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한국 사회의 주요한 화두 중 하나는 단연 ‘여성’이었다. 성차별과 성범죄를 고발하는 ‘미투 운동’이 한국 사회 전반을 흔들었고, 이를 시작으로 여성의 권리 및 기회의 평등을 주장하는 페미니즘 운동이 활발하게 진행됐다. 여성들은 거리로 나와 성범죄를 규탄하는 대규모 시위를 벌였고, 출판계에서도 페미니즘 관련 서적들이 큰 인기를 끌었다. 이러한 흐름은 영화계로도 이어졌다. 페미니즘에 대한 기본적인 인식을 바탕으로 주체적인 여성이 등장하는 여성주의 영화들이 다수 등장했고, 이러한 영화들에 대한 관객들의 관심과 지지가 쏟아졌다. 누구에게나 다 있는 이름도 여성에게는 박하기만 했던 한국 영화에도 ‘변화의 바람’이 불었다. <편집자 주>

올해 한국 영화는 여성 캐릭터가 전면에 나서서 극을 이끄는 작품이 늘어났고, 여배우들의 활약도 돋보였다. (왼쪽부터 시계방향으로) 한지민·김희애·김태리·김혜수·박보영·손예진·문소리·김다미·이나영 / 해당 영화 스틸컷, 그래픽=이선민 기자
올해 한국 영화는 여성 캐릭터가 전면에 나서서 극을 이끄는 작품이 늘어났고, 여배우들의 활약도 돋보였다. (왼쪽부터 시계방향으로) 한지민·김희애·김태리·김혜수·박보영·손예진·문소리·김다미·이나영 / 해당 영화 스틸컷, 그래픽=이선민 기자

[시사위크=이영실 기자] “상대적으로 여성 캐릭터가 주체적으로 활약하는 영화가 적다 보니 이런 캐릭터를 맡을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감사했다. 여성 스태프들이 많은 현장이 보기 드문 곳이 아니라 자주 만날 수 있는 현장이 됐으면 하는 바람이다. 여성 영화인들이 더 나은 환경에서 다양성을 갖고 만들 수 있도록 저 역시 묵묵히 연기를 해내는 배우가 되겠다.”

배우 한지민이 지난 12일 진행된 제19회 올해의 여성영화인상 시상식에서 영화 ‘미쓰백’(감독 이지원)으로 연기상을 수상한 뒤 남긴 소감 중 일부다. 그의 말처럼 최근 한국 상업영화에서 여성 캐릭터가 극의 중심에 서서 활약하는 영화는 많지 않았다. 남성 캐릭터의 조력자거나 성(性)적, 살인 도구로 소비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하지만 올해는 달랐다. 여성 캐릭터가 전면에 나서서 극을 이끄는 영화가 늘어났고, 여배우들의 활약도 돋보였다. 그동안 ‘남성 영화’로 여겨졌던 액션과 범죄부터 사회적 주제를 다룬 묵직한 영화까지 장르도 다양했다. 그리고 관객들은 ‘여성 중심 영화’ 등장에 적극 ‘응답’했다.

◇ ‘리틀 포레스트’부터 ‘국가부도의 날’까지, 충무로에 분 여풍(女風)

올해는 주체적인 여성이 등장하는 여성주의 영화들이 관객들의 많은 사랑을 받았다. ‘리틀 포레스트’·‘소공녀’·‘허스토리’·‘미쓰백’·‘마녀’·‘국가부도의 날’ 등이 그 주인공이다. 먼저 여성 감독이 연출하고 여배우가 원톱 주연을 맡은 ‘리틀 포레스트’(감독 임순례)는 150만 명의 관객을 모으는데 그쳤지만, 저예산 영화로 손익분기점를 훌쩍 넘겼다. 영화 속 주인공인 혜원(김태리 분)은 여성성에 한정되지 않고, 모두가 공감할 수 있는 20대 청춘을 대변하는 인물로 그려져 호평을 받았다.

또 하나의 저예산 영화인 ‘소공녀’(감독 전고운)도 기존에 볼 수 없었던 새로운 유형의 여성 캐릭터를 완성, 젊은 여성 관객들의 열렬한 지지를 받았다. ‘소공녀’는 하루 한 잔의 위스키와 한 모금의 담배 그리고 사랑하는 남자친구만 있다면 더 바라는 것이 없는 3년 차 프로 가사도우미 미소(이솜 분)의 도시 하루살이를 그린 작품. 주인공 미소는 답답한 현실에서도 자신만의 삶이 확고한 주체적인 인물로 그려져 눈길을 끌었다. 이 작품의 각본과 연출을 맡은 전고운 감독은 제27회 부일영화상 신인감독상, 제55회 대종상 영화제 시나리오상과 신인감독상, 제39회 청룡영화상 신인감독상 등을 수상하며 각종 시상식을 휩쓸었다.

