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어로(hero)를 다룬 이야기는 흥행불패다. 악당과 대적하는 주인공이 고난을 극복하고 정의를 쫓아가는 과정 속에서 대리만족을 얻는다. 여기엔 세상을 향한 일침이 있고, 잠들어있던 인류애를 깨운다. 어쩌면 우린 각박한 현실에서 나를 도와줄 히어로를 기다리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 그는 멀리 있지 않다. 당장 세상을 바꿀 순 없어도 따뜻한 뉴스로 종종 찾아온다. 목숨을 걸고 이웃을 구한 시민 영웅들이다. 모든 이야기의 결론은 ‘함께 살자’는 것이다. 옳고 그름이나 높고 낮음이 없다. 당신도 누군가의 히어로가 될 수 있다. | 편집자주

지성호 나우 대표는 지난 14일 서울 영등포동 나우 사무실에서 시사위크와 만나 “탈북민을 정쟁의 도구가 아니라 민족과 사람의 문제로 봐야 한다”면서 국민들에게는 편견 없는 시선을, 정치인에게는 좀 더 넓은 안목을 가져주길 당부했다. / 나우 제공
지성호 나우 대표는 지난 14일 서울 영등포동 나우 사무실에서 시사위크와 만나 “탈북민을 정쟁의 도구가 아니라 민족과 사람의 문제로 봐야 한다”면서 국민들에게는 편견 없는 시선을, 정치인에게는 좀 더 넓은 안목을 가져주길 당부했다. / 나우 제공

[시사위크=소미연 기자] 북한 주민들에게 탈북은 목숨을 건 모험이다. 한국 땅을 밟기 전까진 아무도 믿을 수가 없다. 제 나라 수령도 몇 십 년째 식량배급 약속을 지키지 못해 배곯아왔던 터다. 두만강을 지키는 군인들도 주민들을 속였다. 눈감아주는 대가로 뒷돈을 챙기고는 탈북 계획을 신고하는 사례가 많아졌다. 서로가 감시 대상이었다. 자칫 보위부에 끌려가기라도 하면 살아서 나올 수 있을지 장담할 수가 없다. 그래서 집을 떠날 때 독약을 챙긴다. 잡히면 죽을 각오에서다. 지성호 나우(NAUH·Now Action Unity for Human right) 대표는 ‘운명’이라고 표현했다.

◇ 목발 짚고 1만km 여정 끝에 찾은 자유의 땅

지성호 대표도 두만강을 건너왔다. 벌써 13년 전이다. 그는 2006년 목발을 짚고 남동생과 함께 탈북했다. 당시를 떠올리며 지성호 대표는 “아찔했다”고 말했다. 두만강만 건너면 한국에서 비행기로 탈북민을 실어 데려가는 줄로만 알았던 것이다. 중국에서 체류하는 동안 걱정이 커졌다. 상엄한 경비에 주중한국대사관으로 가지 못하고 라오스, 미얀마, 태국을 거쳐 한국을 가기로 결정했다. 이때 남동생과 헤어졌다. “둘 중에 한 명은 살아야 한다”는 절박한 마음에서다. 그 시절 형제의 나이는 25세, 21세에 불과했다.

한국으로 가는 길은 멀고 험했다. 지성호 대표는 라오스 정글에서 고비를 맞았다. 그때 “살아남는다면 여생을 북한 주민들의 인권을 위해 바치겠다”고 기도했다. 정말 그랬다. 그는 한국에 정착한 뒤 북한 인권단체 ‘나우’를 설립했다. 북한의 인권문제를 알리는데 국한하지 않고 한반도 통일 이후의 사회 통합을 위한 활동으로 영역을 확대하고 있다. 무엇보다 공들이고 있는 분야는 제3국에서 발이 묶인 탈북 동포들의 구출이다. 2010년 4월 설립된 이래 지금까지 370여명이 나우를 통해 자유를 얻었다.

물론 한국 정착이 녹록하진 않았다. 지성호 대표도 당시 5만원을 제외하고 정착금 전부를 브로커에 줄 수밖에 없었다. 생계비가 나올 때까지 25일을 버티기 위해 최소한으로 생활했다. 제일 힘들었던 것은 금연이다. 지성호 대표는 “담배를 피우고 싶은데 돈은 없고, 길거리에 사람들이 버린 꽁초가 있었지만 줍고 싶지는 않았다. 그때 갈등이 많았다”고 웃으며 말했다. 그는 14세에 담배를 배웠다. 함경북도 회령시의 한 탄광촌에서 태어난 그는 어린 시절부터 달리는 열차에 뛰어올라 석탄을 훔쳤다. 훔친 석탄을 팔아 끼니를 때웠다. 그러다 사고를 당했다. 목숨은 건졌지만 왼다리와 왼손을 잃었다. 주변에서 담배를 권했다. 의약품 대신이었다.

