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위크-민생경제연구소 공동기획

소처럼 열심히 일했다. 하지만 살림살이는 좀처럼 나아지지 않고 있다. 지갑은 갈수록 얇아지는 듯하다. 도대체 무엇이 잘못된 것일까. ‘민생 경제’ 위기는 단 한가지 원인으로 귀결될 수 없다. 다양한 구조적인 문제들이 거미줄처럼 복잡하게 얽혀있다. 그 중에는 우리 사회에 뿌리내린 각종 불공정한 시스템도 중심축 역할을 한다. <본지>는 시민활동가인 안진걸 민생경제연구소장과 주요 민생 이슈를 살펴보고, 이 구조를 어떻게 바꿔야 할지 고민해보고자 한다. 지금보다 더 나은 삶으로 나아가기 위해 무엇을 생각해야 하고, 무엇이 필요한지 말이다. [편집자주]

사무금융 노사가 손을 잡고 사회연대기금을 조성해 비정규직 격차 해소에 나서고 있어 이목을 집중시키고 있다. 사진은 지난해 4월 서울 중구 프레스센터에서 열린 불평등·양극화 해소를 위한 사무금융 노·사 사회연대기금 선포식. /뉴시스

[시사위크=이미정 기자] 지난해 우리나라는 1인당 국민총소득(GNI) 3만달러 시대를 맞이했다. 경제 지표만 보면 어엿한 ‘선진국가’에 진입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어쩐지, 국민들은 이를 체감하기 어렵다는 평가가 나온다. 갈수록 벌어지는 소득 격차와 고용 불안 상황이 국민의 체감 경기를 얼어붙게 하고 있다는 지적이다.

◇ 노동 이중구조의 부작용  

실제로 소득 양극화는 심화되고 있다. 통계청이 지난 2월 공개한 ‘가계동향조사’에 따르면, 소득 하위 20%인 소득 1분위 가구의 작년 4분기 월평균 소득은 123만8,000원으로 1년 전보다 17.7% 줄어들었다. 반면 같은 기간 소득 상위 20%(5분위) 가구의 소득은 932만4,000원으로 전년에 비해 10.4% 늘어났다. 이에 소득의 빈부격차를 나타내는 ‘균등화 처분가능소득 5분위 배율’은 1년 전보다 0.86배 더 벌어진 5.47배로 나타났다. 이는 관련 통계 집계가 시작된 2003년 이후 가장 나빠진 수치다.

소득 양극화는 사회 구조적인 문제에서 기인한다. 특히 정규직과 비정규직 격차 등 노동시장의 이중구조 심화가 그 원인 중 하나로 지목돼왔다. 문재인 정부는 이 같은 고용 시장 불균형 해소에 강한 드라이브를 걸고 있다. 다만 정부의 의욕만으로 해결되기 쉽지 않은 과제다. 기업, 노동자 등 다양한 이해관계자들의 노력이 함께 필요하다.

이런 가운데 최근 노동계 일각에서 의미 있는 사회연대 실험이 이뤄지고 있다. 바로 사무금융서비스노조가 추진하고 있는 ‘우분투 운동’이다. 우분투(Ubuntu)는 ‘네가 있어 내가 있다’는 의미의 아프리카 코사족 말로, 공동체와 연대 정신을 상징한다. 사무금융노조는 불평등·양극화 해소를 위해 노사가 함께 사회연대기금을 마련하는 프로젝트를 지난해부터 추진했다. 그 결실로 지난 1월 ‘사무금융우분투재단’이 공식 출범했다.

이 재단은 △비정규직 차별과 격차 시정 △미취업 청년·취약계층 보호 △퇴직자의 전직·재취업 및 창업지원 등 불평등과 양극화 해소를 위한 사업을 중점 추진하는데 목적을 두고 있다. 이를 위해 재단은 2020년까지 3년간 600억원의 사회연대기금을 조성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지난해 8월 KB증권 노사가 2020년까지 기금을 출연하기로 약정한 것을 시작으로 애큐온저축은행, 교보증권, 하나외환카드, 신한생명, 비씨카드, 한국예탁결제원, KB캐피탈, 한국증권금융, 더케이손해보험, 한국교직원공제회 등이 잇따라 참여했다. 현재까지 약 80억원의 기금이 약정된 상태다.

