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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씨네
[한국영화 속 여성, 이렇게 변했다①] 2018 흥행작 25편, ‘벡델테스트’를 해봤다
2018. 12. 31 by 이영실 기자 swyeong1204@sisaweek.com

올해 한국 사회의 주요한 화두 중 하나는 단연 ‘여성’이었다. 성차별과 성범죄를 고발하는 ‘미투 운동’이 한국 사회 전반을 흔들었고, 이를 시작으로 여성의 권리 및 기회의 평등을 주장하는 페미니즘 운동이 활발하게 진행됐다. 여성들은 거리로 나와 성범죄를 규탄하는 대규모 시위를 벌였고, 출판계에서도 페미니즘 관련 서적들이 큰 인기를 끌었다. 이러한 흐름은 영화계로도 이어졌다. 페미니즘에 대한 기본적인 인식을 바탕으로 주체적인 여성이 등장하는 여성주의 영화들이 다수 등장했고, 이러한 영화들에 대한 관객들의 관심과 지지가 쏟아졌다. 누구에게나 다 있는 이름도 여성에게는 박하기만 했던 한국 영화에도 ‘변화의 바람’이 불었다. <편집자 주>

2018년 흥행작 25편 중 여성주연 작품은 ‘국가부도의 날’ ‘마녀’ ‘너의 결혼식’ ‘협상’ ‘리틀 포레스트’ ‘궁합’ 등 여섯 편이다. /각 영화 배급사 제공, 그래픽=이선민 기자
2018년 흥행작 25편 중 여성주연 작품은 ‘국가부도의 날’ ‘마녀’ ‘너의 결혼식’ ‘협상’ ‘리틀 포레스트’ ‘궁합’ 등 여섯 편이다. /각 영화 배급사 제공, 그래픽=이선민 기자

[시사위크=이영실 기자] 2018년에도 한국 상업영화에는 남성 쏠림 현상이 이어졌다. 범죄·액션 등 거친 남성의 세계를 다룬 영화들이 주를 이뤘고, 많은 영화에서 두 명 혹은 여러 명의 남배우들이 주요 캐릭터로 활약했다. 하지만 변화의 움직임도 보였다. 무기력하게 희생됐던 여성 캐릭터들이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고, 여성 중심 서사를 다룬 영화들도 지난해에 비해 소폭 늘어났다.

올해 1월 1일부터 11월 30일까지 개봉한 한국 상업영화 중에서 흥행 성적 상위 25편(영화진흥위원회 영화관입장권 통합전산망을 기준, 다큐멘터리·애니메이션 제외)을 대상으로 양성(兩性)을 균형 있게 다뤘는지 살펴봤다. 남성 캐릭터 중심의 영화들이 주를 이뤘지만, 긍정적 변화의 흐름도 감지됐다.

‘신과함께-인과 연’·‘안시성’·‘독전’·‘공작’·‘암수살인’·‘그것만이 내 세상’·‘탐정: 리턴즈’·‘목격자’·‘조선명탐정: 흡혈괴마의 비밀’·‘명당’·‘창궐’·‘성난황소’·‘골든슬럼버’·‘사라진 밤’·‘챔피언’ 등이 남성 중심 서사를 담았다. 이 영화들은 남성 원톱 영화이거나 두 명의 남성 캐릭터가 활약하는 투톱 또는 세 명 이상의 남성 주인공이 등장하는 멀티캐스팅 흐름을 보였다.

남성 중심 서사는 아니지만, 남성 배우가 엔딩 크레디트에 먼저 이름을 올린 작품(‘완벽한 타인’·‘곤지암’·‘지금 만나러 갑니다’·‘바람 바람 바람’)까지 모두 합하면 남성주연 작품은 19편에 달했다. 반면 엔딩 크레디트에 여배우가 가장 처음 나온 여성주연 작품은 김다미 주연의 ‘마녀’와 김혜수가 활약한 ‘국가부도의 날’, 박보영의 ‘너의 결혼식’, 손예진의 ‘협상’, 김태리 주연의 ‘리틀 포레스트’, 심은경의 ‘궁합’ 등 여섯 편이었다.

