살들’인 셈이다.

유리잔을 전화기 옆의 받침대에 놓는데 전화벨이 울렸다.
“레슬리입니다. 레슬리 톰슨요.” 새벽 목욕을 좋아한다던 톰슨이다. “험버트 부인이 차에 치였어요. 급히 와주셨으면 합니다.”
나는 대답했다. 약간 성급하게. 아내는 안전하고 아무 일 없다고. 그러고는 수화기를 잡은 채 문을 열고 말했다.
“여기 이 친구가 글쎄 당신이 죽었다는구려, 샬롯.”
그러나 샬롯은 거실에 없었다.
- 블라디미르 나보코프, 롤리타, 권택영 옮김, 민음사

<롤리타>의 1부가 험버트 험버트의 음울한 인생과 헤이즈 모녀와의 첫 만남을 소개하는 드라마라면 2부는 로드무비에 가깝다. 험버트 험버트는 자신의 낡은 쿠페에 돌로레스 헤이즈(‘롤리타’)를 태우고 일 년여 동안 미국 전역을 일주하는데, 그가 그렇게 행동할 수 있었던 가장 큰 근거는 롤리타의 친모인 샬롯의 죽음이다. 샬롯이 불의의 사고로 죽지 않았더라면 험버트 험버트가 법망을 피해 롤리타를 손에 넣는 것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우연을 사랑한 작가들의 목록을 만든다면 폴 오스터의 이름이 빠질 수 없다. 그는 모든 스토리가 개연성에 따라 전개돼야 한다는 불문율을 거부한 채 자신이 쓴 거의 모든 소설들에 우연성을 집어넣어왔다. “우리는 세계가 예측불가능하기 때문에 스스로를 지배하길 원하지만, 항상 성공하지는 못한다”는 것이 그의 지론이다. 오스터의 대표작 <뉴욕 3부작> 중 첫 번째 편인 <유리의 도시>는 우연히 잘못 걸려온 전화로부터 시작된다.

그 일은 잘못 걸려온 전화로 시작되었다. 한밤중에 전화벨이 세 번 울리고 나서 엉뚱한 사람을 찾는 목소리가 들려오는 것으로. 훨씬 나중에, 그러니까 자기에게 무슨 일들이 일어났는지를 생각해 볼 수 있게 되었을 때, 그는 우연 말고는 정말인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결론을 내리게 될 터였다. 하지만 그것은 훨씬 뒤의 일이다. 처음에는 단지 사건과 결과가 있었을 뿐이다. 그 일이 다르게 끝이 났건, 낯선 사람의 입에서 나온 첫마디로 미리 정해진 것이었건, 그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문제는 이야기 그 자체이며, 그것에 어떤 의미가 있느냐 없느냐는 여기서 할 이야기가 아니다.
- 뉴욕 3부작, 폴 오스터, 황보석 옮김, 열린책들

어느 날 밤 추리소설가 대니얼 퀸은 ‘오스터 탐정사무소의 폴 오스터 씨’를 찾는 전화를 받는다. 그는 잘못 거셨다고 대답하고 전화를 끊지만 다음날에도, 그 다음날에도 같은 전화가 걸려온다. 셋째 날이 되자 퀸은 결국 수화기를 들고 내가 바로 당신이 찾는 그 탐정이라고 말한다.

◇ 밤마다 전화가 잘못 걸려올 확률은

폴 오스터는 이틀 연속 잘못 걸려온 전화에서 '유리의 도시'의 아이디어를 얻는다.
폴 오스터는 이틀 연속 한밤중에 잘못 걸려온 전화에서 '유리의 도시'의 아이디어를 얻는다.

단 한 번 일어난 사건의 확률은 특별한 계산 없이 옛 통계자료를 바탕으로 추정할 수 있다. 미국 고속도로 안전관리국의 자료에 따르면 <위대한 개츠비>의 무대인 1922년 미국 인구 10만명당 자동차 사망률은 13.502명이었다. 한편 <롤리타>의 배경인 1947년은 21.643명으로, 미국 역사에서 자동차 사망률이 가장 높았던 시기에 속한다. 2017년의 미국(11.40명)과 한국(9.6명)에 비하면 두 배 가량 높다.

