같은 문제가 반복되고 있다. 누군가는 몰래 촬영하고, 누군가는 소비한다. 이 과정에서 누군가는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입는다. 온라인 공간으로 퍼지는 젠더 폭력. 우리는 이것을 ‘디지털 성범죄’라고 부른다. 우리 사회의 디지털 성범죄는 생각보다 자주, 많이 일어나고 있다. 누군가 나를 지켜보고 있다는 두려움. 무엇이 세상을 이렇게 만들었을까. 디지털 성범죄가 사라지지 않는 현실, 이 문제를 해결할 방법은 없는 것일까. [편집자주]

지난해 11월 국회 과학기술정보방송통신위원회는 디지털 성범죄 예산 26억4,500만원을 증액한 방통위 예산안을 의결한 바 있다. 그런데 이 예산은 예산결산특별위원회를 거치며 전액 삭감됐다.
지난해 11월 국회 과학기술정보방송통신위원회는 디지털 성범죄 예산 26억4,500만원을 증액한 방통위 예산안을 의결한 바 있다. 그런데 이 예산은 예산결산특별위원회를 거치며 전액 삭감됐다.

[시사위크=최수진 기자] 디지털 성범죄 피해자의 고통은 올해도 계속될 전망이다. 디지털 성범죄 예산이 삭감된 탓이다. 과학기술정보방송통신위원회에서 확정된 예산이 국회 예산결산특별위원회로 넘어가자 이 같은 결정이 났다. 다만, 이 문제는 부처간 업무 중복에 대한 결과로 해석된다. 실제 여성가족부는 올해 디지털 성범죄 예산이 증액됐다. 그러나 여가부의 예산만으로는 급속도로 확산되는 디지털 성범죄 문제를 해결하기 어려운 만큼 추가 대책이 필요하다는 지적이다.

◇ 방통위 디지털 성범죄 예산 26억원 ‘증발’

지난 7일 여성가족부(이하 여가부)와 경찰청, 방송통신위원회(이하 방통위), 방송통신심의위원회(이하 방심위)는 정부서울청사에서 관계부처 회의를 개최했다. 합동수사를 통해 불법촬영물 유포를 차단하는 등 디지털 성범죄 관련 대응을 논의하기 위해서다. 

그런데, 이날 최창행 여가부 권익증진국장은 모두발언을 통해 예산 삭감에 대한 아쉬움을 드러냈다. 최창행 권익증진국장은 “디지털 성범죄는 사회적으로 중요한 문제가 됐다”면서도 “방통위의 웹하드 모니터링 인력증원 및 관련 예산이 국회 논의 과정에서 반영되지 못했다. 오늘은 디지털 성범죄 예산 현황을 살피기 위한 자리다. 증액 예산 미반영에 대한 대책에 대해 논의할 것”이라고 밝혔다.  

지난해 책정된 방통위의 디지털 성범죄 예산이 전액 삭감된 문제다. 실제 지난해 11월 국회 과학기술정보방송통신위원회는 디지털 성범죄 예산 26억4,500만원을 증액한 방통위 예산안을 의결한 바 있다. 해당 예산은 △불법촬영물 모니터링 조직 강화 △디지털 성범죄 지원 인력 충원 △모니터링 시스템 기술 개선 △전자심의를 통한 상시 심의체계 구축 등에 사용될 예정이었다. 현재 방식으로는 디지털 성범죄 피해자를 지원하는 것에 한계가 있어서다.

그러나 방통위의 계획은 실행되지 못할 것으로 보인다. 국회 예산결산특별위원회(이하 예결특위) 예산안조정소위에서 이 같은 계획을 인정하지 않았다. 심지어 26억4,500만원 전액 삭감됐다. 

