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세현 전 통일부 장관은 지난 4일 강원도 원주에서 서울까지 2시간여 동안 ‘시사위크’와 동승 인터뷰를 가졌다. 그는 이 자리에서 문재인 대통령의 역할론을 강조했다. / 소미연 기자
정세현 전 통일부 장관은 지난 4일 강원도 원주에서 서울까지 2시간여 동안 ‘시사위크’와 동승 인터뷰에 응했다. 그는 이 자리에서 문재인 대통령의 역할론을 강조했다. 사진은 이틀 뒤인 6일 강북구에서 마련한 인문학 강의에 나선 모습이다.
/ 소미연 기자

[시사위크=소미연 기자] 정세현 전 통일부 장관은 문재인 대통령을 걱정했다. 한반도 평화를 좌우할 북미 비핵화 협상 과정에서 한쪽은 ‘수석협상가’로 띄우고, 다른 한쪽은 북한 측 ‘수석대변인’으로 깎아내리고 있다는데 문재인 대통령의 고민을 헤아렸다. 그는 “현 국면에서 대통령이 소극적으로 바뀌면 안 된다”고 말했다. 다시 말해 “대통령의 발목을 잡으면 안 된다”는 얘기다.

정세현 전 장관은 “이명박·박근혜 정부에서 남북관계가 끊어진 뒤 북한에 대한 우리의 영향력이나 발언권이 없어진 상태에서 북핵 문제가 커졌다”면서 “여기서 중재자 역할을 한다는 것은 굉장히 어려운 일”이라고 설명했다. 김대중·노무현 정부에서 통일부 장관을 지낸 그는 “그때만 해도 북핵 문제가 이렇게 복잡하지 않았다”며 남북관계가 멀어졌던 지난 9년의 시간을 안타까워했다.

정세현 전 장관은 오는 11일 예정된 한미정상회담에 대해 김정은 국무의원장이 ‘새로운 길’로 가지 않도록 트럼프 대통령이 신호를 보낸 것이라고 해석했다. / 소미연 기자
정세현 전 장관은 오는 11일 예정된 한미정상회담에 대해 김정은 국무의원장이 ‘새로운 길’로 가지 않도록 트럼프 대통령이 신호를 보낸 것이라고 해석했다. / 소미연 기자

◇ “트럼프의 야심이 판 안 깬다”

하지만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의 비핵화 의지에 대해선 의심하지 않았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김정은 위원장을 만났다는 게 믿음의 근거다. 주목한 것은 올해 김정은 위원장의 신년사다.

“김정은 위원장이 전제 조건과 대가 없이 개성공단과 금강산 관광을 재개할 의사가 있다고 밝혔다. 그동안 미국과 물밑 접촉을 많이 해왔다는 것으로 풀이된다. 사전 교감 없이 무조건 때를 쓰는 차원에서 꺼낸 얘기가 아니라는 것이다. 최고 존엄의 말이 실현이 안 되면 얼마나 망신스럽겠는가. 그 사람들도 믿는 구석이 있어야 한다. 실제 그렇게 만들었다. 그런데 올해 2월 하노이 회담에서 뒤통수를 때린 게 아닌가.”

정세현 전 장관은 역으로 물었다. “트럼프 대통령의 진정성은 믿을 수 있겠느냐”는 것이다. 그는 “북핵 문제를 해결하면 재선 성공은 물론 노벨상도 받을 수 있다는 점에서, 트럼프 대통령의 정치적 야심이 판을 깨지 않을 것”으로 판단했다. 다만 “양측의 의도와 관계없이 시간을 끌다보면 흐지부지될 수 있다”고 봤다. 다시 원점이다. 정세현 전 장관은 “중재자로서 문재인 대통령의 힘이 떨어지면 안 된다”고 말했다.

인터뷰는 지난 4일 강원도 원주에서 서울까지 99km를 달리는 차량에서 진행됐다. 한미정상회담을 앞둔 터라 정세현 전 장관의 목소리에는 기대감이 실렸다. 회담이 성사된 배경과 시점을 생각해볼 때, 트럼프 대통령이 김정은 위원장에게 보내는 ‘신호’로 해석됐다. 3차 북미정상회담 개최 가능성을 열어둔 것. 김정은 위원장이 언급한 ‘새로운 길’을 가지 말라는 의미다.