최근 사무금융우분투재단이 첫 사업을 시행했다. 우선 비정규직·양극화 해소를 위한 사업 아이디어 공모가 이뤄졌다.

김현정 사무금융노조위원장(왼쪽)과 안진걸 민생경제연구소장은 우분투 재단 출범이 노동계는 물론 사회 전반의 양극화에 관심을 환기시킬 것으로 기대했다. /시사위크

이 같은 프로젝트가 현실화되기까지 사무금융노조는 지난 1년을 치열하게 발로 뛰었다. 지난 2일 김현정 사무금융노조위원장은 “차근차근 노사 설득 과정을 밟아나간 결과물”이라고 설명했다. 이날 기자는 안진걸 민생경제연구소장과 함께 서울 마포구에 위치한 사무금융노조 사무실을 찾아 김 위원장을 만났다.

사무금융노조는 증권·보험·카드 등 사무금융서비스 노동자들로 구성됐다. 산하 지부는 80여개에 달한다. 김 위원장은 지난해 초부터 ‘우분투 프로젝트’를 추진하며 일일이 각 지부와 사측을 만나 대화와 설득 과정을 진행했다. 그 결과 사무금융 노사는 지난해 6월 첫 중앙산별중앙교섭을 통해 사회연대기금 조성을 큰 틀에서 합의했다. 

◇ 사무금융노조, 사측과 손잡고 양극화 해소  

‘우분투 프로젝트’를 시작하게 된 계기를 묻자 김 위원장의 표정이 이내 진지해졌다. 김 위원장은 “사무금융 노동자는 이른바 ‘넥타이부대’로 불리며 민주항쟁 등 역사의 변곡점마다 역할을 해왔다. 노조는 2017년 ‘87년 6월 항쟁’ 30주년을 맞아 지난 과거를 돌아보면서 앞으로 나아가야 할 30년의 방향에 대해 고민했다”며 “그 결과 우리 사회를 관통하고 있는 가장 큰 문제가 ‘불평등’이라는 답을 얻어냈다”고 말했다. 이런 불평등 문제의 핵심에는 차별적인 노동구조가 자리 잡고 있다는 게 그의 생각이었다.

김 위원장은 “외환위기를 거치면서 비정규직이 양산되고 사회적 양극화가 심화됐다”며 “노동자는 정규직과 비정규직, 또는 원청과 하청 노동자로 나눠졌고 기업은 대기업과 중소기업으로 나눠져 격차가 극심해졌다”고 진단했다. 이 같은 양극화 속에서 노동계 역시 비판여론에 시달리기도 했다. 정규직을 중심으로 한 노동운동을 통해 ‘제 밥그릇 챙기기’에만 급급하다는 지적이 바로 그것이다.

김 위원장은 “정규직 직원들의 임금이 높아질수록 비정규직 직원들이 그만큼 저임금에 시달리는 게 현 구조의 문제”라며 “저임금 노동자의 근무구조가 개선되지 않는다면 소득 양극화 문제는 쉽게 해소될 수 없다”고 지적했다.

이에 김 위원장은 단순히 구호로만 ‘비정규직 철폐’를 외치는 것을 넘어 보다 실질적인 사회운동이 필요하다고 판단했다. 이 같은 생각은 ‘우분투프로젝트’ 추진의 시작점이 됐다.