여배우 원톱 주연으로 사랑을 받은 (왼쪽부터) ‘리틀 포레스트’·‘소공녀’·‘마녀’ 포스터. /각 영화 배급사 제공
여배우 원톱 주연으로 사랑을 받은 (왼쪽부터) ‘리틀 포레스트’·‘소공녀’·‘마녀’ 포스터. /각 영화 배급사 제공

‘마녀’(감독 박훈정)의 흥행도 눈여겨볼 만하다. 그동안 남성들의 전유물로 여겨졌던 액션물에서 여성 캐릭터를 전면에 내세운 ‘마녀’는 예측할 수 없는 스토리와 새로운 스타일의 액션을 선보이며 관객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국가부도의 날’(감독 최국희)도 국가 부도의 위기를 막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한국은행 통화정책팀 팀장 한시현(김혜수 분)을 여성 캐릭터로 설정해 눈길을 끌었다. 한시현은 보수적인 관료 사회에서 여성에 대한 편견에 맞서 강한 신념과 전문성으로 위기 대응에 앞장서는 인물로 그려져 관객들의 지지를 받았다.

‘허스토리’(감독 민규동)도 빼놓을 수 없다. 남성들의 사관인 ‘히스토리(history)’가 아닌 여성들이 자신의 목소리로 직접 써 내려간 역사 이야기를 전했다. 단순히 과거의 사건으로 지나가는 역사가 아닌 뜨거운 용기로 단 한 번의 역사를 이뤄낸 할머니들과 그들을 위해 애쓴 사람들의 연대와 공감을 진정성 있게 담아내 호평을 받았다.

아동학대 문제를 다룬 ‘미쓰백’도 유의미한 성과를 거뒀다. ‘미쓰백’은 스스로를 지키려다 전과자가 된 백상아(한지민 분)가 세상에 내몰린 자신과 닮은 아이 지은(김시아 분)을 만나면서 그를 지키기 위해 세상과 맞서는 이야기를 담았다. 영화는 두 여성의 우정과 연대를 전하며 깊은 울림을 전한다. 특히 상아는 구조를 기다리기만 하는 무기력한 인물이 아닌 스스로 악을 응징하고, 직접 세상과 맞서 싸우는 주체적 캐릭터로 카타르시스를 선사했다.

◇ 여배우 활약도 빛났다

여배우들의 활약도 돋보였다. 톱배우 김희애와 김혜수를 필두로 한지민, 이나영이 과감한 연기 변신을 선보였고, 김태리는 ‘충무로 신데렐라’에서 원톱 주연 배우 반열에 당당히 올라섰다. 신예 배우 김다미의 등장도 올해 충무로의 ‘값진 발견’으로 꼽힌다. 문소리와 손예진, 박보영도 ‘열일’ 행보로 힘을 보탰다.

김희애는 일본 정부를 상대로 한 수많은 위안부 소송 중 유일하게 일부 승소를 받아낸 재판인 ‘관부 재판’ 실화를 바탕으로 한 영화 ‘허스토리’에서 원고단 단장 문정숙 역을 맡아 열연을 펼쳤다. 개인의 삶은 뒤로한 채 오직 재판을 위해 고군분투하는 문정숙으로 분한 그는 그동안 볼 수 없었던 ‘걸크러시’ 매력을 발산해 눈길을 끌었다. ‘국가부도의 날’ 김혜수도 의지를 굽히지 않는 모습부터 강렬한 카리스마, 절절한 눈물 연기까지 한시현 그 자체로 분해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필모그래피 사상 가장 파격적인 연기 변신을 시도한 한지민(왼쪽)과 이나영. /‘미쓰백’, ‘뷰티풀 데이즈’ 스틸컷
필모그래피 사상 가장 파격적인 연기 변신을 시도한 한지민(왼쪽)과 이나영. /‘미쓰백’, ‘뷰티풀 데이즈’ 스틸컷

한지민과 이나영은 필모그래피 사상 가장 파격적인 연기 변신을 시도해 눈길을 끌었다. 먼저 한지민은 ‘미쓰백’에서 거침없는 말투와 담배를 피워 무는 등 척박하게 살아온 상아의 인생을 고스란히 녹여내 호평을 받았다. 슬픔을 토해내듯 가슴을 두드리며 오열하는 등 깊은 감정 연기도 마음을 흔들었다. 이 작품으로 한지민은 제3회 런던동아시아영화제 여우주연상, 제28회 한국영화평론가협회상 여우주연상, 제39회 청룡영화상 여우주연상, 제19회 올해의 여성영화인상 연기상 등을 수상했다.