여기에 더해, 피츠제럴드와 나보코프는 우연을 단순한 우연으로 남겨두지 않기 위해 몇 가지 장치도 마련해뒀다. <위대한 개츠비>의 머틀 윌슨과 <롤리타>의 샬롯 헤이즈는 모두 사고 당시 분노로 이성을 잃은 상태였다. 한편 윌슨 부인의 경우 시간대가 저녁에서 밤으로 넘어갈 무렵, 시야가 어두워질 때였다는 점을 감안하면 사고 확률이 더 높아진다.

그렇다면 같은 사건이 여러 번 일어나는 경우는 어떨까. 푸아송분포는 확률이 아주 낮은 사건들의 발생 가능성을 나타내는 분포다. 발생 횟수가 늘어날수록 분모가 분자보다 훨씬 빨리 커지기 때문에 전체 확률은 기하급수적으로 줄어든다. 처음에는 ‘있을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되는 사건도 두세 번 반복된다면 느낌이 달라지는 것과 같은 이치다.

푸아송분포를 <유리의 도시>에 적용시키기에는 무리가 있다. 상대가 이미 틀린 전화번호를 알고 있는 이상, 전화가 잘못 걸려온 세 번의 사건들은 서로 독립적이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서로 다른 사람들로부터 전화가 잘못 걸려온다면 이야기가 다르다. 다음은 폴 오스터가 한밤중 잘못 걸려온 전화에 영감을 받아 <유리의 도시>를 집필한 후 10년이 흐른 뒤의 일이다.

그날 오후 브루클린의 아파트에서 혼자 책상 앞에 앉아 일하려고 애쓰고 있을 때 전화벨이 울렸다. 이곳은 내가 1980년에 살았던 아파트와는 다른 아파트였다. 아파트도 다르고 전화번호도 달랐다. 내가 수화기를 들자, 전화를 건 사람은 퀸 씨를 바꿔 줄 수 있느냐고 물었다. 스페인 억양이 섞여 있는, 내가 모르는 목소리였다. (중략) 나는 확인하기 위해 이름 철자를 물어보았다. 전화를 건 사람은 외국 말투가 아주 심하니까, 어쩌면 퀸(Quinn)이 아니라 퀴인(Queen) 씨를 찾고 있는지도 모른다. 나는 그러기를 바랐지만, 불행히도 내 기대는 무너졌다.
“큐-유-아이-엔-엔.” 그가 대답했다.
나는 불현듯 겁이 나서 한동안 아무 말도 입 밖에 낼 수가 없었다.
- 폴 오스터, 빨간 공책, 김석희 옮김, 열린책들

특정 기간 동안 보통 사람들이 잘못 걸려온 전화를 받는 평균적인 횟수를 λ라고 놓아 보자. 푸아송분포의 공식에 따르면, 남들이 잘못 걸려온 전화를 λ번 받는 특정 기간 동안 나는 세 번 받을 확률은 λ³·e^(-λ)/6으로 나타낼 수 있다. 만약 λ가 1이라면 그 확률은 6.13%에 불과하다.

폴 오스터의 에세이집 <빨간 공책>은 우연으로 가득 차 있다. 아슬아슬하게 자신을 비껴간 두 번의 폭발로 목숨과 다리를 부지한 친구의 삼촌과 오전에 아파트에서 잃어버린 동전을 오후에 야구장에서 찾은 이야기, 그리고 <유리의 도시>의 시작이 된 잘못 걸려온 전화 등 오스터가 직접 겪거나 들은 기묘한 이야기들이 담겨있다. 오스터는 대니얼 퀸과 달리 “내가 그 탐정”이라고 말하지 못했으며, 에세이집에서 “솔직히 말하면 나는 좀처럼 얻기 힘든 기회를 놓쳐 버린 기분이 들었다”고 털어놓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