◇ 노동계에도 변화 메시지 줄까  

김 위원장은 노사의 사회연대가 금융권에 대한 인식도 제고할 수 있을 것으로 봤다. 김 위원장은 “사무금융산업은 국민경제 전반을 움직이는 경제의 혈액으로 불리고 있지만 최근 ‘이윤만을 추구하는 집단’이라는 부정적인 이미지가 심화되고 있다”며 “우분투 프로젝트를 통해 금융기업은 물론, 노조 집단에 대한 이미지도 개선할 수 있을 것으로 판단했다. 지난해 사업 추진 과정에서 지부와 사측에 이런 내용을 적극적으로 알렸다”고 설명했다. 이런 설득 작업이  결실을 맺으면서 우분투 재단이 첫발을 내딛게 됐다.

김현정 사무금융노조위원장은 2일 본지와의 인터뷰에서 "우분투 운동이 다른 업권에도 퍼져나가갈 바란다"며 "올해 이를 위해 재단을 제대로 운영시키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시사위크

양극화 해소 시도는 비단 재단 설립에만 그치지 않았다. 사무금융노조는 1월 정기 대의원대회에서 비정규직 노동자의 정규직 전환을 조건으로 임금 인상을 양보하는 방안을 추진하기로 했다.

노조는 2019년 임금인상 요구 기준으로 경제성장률(2.7%)과 물가상승률(1.7%)을 합산해 4.4%+a를 제시했다. 다만 노조가 사측에 임금 인상과 함께 비정규직의 정규직 전환을 요구할 경우 임금인상 요구안을 ‘물가상승률+α’로 할 수 있도록 했다. 물가 상승을 반영한 실질임금을 사실상 동결할 수 있게 한 것. 이 안건이 정기 대의원대회에서 통과될 수 있었던 것에 대해 김 위원장은 “지난해 우분투 프로젝트를 추진하면서 비정규직의 문제에 대한 어느 정도 공감대가 형성된 것이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본다”고 말했다.

시민운동가인 안진걸 소장은 이 같은 시도가 노동계에도 상당한 메시지를 줄 것으로 내다봤다. 안 소장은 “시민사회단체는 그간 노동자와 연대운동을 해왔다”며 “다만 그 와중에 일부 노동계에서 자기 이득을 챙기는 사이, 사회적 약자에 다소 소홀한 모습도 보여 왔다. 이해가 가면서도 한편으로 실망스런 마음은 어쩔 수 없었다. 사무금융노조의 ‘우분투 운동’은 노조의 신뢰를 높였을 뿐 아니라, 감동도 주고 있다”고 말했다.  

◇ "다른 업권에도 퍼지길 기대한다" 

김현정 위원장과 안진걸 소장이 우분투 재단 출범 의미를 담은 팻말을 들고 있다. /시사위크

정치권에서도 ‘우분투 재단’에 대한 기대를 드러낸 바 있다. 지난해 11월 29일 국회 의원회관에서 열린 ‘사무금융 우분투재단’ 출범 토론회에서 이해찬 더불어민주당 대표는 “사회 양극화 구조에서 대형 노조가 사회공헌을 시작하는 첫 번째 사례이자, 공동체를 향해 내딛는 첫 발”이라면서 “그간 노조라고 하면 파업이나 머리띠 같은 모습만 국민에 전해졌는데, 이렇게 우분투라는 사회공헌재단이 출범하게 돼 감동을 주고 있다”고 언급했다.

김 위원장은 우분투재단이 사업 아이디어 공모를 시작으로 본격적인 활동에 나설 것이라고 밝혔다. 우분투재단은 우선 5개 분야를 나눠 21개 사업을 추진할 계획이다. 비정규직 보호를 위한 연구 실태 조사 △장학사업 △포용적 금융지원 사업 △ 비정규직 해결에 앞장선 노사, 단체 후원 △ 취약계층 지원 방안 등이다. 사업 아이디어 공모를 통해 접수된 의견도 반영할 방침이다. 

김 위원장은 “또 다른 업권에서 사회연대 시도가 이뤄지길 바란다”며 “우분투재단은 이를 위한 마중물 역할을 하기 위해 노력할 방침”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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