이나영도 6년 만에 스크린에 복귀해 이목을 끌었다. 제23회 부산국제영화제 개막작 ‘뷰티풀 데이즈’에서 그는 돈에 팔려 조선족 남편(오광록 분)과 결혼했던 탈북 여성 캐릭터를 연기했다. ‘뷰티풀 데이즈’ 속 이나영은 그동안 보여준 모습과 다른 결의 연기를 선보였다. 10대부터 30대까지 다양한 연령대를 연기하며 한 여성의 고통스러운 삶을 사실적이면서도 담담하게 그려냈다. 그는 이번 작품에 노 개런티 참여해 제작 단계부터 화제를 모으기도 했다.

김태리도 ‘열일’했다. 2016년 박찬욱 감독의 영화 ‘아가씨’로 단숨에 ‘충무로 신데렐라’에 등극한 김태리는 지난해 개봉한 영화 ‘1987’(감독 장준환)에서 진정성 있는 연기력으로 관객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단 두 작품 만에 ‘대세 배우’ 반열에 오른 그는 지난 2월 개봉한 영화 ‘리틀 포레스트’로 연이은 성공을 거두며 원톱 주연배우로서의 가치를 증명해냈다.

‘제2의 김태리’로 불리는 김다미는 1,500대 1의 경쟁률을 뚫고 ‘마녀’ 주인공 자윤 역에 캐스팅됐다. 극중 평범한 고등학생의 순수함과 기억을 잃은 인물의 비밀스러움, 영문도 모른 채 의문의 인물들에게 쫓기는 긴박감을 안정적인 연기력과 자신만의 색깔로 소화해내며 ‘괴물 신인’의 탄생을 알렸다. 이 작품으로 그는 제55회 대종상 영화제, 제39회 청룡영화상에서 신인여우상을 수상해 관심을 모았다.

여성 관객들의 열렬한 지지와 응원을 이끌어낸 ‘미쓰백’(왼쪽)과 ‘허스토리’ 포스터. /리틀빅픽처스, NEW 제공
여성 관객들의 열렬한 지지와 응원을 이끌어낸 ‘미쓰백’(왼쪽)과 ‘허스토리’ 포스터. /리틀빅픽처스, NEW 제공

◇ ‘쓰백러’·‘허스토리언’… 관객이 ‘응답’했다 

여성 배우 원톱 영화라는 이유로 투자에 난항을 겪었던 ‘미쓰백’이 손익분기점을 넘길 수 있었던 것은 ‘관객의 힘’이 컸다. 개봉 당시 적은 상영관 수에도 입소문을 타고 관객을 끌어모았다. 특히 영화에 공감한 여성 관객들을 위주로 형성된 ‘쓰백러(‘미쓰백’ 팬덤)’는 ‘반복 관람’, ‘영혼 보내기’(관람이 힘들 때 표만 사서 몸 대신 영혼을 보낸다) 등과 같은 활동을 SNS를 통해 활발히 펼쳐 힘을 보탰다.

‘쓰백러’ 이전에는 ‘허스토리’의 팬덤 ‘허스토리언’이 있었다. 위안부 관부재판 실화를 다룬 ‘허스토리’는 누적관객수 33만명에 그쳤지만, ‘허스토리언’을 자처하는 젊은 여성 관객의 열렬한 지지로 화제가 됐다. ‘허스토리언’은 대작에 밀려 상영관을 확보하지 못한 ‘허스토리’를 위해 주기적으로 단체 관람 자리를 마련했다. 이 자리에는 민규동 감독과 출연 배우가 참석해 관객과의 대화(GV)를 진행하기도 했다.

여성의 생리를 다룬 다큐멘터리 ‘피의 연대기’ 팬들은 단순한 관람을 넘어 자발적 모금으로 저소득층 여성에게 생리용품을 기부해 이목을 끌었다.

이들은 영화를 단순히 ‘관람하는 것’에만 머무르지 않고 있다. 직접 콘텐츠를 찾아내고, 소비하며 ‘능동적인 주체자’로서 그 역할을 톡톡히 해내고 있다. ‘허스토리언’과 ‘쓰백러’가 보여준 ‘연대’는 한쪽으로 치우친 한국 영화계에 긍정적 변화를 기대하게 만드는 작지만, 의미 있는 발걸음이다.

저작권자 © 시사위크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