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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려진 건축물의 부활, 폐산업시설 재생사업④] 서울 도심 속 문화재생 공간을 가다
2018. 12. 31 by 현우진 기자 hwjin0216@naver.com

‘부수고 짓고’는 오랫동안 우리 건축사를 상징하는 표현이었다. 낡은 건물이 있으면 깨끗이 밀어버린 후 최신식 건물을 올리는 것이 당연시됐다. 그러나 이제는 패러다임이 바뀌었다. 문화생활과 휴식, 친환경이라는 키워드가 주목받으면서 기능을 잃은 산업시설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는 ‘폐산업시설 재생사업’이 새로운 이슈로 떠올랐다. 한국에선 이제 막 기지개를 켠 폐산업시설 재생사업의 현주소를 <시사위크>가 살펴봤다. [편집자주]

매봉산에서 바라본 마포 문화비축기지의 모습. /뉴시스
매봉산에서 바라본 마포 문화비축기지의 모습. /뉴시스

[시사위크=현우진 기자] 서울특별시는 국내 지방자치단체 중 가장 적극적으로 도시재생사업에 나서고 있는 곳이다. 600년 동안 나라의 수도로 기능하면서 근·현대를 아우르는 수많은 문화·산업유산을 가지게 됐고, 자연스레 이들을 해치지 않으면서 도시를 개발하는 버릇이 몸에 새겨졌다. 서울 시내 곳곳에서는 서로 다른 시대에 지어진 건축물들이 조화를 이루거나, 혹은 옛 건물들이 리모델링된 사례들을 찾아볼 수 있다.

폐산업시설을 철거하는 대신 문화공간으로 활용하자는 아이디어도 여기에서 비롯됐다. 마포 문화비축기지와 서울로7017는 모두 도시계획 담당자들이 폐산업시설을 철거하기 전에 ‘한 번 더’ 생각한 결과물들이다.

◇ 석유 대신 문화를 담은 마포 문화비축기지

마포 문화비축기지의 전신은 마포 석유비축기지다. 오일쇼크가 1970년대 초반을 뒤흔든 후, 서울시민이 비상시에 사용할 수 있는 석유를 저장하기 위해 1976년 건설된 공간이다. 석유비축기지는 1급 비밀시설로서 매봉산 자락에 몸을 숨기고 일반인의 접근을 차단했지만, 2002년 월드컵이 한국에서 열리고 도로 건너편에 상암 월드컵경기장이 건설되면서 더 이상 비밀기지로 남아있을 수 없게 됐다. 빈 석유기지를 서울시민을 위한 문화공간으로 탈바꿈시키기 위한 첫 삽이 떠진 것은 그로부터 13년이 흐른 후다.

컨테이너 박스로 만들어진 사회적기업 및 문화예술단체의 활동공간 '상암 소셜박스'. /시사위크
컨테이너 박스로 만들어진 사회적기업 및 문화예술단체의 활동공간 '상암 소셜박스'. /시사위크

재생과 친환경, 시민을 위한 공간이라는 마포 문화비축기지의 콘셉트는 입구부터 시작된다. 입구 왼편에 위치한 안내소 건물은 석유비축기지가 이전한 후 방치됐던 시간 동안 지역 예술인들이 활동공간으로 사용하던 공간이다. 재건축이 시작될 당시에는 철거가 예정돼있었지만, 역사성을 살리기 위해 안내소 건물로 이용하는 것으로 계획이 변경됐다. 원래 이곳을 사용하던 지역 활동가들을 위해선 광장 맞은편에 컨테이너로 새 작업공간이 만들어졌다. ‘상암소셜박스’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는 이 공간에는 현재 지역 사회적기업과 봉제장인 모임·업사이클링 가구 제작 그룹·핸드메이트 카페인 연합 등이 보금자리를 마련하고 있다.

