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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진걸이 간다
시사위크-민생경제연구소 공동기획
[안진걸이 간다⑱] 제화공의 끝나지 않은 싸움 “유통수수료 폭리구조 개선돼야”
2019. 02. 15 by 이미정 기자 wkfkal2@sisaweek.com

소처럼 열심히 일했다. 하지만 살림살이는 좀처럼 나아지지 않고 있다. 지갑은 갈수록 얇아지는 듯하다. 도대체 무엇이 잘못된 것일까. ‘민생 경제’ 위기는 단 한가지 원인으로 귀결될 수 없다. 다양한 구조적인 문제들이 거미줄처럼 복잡하게 얽혀있다. 그 중에는 우리 사회에 뿌리내린 각종 불공정한 시스템도 중심축 역할을 한다. <본지>는 시민활동가인 안진걸 민생경제연구소장과 주요 민생 이슈를 살펴보고, 이 구조를 어떻게 바꿔야 할지 고민해보고자 한다. 지금보다 더 나은 삶으로 나아가기 위해 무엇을 생각해야 하고, 무엇이 필요한지 말이다. [편집자주]

지난 13일 오후 6시 서울시 중구 NPO지원센터 1층 대강당에서 열린 ‘족쟁이들’ 다큐 상영회에서 제화지부 관계자를 포함한 참석자들이 백화점 수수료 인하를 촉구하고 있는 모습 / 시사위크

[시사위크=이미정 기자] 이올로(IOLO). 이탈리어로 ‘장인’과 ‘기술자’를 뜻하는 말이다. 이탈리아는 ‘패션의 나라’로 유명한 곳이다. 이름만 들으면 알만한 고가의 명품 브랜드가 즐비한 국가이기도 하다. 이렇게 패션국가로서 명성을 높일 수 있었던 데는 이올로, 즉 장인에 대한 존경과 우대가 자리잡고 있다. 이탈리아 장인이 한 땀 한 땀 공을 들여 만든 구두, 가방, 의류 등은 고가에 전 세계로 팔려나가고 있다. 공장식 제조기술이 빠르게 발전하고 있지만 이탈리아 유명 수제 브랜드는 수작업 공정을 고수하고 있다. ‘장인정신’에서 프리미엄의 가치를 창출하고 있는 것이다.

◇ 말 뿐인 장인정신, 제화공 처우는 외면 

우리나라는 어떨까. 국내 유명 구두회사 중 ‘장인정신’을 내세우고 있는 곳이 적지 않다. 수십 년의 경력의 기술자들이 손으로 한 땀 한 땀 만들었다며 한 켤레에 적게는 수십만원에서 많게는 백만 원 이상의 가격을 책정, 백화점에서 판매하고 있다. 그런데 지난해 정작 장인이라고 칭해지는 숙련 제화공들에게 턱없이 낮은 보수가 지급되고 있다고 알려져 파장을 일으켰다.

지난 13일 오후 6시 서울시 중구 NPO지원센터 1층 대강당에서 열린 ‘족쟁이들’ 다큐 상영회 팻말./시사위크

이른바 ‘탠디사태’로 촉발된 제화공의 열악한 처우 문제는 지난해 불거진 사회적 이슈 중에 하나였다. 탠디 구두를 만드는 제화공들은 “최소한 인간다운 삶을 살게 해달라”며 거리로 나왔다. 서울일반노조 제화지부 탠디분회 조합원들은 “8년째 공임료가 6,500원에 머물러 있다”며 공임료 인상과 처우 개선을 촉구했다. 대부분의 제화공들은 월급제가 아닌 회사가 요구하는 구두 숫자대로 구두를 만들어 돈을 받는 ‘개수임금제’ 형태로 보수를 받아오고 있다.

탠디구두 제화공이 한 켤레에 20만원짜리 구두를 만들었을 때 받는 공임료는 6,500원에 불과했다. 열악한 처우를 받아왔지만 이들은 그간 제대로 항변조차 할 수 없었다. 법적으로 제화공들은 본사 하청업체들과 계약을 맺은 개인 사업자, 즉 특수형태근로종사자다. IMF 금융위기 이후 제화업계는 ‘소사장제’를 도입했다. 이 때문에 이들은 회사와 교섭을 할 수도 없었고, 연차휴가와 4대 보험, 퇴직금 등도 보장받지 못했다. 원청인 본사는 '자신들은 발주사일 뿐'이라며 책임을 미뤘고, 하청업체도 사정은 다르지 않았다.

열악한 하청공장 작업장에서 하루에 15~16시간 근무하는 일이 비일비재했지만 최저임금 수준의 임금을 못 받는 일도 적지 않았다는 게 이들의 한 맺힌 외침이었다. 견디다 못해 거리로 나온 탠디 제화공들은 파업농성을 벌였다. 탠디사태는 제화업계 전반으로 확산됐다. 탠디의 공임료 인상을 시작으로 다른 업체에서도 처우 개선의 바람이 불었다. 실제로 처우 개선과 관련한 소기의 성과도 거뒀다.

하지만 제화공들의 처우 개선 싸움은 아직도 현재진행형이다. 근본적인 문제가 개선되기 위해선, 소사장제 폐지와 대형 유통사의 수수료 폭리 구조가 개선돼야 한다는 게 이들의 입장이다.