지난해 나문희 주연의 ‘아이 캔 스피크’와 염정아의 ‘장산범’, 그리고 김옥빈의 ‘악녀’ 등 여성 주연작이 세 편이었던 것과 비교하면 세 편이 늘어나, 두 배가 증가했다. /그래픽=이선민 기자
지난해 나문희 주연의 ‘아이 캔 스피크’와 염정아의 ‘장산범’, 그리고 김옥빈의 ‘악녀’ 등 여성 주연작이 세 편이었던 것과 비교하면 세 편이 늘어나, 두 배가 증가했다. /그래픽=이선민 기자 [사용된 이미지 출처:프리픽(Freepik)]

남성 주연작에 비해 턱없이 적은 편수지만, 지난해와 비교하면 나쁘지 않은 성적이다. 지난해 나문희 주연의 ‘아이 캔 스피크’와 염정아의 ‘장산범’, 그리고 김옥빈의 ‘악녀’ 등 여성 주연작이 세 편이었던 것과 비교하면 세 편이 늘어나, 두 배가 증가했다. 12월 개봉해 제외된 영화 ‘도어락’까지 합하면 7편의 여성 주연 작품이 톱25에 들었다.

여배우들이 남배우들과 투톱이나 멀티캐스팅 등으로 활약한 영화들도 좋은 성적을 거뒀다. 남녀 배우들이 고르게 주요 캐릭터로 활약한 ‘완벽한 타인’·‘바람 바람 바람’·‘곤지암’ 등은 색다른 소재와 신선한 구성으로 호평을 받았고, 손예진과 소지섭의 투톱 주연 영화 ‘지금 만나러 갑니다’는 멜로 장르의 힘을 보여줬다.

벡델테스트 결과에서도 변화가 확연히 드러났다. 벡델테스트는 1985년 미국의 여성 만화가 엘리슨 벡델(Alison Bechdel)이 남성 중심 영화가 얼마나 많은지 계량하기 위해 고안한 영화 성(性) 평등 테스트다. 벡델테스트를 통과하려면 ▲이름을 가진 여자가 두 명 이상 나올 것 ▲이들이 서로 대화할 것 ▲대화 내용에 남자와 관련된 것이 아닌 다른 내용이 있을 것 등 세 가지 기준을 만족해야 한다.

이 테스트가 성 평등 인지를 평가하는 절대적 기준이라 할 수는 없지만 영화에 최소한의 젠더 개념이 반영돼있는지 가늠하기 위해 현재까지 꽤 중요하게 활용되고 있다.

‘완벽한 타인’·‘그것만이 내 세상’·‘마녀’·‘국가부도의 날’·‘곤지암’·‘목격자’·‘협상’·‘성난황소’·‘리틀 포레스트’·‘궁합’·‘사라진 밤’·‘바람 바람 바람’·‘챔피언’ 등이 벡델테스트를 통과했다. /그래픽=이선민 기자
‘완벽한 타인’·‘그것만이 내 세상’·‘마녀’·‘국가부도의 날’·‘곤지암’·‘목격자’·‘협상’·‘성난황소’·‘리틀 포레스트’·‘궁합’·‘사라진 밤’·‘바람 바람 바람’·‘챔피언’ 등이 벡델테스트를 통과했다. /그래픽=이선민 기자

지난해 흥행 성적 상위 25편의 한국 상업영화들 중에서 벡델테스트를 통과한 작품은 ‘군함도’·‘아이 캔 스피크’·‘특별시민’·‘장산범’·‘악녀’ 등 단 5편에 불과했다. 그러나 올해는 두 배 이상 늘어나 13편이 세 가지 조건을 모두 통과했다. ‘완벽한 타인’·‘그것만이 내 세상’·‘마녀’·‘국가부도의 날’·‘곤지암’·‘목격자’·‘협상’·‘성난황소’·‘리틀 포레스트’·‘궁합’·‘사라진 밤’·‘바람 바람 바람’·‘챔피언’ 등이 벡델테스트를 통과한 작품들이다.

벡델테스트를 통과한 작품들이 모두 여성 중심적인 영화라고 할 수는 없지만, 여성 원톱 주연 영화 ‘리틀 포레스트’·‘마녀’·‘국가부도의 날’을 제외하고도 이 테스트를 통과한 대부분의 영화들이 여성 캐릭터들을 남성 캐릭터와 동등하게 활약하거나 주체적으로 그려냈다는 점은 눈여겨볼 만하다.

1년 만에 눈에 띄는 변화다. 지난해 남성 쏠림 현상과 함께 이름조차 알 수 없는 많은 여성들이 성(性)적, 살인 도구로만 소비됐던 것과 달리 올해는 주체적인 여성 캐릭터들을 그려낸 작품과 여성주의적 시각을 가진 영화들이 늘어났다. 여배우들의 활약도 덩달아 살아났다. 오랜 시간 ‘여성 캐릭터 기근’에 시달렸던 충무로에 ‘단비’ 같은 한해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