유류탱크를 해체·정비하는 과정에서 나온 자재들을 활용해 만들어진 T6의 외·내부. /시사위크
유류탱크를 해체·정비하는 과정에서 나온 자재들을 활용해 만들어진 T6의 외·내부. /시사위크

마포 문화비축기지 입구에서 가장 먼저 보이는 건축물인 T6는 석유비축기지를 문화공간으로 개편하는 과정에서 새로 지은 건물이지만, 옛 흔적을 담고 있는 외벽 때문에 오래 전부터 존재했던 것 같은 느낌을 준다. 다른 유류탱크들을 해체‧재정비하면서 발생한 자재들을 그대로 활용해 건설됐기 때문이다. 카페테리아와 회의실·강의실 등 커뮤니티 시설을 갖추고 있는 T6는 교육과 휴식뿐 아니라 이곳을 찾은 시민들에게 문화비축기지의 정체성을 알려주는 역할도 맡고 있다.

T1은 석유비축기지로 이용되던 당시 휘발유를 보관했으며, 그 때문에 경비가 가장 삼엄했던 곳이기도 하다. 과거 석유비축기지 시절을 연상케 하는 디자인으로 리모델링된 통로를 따라가면 탱크가 해체된 후 남은 콘크리트 구조물 안쪽에 유리로 벽면과 천장을 덧댄 원형 홀을 만날 수 있다. 이곳에서는 과거의 옹벽과 현재의 건축물, 그리고 문화비축기지를 감싸고 있는 매봉산의 암반지형을 한 눈에 바라볼 수 있다.

경유탱크로 사용되던 T2는 야외공연장으로 변신했다. /시사위크
경유탱크로 사용되던 T2는 야외공연장으로 변신했다. /시사위크

경유 저장고였던 T2는 외부는 콜로세움을, 내부는 대학교의 노천극장을 연상케 하는 야외공연장으로 변신했다. 뒤편의 매봉산은 소리를 모아주는 역할을 맡는 동시에 날씨가 따듯할 때는 산수유와 개나리를 피워 관람객들에게 아름다운 경치를 제공한다. 무대 뒤편에서 쏟아지는 햇빛을 받으며 돌의자 사이에 서 있노라면 설계를 주관한 백상진 건축가(RoA 건축사무소)가 이곳을 문화비축기지 안에서 가장 마음에 드는 공간으로 뽑은 이유를 느낄 수 있다.

한편 야외공연장의 지하에서는 실내공연장을 중축하는 작업이 한창 진행되고 있다. 실내공연장은 본래 건설될 예정이 없던 곳이지만, 날씨가 좋지 않을 때를 위한 예비 공연장이 필요하다는 시민자문단의 의견에 따라 준공이 결정됐다.

문화비축기지 내에서 유일하게 석유비축기지 당시의 모습을 보존하고 있는 T3와 복합문화공간으로 꾸며진 T4를 거쳐 ‘이야기관’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는 T5까지 둘러보고 나면 비축기지가 겪어온 역사들을 대강은 파악할 수 있다. T5에서는 문화비축기지 리모델링 작업에 참가했던 건축가들의 인터뷰 영상과 이들이 직접 만들었던 설계도, 그리고 석유비축기지에서 근무했던 이들의 회고록을 만나볼 수 있다.

이제 개장한지 15개월밖에 지나지 않은 마포 문화비축기지의 변신은 아직도 현재진행형이다. T6의 2층에는 도서관을 만들기 위한 공사가 진행 중이고, 서울시는 문화비축기지 디자인그룹과 함께 3만5,000제곱미터 넓이의 광장을 활용할 또 다른 방안을 모색하는 중이다. 겉으로는 다소 황량해 보이는 ‘T0’ 문화마당은 특정 용도를 설정하는 대신 시민들이 참여하는 다양한 문화행사를 여는 공간으로 이용되고 있다.