◇ 예산 삭감, 여가부와의 ‘업무 중복’ 탓으로 보여 

예결특위 소속 의원 모두가 디지털 성범죄 문제에 적극적인 상황은 아니다. 과거에도 한 차례 디지털 성범죄 예산 계획을 문제 삼은 바 있다. 2017년 11월 예결특위 소속 야당의원들은 여성가족부를 대상으로 진행한 예산심사에서 2018년도 신규로 편성한 ‘디지털 성범죄 대응 및 지원’ 사업 예산을 반대했다. 

여가부는 수사권이 없다는 이유였다. 여가부는 디지털 성범죄 피해자 상담 지원 및 무료 법률서비스 연계, 사후 모니터링 등을 위해 예산을 편성했다. 정부와 여당 의원들은 디지털 성범죄 피해자가 비용을 지불해 불법촬영물을 삭제하는 등 불합리한 구조를 개선해야 한다고 지적했지만 야당 측은 수사권을 가진 경찰에서 문제를 처리하는 것이 옳다는 입장을 보였다. 

야당은 대응주체와 효율성을 지적했다. 2017년 당시 예결특위 소속 김도읍 자유한국당 의원은 “몰카 피해가 엄청나다”며 “수사기관에 가면 빨리 진행된다. 언제 여가부에 상담하고, 경찰서에 찾아가나. 바로 경찰에 수사를 요청하고 절차를 밟아야 한다. 신속히 수사를 진행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야당 의원들의 발언은 비판을 받았다. 피해자가 민간업체에 돈을 지불하며 영상을 삭제하고 있는 상황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발언이라는 지적이 쏟아졌다. 이런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건 수사권을 가진 경찰에서 신속한 수사가 이뤄지지 않기 때문이다. 지난해 경찰청이 전국 모든 총경급 이상을 대상으로 성평등 감수성 향상 교육을 진행하는 등 전 계급에 걸친 교육으로 현장의 인식전환에 나선 것도 이와 맥이 닿아있다. 이에 여가부는 2017년 당시 피해자의 고통을 줄이기 위해 디지털 성범죄 지원 예산을 신규 편성했다.

다만, 지난해 양진호 전 한국미래기술 회장 사건 등으로 디지털 성범죄 근절에 대한 인식은 높아졌다. 이에 예결특위의 결정은 부처 간 업무 중복 문제에 대한 조정일 가능성이 크다. 여가부와 방통위의 디지털 성범죄 피해 지원 업무가 일부 겹치는 탓이다. 지난해 10월 정부가 부처별로 중복된 대책을 마련해 디지털성범죄 관련 센터를 운영하려한 것이 드러난 바 있다. 신용현 바른미래당 의원은 “방심위가 제출한 ‘디지털 성범죄 대응센터’ 계획안을 살펴보니 여가부의 ‘디지털성범죄 피해자 지원센터’와 다수의 업무가 중복된다”며 “타 부처와 의논해 더 나은 조직을 만들 수 있음에도 이처럼 따로 사업을 추진하는 것은 예산 심의 과정에서 중복 사업으로 지적이 나올 것”이라고 지적했다. 

실제 여가부의 경우 올해 디지털 성범죄 관련 예산을 확보한 상태다. 디지털 성범죄 대응 및 지원은 상담원 및 삭제인력의 인건비와 업무관리 시스템 개발비의 반영으로 증액됐다. 실제 올해 편성된 디지털 성범죄 예산은 2017년 대비 9억2,200억원 늘어난 16억6,200억원이다. 

문제는 여가부의 예산만으로는 급격히 확산되고 있는 디지털 성범죄 문제를 신속히 처리하기 어렵다는 점이다. 올해 예산으로 여가부에서 충원할 디지털 성범죄 대응 인원은 10명 수준이다. 지난해 16명에서 올해 26명으로 늘린다. 방통위 예산 삭감에 비판이 제기되는 이유다. 일각에서는 방통위에서 삭감된 예산 규모만큼 디지털 성범죄 컨트롤타워 역할을 하는 여가부에 추가 지원하는 등 추가 대책이 필요하다는 의견을 내놓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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