지난 13일 오후 6시 서울시 중구 NPO지원센터 1층 대강당에서 열린 ‘족쟁이들’ 다큐 상영회에서도 이같은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족쟁이들’은 제화공들의 1년 투쟁을 기록한 다큐 영화다. 독립 다큐 감독인 문정현 감독이 메가폰을 잡고 제작했다. 

기자는 이날 안진걸 민생경제연구소장과 상영회 시간에 맞춰 이곳을 찾았다. 상영회장에는 제화지부 조합원, 민주노총 서울본부 관계자와 시민활동가 등이 다수 참석했다. 또 이들의 활동을 응원하고 지지해온 연대 노조 관계자 등도 이곳을 찾아왔다.

상영회 직전, 정기만 민주일반연맹 서울일반노조 제화지부장를 강당 한켠에서 만날 수 있었다. 정 지부장도 탠디 하청업체 등에서 30년 이상 구두를 만들어온 제화공이다. 하지만 그는 지부에서 사실상 막내나 마찬가지라고 설명했다.

정기만 민주일반연맹 서울일반노조 제화지부장이 소사장제 철폐와 유통수수료 구조 개선을 요구했다. /시사위크

정 지부장은 “제화공 대부분은 경력이 40~50년 가까이 된다”며 “그분들과 비교하면 저는 막내 축에 속한다”고 말했다. 하지만 오랜 경력을 쌓아도 숙련공들의 처우는 그야말로 처참한 수준이라고 설명했다. 정 지부장은 “사실 탠디의 경우, 업계에서는 그나마 사정이 나은 편이라고 평가받던 곳이었다”며 “8년 정도 공임료를 동결해왔지만 그래도 그 전에는 조금씩이라도 올려왔다”고 설명했다.

◇ 소사장제의 그늘,  항변 못하는 제화공 

그의 설명에 따르면, 구두제조업 운집 지역인 성수동 내 소규모 사업장의 공임료는 평균 5,000~6,000원에 그쳤다. 20년간 공임료가 동결된 곳도 있었다. 지난해 제화노동자들이 치열한 농성을 벌인 끝에, 공임료 인상과 처우 개선이 논의되는 결실이 있었지만 아직도 갈 길이 멀다는 게 그의 말이다.

정 지부장은 우선 노동환경을 왜곡시킨 ‘소사장제’부터 폐지돼야 한다고 지적했다. 그는 “사실 외환위기 전에는 제화공의 처우가 그렇게 나쁜 편은 아니었다”며 “그런데 IMF 후 소사장제가 업계에 도입된 후, 노동착취 구조가 생겨났다. 낮은 보수와 열악한 처우, 갑질 등에 쉴새 없이 노출됐지만 법적 노동자가 아니라는 이유로 제대로 항변조차 할 수 없었다. 원청인 본사에 문제를 제기하면 ‘협력사와 얘기하라’는 답변만 받을 뿐이었다. 하청업체는 경영난을 이유로 대며 제화공의 문제를 외면했다”고 토로했다.

이에 정 지부장은 노동자로서 제대로 된 지위를 누릴 수 있도록 고용 형태부터 개선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원청의 직접고용이 어렵다면 최소한 하청업체를 통한 간접 고용이라도 돼야 한다는 설명이다.

또 그는 근본적 원인인 대형 유통사 ‘수수료폭리 구조’의 개선도 필요하다고 힘주어 말했다. 제화공들은 공임료가 십수년간 오르지 않았던 데는 유통사의 폭리구조가 배경에 자리잡고 있다고 주장해왔다.

◇ 재벌유통사, 진짜 갑이 나서야  

정 지부장의 설명에 따르면, 30만 원짜리 구두 한 켤레가 백화점에서 판매될 경우 회사는 입점 수수료로만 33~33%를 떼가고 있다. 여기에 본사와 위탁판매사업자 이익을 제하고 나면 하청업체에는 해당 소비자가격의 20% 안팎의 이익이 떨어진다. 하청업체는 여기서 본인들의 이익을 제하고 제화공에 공임료를 지불하고 있다. 정 지부장은 “유통구조에서 절대 ‘갑’은 유통사가 될 수밖에 없는 구조”라며 “유통사들이 스스로 수수료 구조를 개선해 합리적인 임금 구조가 정착될 수 있도록 나서야 한다”고 주장했다.

안진걸 민생경제연구소장이 이날 다큐상영회에 참석해 피켓을 들고 있는 모습. /시사위크

안진걸 민생경제연구소장의 의견도 같았다. 안 소장은 “유통사 수수료 구조 개선이 필요하다”며 “위에서부터 개선이 이뤄지지 않으면 제화공들의 근본 문제는 바뀌지 않을 것”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다큐상영회가 끝난 후 참석자 전원은 ‘소사장제 철폐’와 ‘유통수수료 개선’이 적힌 손팻말을 들고 구호를 외쳤다. 제화지부는 올해 유통수수료 구조 개선에 집중하겠다는 계획이다.

이날 다큐 영상에는 제화공들의 노동 환경이 고스란히 담겼다. 시끄러운 소음이 울려 퍼지는 좁은 작업장에서 이들은 쉴 새 없이 손을 움직였다. 그리고 그들 주변에는 온갖 화학약품 더미가 어지럽게 펼쳐져 있었다. 이 영상에서 한 제화공은 자신의 거친 손을 보이며 “남들한테 손을 내보이기가 부끄럽다”고 말했다. 치열한 노동의 흔적은 부끄러울 일이 아니다. 진짜 부끄러운 것은 이들을 외면해온 우리 사회가 아닌지 들여다볼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