지성호 대표가 탈북을 결심한 것은 사고를 당한 뒤다. 자신을 살리기 위해 애쓴 가족들에게 밥 한 끼 해주고 싶었던 그는 두만강을 건너 교회에서 쌀을 얻어왔다. 하필이면 집에서 쌀밥을 끓이고 있을 때 적발됐다. 보위부에 끌려가 맞았다. 거지꼴로 식량을 구걸해 수령의 권위를 손상시켰다는 이유에서다. 그래서 “시골의 농부집에서 김 메주고 받은 쌀”이라고 항변했다. 그러자 “병신이 나라 망신시켰다”며 구둣발로 목을 짓밟았다. 눈물이 났다. 그 뒤로 “언젠가 탈출해야 겠다”고 생각했다.

북한 인권 개선을 위해 노력해온 지성호 대표는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초대로 지난해 1월과 12월 두 차례에 걸쳐 미국을 다녀왔다. 그는 미국 고위 관료들 앞에서 북한의 인권실태를 증언해 화제를 모은 바 있다.
북한 인권 개선을 위해 노력해온 지성호 대표는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초대로 지난해 1월과 12월 두 차례에 걸쳐 미국을 다녀왔다. 그는 미국 고위 관료들 앞에서 북한의 인권실태를 증언해 화제를 모은 바 있다.

한국에서 힘들 때마다 북한에서 겪은 일들을 떠올렸다. 자신이 겪은 일에 비하면 한국은 고마운 나라였다. 지성호 대표는 “사실 한국 정부에서 나를 받아주지 않을 수 있다는 생각에 걱정이 많았다. 하지만 태국에서 만난 한국대사관 측 사람들은 나에게 ‘환영한다’고 말해줬다. 1만km를 목발을 짚고 온 나에게 인간승리로 치켜세우며 ‘고생했다’고 말해줬다. 그 말에 감동을 받았다”고 설명했다. 국정원에서 신체검사 후에 새 옷과 새 신발을 받고 다시 결심했다. “언젠가 이 감사한 마음을 보답하겠다”고 말이다. 그가 대학을 진학한 이유다.

◇ “탈북자도 국민의 일원, 마음으로 받아줬으면”

지성호 대표는 동국대에서 법학을 전공한 뒤 동대학에서 법학대학원 형사법 석사 과정을 밟고 있다. NGO 대표로서 바쁘게 활동하면서도 학업의 끈을 놓지 않았다. 더 큰 꿈이 있기 때문이다. 그는 “통일이 됐을 때 대한민국 형법 그대로 북한 주민들에게 대입하면 주민 전체가 범죄자가 될 수 있다. 그러면 사회에 혼란을 불러오는 것은 물론 한반도에 어려움이 생길 수 있다”면서 “나는 법을 만드는 사람이 아니다. 다만 내가 쓰는 논문들이 정책 과정에 있는 사람들에게 참고가 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다른 형식의 인권 운동인 셈이다.

이 길의 끝엔 두만강을 건너지 못한 아버지가 있다. 지성호 대표의 부친은 탈북을 시도하다 고문사 당한 것으로 전해졌다. 먼저 두만강을 건넜던 어머니와 여동생, 함께 두만강을 건너온 남동생은 한국에서 다시 만났다. 먼 길을 돌아서 가족이 만났다는 게 기쁜 일이지만 한편으론 마음이 무겁다. 아버지처럼 탈북에 실패하고 목숨을 잃는 사람들이 많다. 지성호 대표는 “많은 사람들 중에 팔다리 없는 내가 두만강을 무사히 건너올 수 있었던 것은 하늘의 다른 뜻이 있지 않겠느냐”고 반문했다. 그는 ‘사명’이라고 표현했다.

지성호 대표는 ‘나우’를 운영하면서 “이미 작은 통일은 이뤘다”고 평가했다. 남북 청년들이 같은 공간에서 근무하고, 통일을 함께 대비하고 있다는 점에서 마음이 하나가 됐다는 것이다. 앞으로가 중요하다. “통합을 배제한 통일은 재앙”이기 때문이다. 그는 “탈북자도 다르지 않다. 피부색이 같고, 같은 언어를 사용한다. 국가가 받아줬지만 우리 국민들이 마음으로 탈북자들을 편견 없이 받아줬으면 좋겠다”면서 “나 역시 대한민국 국민의 일원으로서 최선을 다해 살아가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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