◇ 서울 시내 최고의 녹색지대, 서울로7017

고가 화물 노선을 산책로로 조성한 뉴욕 시의 하이라인파크. 도로 한쪽에는 옛 철도의 일부분이 남아있다. /뉴시스·신화
고가 화물 노선을 산책로로 조성한 뉴욕 시의 하이라인파크. 도로 한쪽에는 옛 철도의 일부분이 남아있다. /뉴시스·신화

기능을 상실한 도로를 산책길과 휴식의 공간으로 이용하는 것은 이제 전 세계적인 움직임이다. 파리의 프롬나드 플랑테와 뉴욕의 하인라인 파크는 모두 폐선을 산책로로 개조해 시민들에게 제공한 사례들이다. 이동 자체에 맞춰졌던 초점을 이동의 주체인 사람으로 옮기면서 속도는 느리지만 이동을 즐길 수 있는 공간이 태어난 셈이다.

서울로7017. /뉴시스
서울로7017. /뉴시스

남대문시장과 명동, 남산과 서울역 서편을 연결하는 서울로7017의 모태는 1970년 준공된 9,661제곱미터 넓이의 고가도로다. 2006년 겨울, 고가도로가 안전등급 D 판정을 받은 후 차량통행이 완전히 금지될 때까지는 9년이 걸렸다. 처음에는 철거를 고려했던 서울시는 건축·도시계획·디자인 전문가들과 시민위원회의 논의를 거쳐 재생사업을 추진하는 쪽으로 방향을 돌렸고, 공모전을 통해 서울역 일대를 녹색공간으로 만든다는 건축가 위니 마스의 설계안을 채택했다. ‘서울역 고가도로’라고 불렸던 낡은 도로는 이로서 서울로7017이라는 새 이름을 얻었다.

건축·도시설계 사무소 MVRDV의 설립자 위니 마스는 “서울 중심부에 위치한 구식 고가도로를 친환경의 상징으로 바꿔 서울시가 더 녹색으로 물드는 촉매가 되도록 했다”고 설계 취지를 설명한다. 고가도로가 친환경의 상징이 될 수 있다는 것은 그가 갖고 있는 도시건축 개념에 비춰보면 결코 색다른 아이디어가 아니다. 위니 마스의 말에 따르면 미래형 도로는 시민들에게 녹지를 제공하고 활력을 북돋아주며, 도시를 더 친근하고 매력적인 공간으로 키워내는 보육원과 같은 곳이다.

겨울에는 대부분의 꽃과 나무들이 모습을 감추는 대신 부드러운 밝기의 불빛들이 식물들의 빈자리를 메운다. /시사위크
겨울에는 대부분의 꽃과 나무들이 모습을 감추는 대신 부드러운 밝기의 불빛들이 식물들의 빈자리를 메운다. /시사위크

서울로7017은 이제 서울 시내에서 가장 식물다양성이 높은 공간이다. 직선길이 983미터의 보행자도로 곳곳에는 228종의 관목과 꽃들이 나무 화분 645개에 나눠 배치돼있다. 식물개체 수는 2만4,000그루까지 늘어날 계획이며, 나무들은 2025년경에 최고 높이까지 자랄 것으로 예상된다. 한편 밤이 되면 들어오는 푸른색 불빛 역시 친환경의 상징으로, 밝은 도시의 빛과 대조를 이룬다.

서울로 곳곳에는 인근 호텔·빌딩과 이어지는 다리들이 놓여있다. /시사위크
서울로 곳곳에는 인근 호텔·빌딩과 이어지는 다리들이 놓여있다. /시사위크

물론 고가도로를 산책로로 탈바꿈시키는 작업이 나무를 심고 타일을 새로 까는 것만으로 가능한 일은 아니다. 인프라 시설에 다른 목적을 부여하기 위해선 먼저 그 기능을 대체하는 작업이 필요하다. 서울시는 차량이 서울역 고가도로를 이용하지 못하게 되면서 생겨날 교통체증을 막기 위해 24개 차선을 정비하고 13개 교차로의 신호시간을 조정했으며, 건축가들은 도로 곳곳에 서울역전의 호텔·백화점으로 통하는 새로운 다리와 계단을 설치해 기능성을 높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