“김정은 위원장이 러시아와 정상회담을 추진하고 있다. 북미의 핵 협상에 러시아를 끌어들이는 것, 이것이 바로 김정은 위원장이 말한 새로운 길이다. 이렇게 되면 상황이 복잡해진다. 북한이 핵 보유국끼리 회담을 갖자고 욕심을 낼 수도 있다. 결국 상호주의 원칙에 따라 미국도 핵무기를 내놔야 할지도 모른다. 판이 더 커지기 전에 문재인 대통령에게 힘을 실어줘야 한다는 계산을 트럼프 대통령이 하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정세현 전 장관은 남북관계를 방해하는 세력을 ‘원심력’으로 비유하며 “통일의 구심력을 키워야 한다”고 강조했다. / 소미연 기자
정세현 전 장관은 남북관계를 방해하는 세력을 ‘원심력’으로 비유하며 “통일의 구심력을 키워야 한다”고 강조했다. / 소미연 기자

◇ “가짜뉴스에 속으면 안 된다”

한미정상회담이 열리는 오는 11일 북한에선 최고인민회의가 열린다. 이날 김정은 위원장이 새로운 길을 공식 채택할 가능성이 높다는 관측이 우세한 상황에서, 이를 막기 위한 트럼프 대통령의 묘수는 정세현 전 장관의 감탄을 이끌어냈다. 그는 “트럼프 대통령이 회담에서 문재인 대통령에게 어떤 선물을 줄지 모르지만 북한에서도 주목할 수밖에 없지 않겠느냐”고 말했다.

결국 개성공단과 금강산 관광사업 재개에 관심이 쏠릴 수밖에 없다. 정세현 전 장관도 “이번 회담에서 메시지가 안 나오면 안 된다”고 말했다. 그래야 김정은 위원장의 서울 답방의 길도 뚫린다. 일단 분위기는 좋다. 김정은 위원장이 지난해 12월 문재인 대통령에게 친서를 보내며 평양 남북정상회담 당시 약속한 서울 답방을 지키지 못한데 대해 미안한 마음을 표현한 바 있다. 이에 대해 정세현 전 장관은 “김정은 위원장이 약속을 지키겠다는 뜻”이라면서 “서울 답방은 시기의 문제”라고 설명했다.

앞으로 남북관계 발전에 중요한 것은 국민 여론이다. 정세현 전 장관은 남북관계를 방해하는 세력을 ‘원심력’으로 비유하며 “통일의 구심력을 키워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이날 상지대학교에서 열린 <통일시대를 대비한 전문가 초청특강>에서도 통일의 필요성을 언급하며 “가성비가 높은 사업이 바로 대북지원인데, 분단된 상태에서 구축된 기득권이 유지되길 원하는 세력들에 의해 가짜뉴스가 만들어지고 있다”고 지적했다.

“대북지원에 ‘퍼주기’라는 나쁜 딱지가 붙여졌다. 쌀과 비료를 주면 현금화해서 무기를 개발한다는 말이 상식적으로 이해가 되는 얘기인가. 수송비가 더 드는 일이다. 김정은 위원장은 지난해 4월 판문점 도보다리에서 문재인 대통령에게 미국이 불가침을 약속해주면 우리가 왜 핵을 가지고 어렵게 살겠느냐고 말했다더라. 그러면서 꺼낸 말이 경제적으로 잘 살기 위해 핵을 내려놓겠다고 했다. 이때를 놓치면 안 된다.”

정세현 전 장관은 북한을 동아시아의 블루오션으로 강조한 뒤 남북 통일 이후 한국의 경제 성장에 대한 미국 투자전문가들의 전망을 설명했다. / 상지대 교육대학 제공
정세현 전 장관은 북한을 동아시아의 블루오션으로 강조한 뒤 남북 통일 이후 한국의 경제 성장에 대한 미국 투자전문가들의 전망을 설명했다. / 상지대 교양대학 제공

◇ “문재인 발목 잡으면 안 된다” 

그렇다면, 트럼프 대통령은 왜 서두르지 않는가. 정세현 전 장관은 워싱턴의 기득권 세력과 군산복합체의 먹이사슬을 북미 비핵화 협상이 더딘 이유로 꼽았다. “이들의 무기시장이 없어지면 밥그릇이 줄어들고 일자리가 없어지기 때문에 발목을 잡고 있다”는 게 그의 설명이다. 하지만 이 역시 시기의 문제다. 워싱턴 정가에서 존경하는 역대 대통령들도 비핵화 문제를 해결하지 못했다는 점에서, 트럼트 대통령에겐 업적을 세울 기회이기 때문이다.

“지난해 3월 대북특사로 다녀온 정의용 국가안보실장과 서훈 국가정보원장이 김정은 위원장의 메시지를 문재인 대통령에게 보고한 뒤 곧바로 미국으로 건너가 트럼프 대통령에게 전달했다. 그 자리에서 트럼프 대통령이 김정은 위원장과 회담을 결정하자, 당시 배석한 참모들이 성급한 결정을 만류했다. 이때 트럼프 대통령이 ‘지난 25년간 북핵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 것은 당신들 때문이다. 나는 내 방식대로 한다’고 말했다.”

물론 지난 2월 하노이 북미정상회담은 결렬됐다. 당시 트럼프 대통령은 노딜(no deal)을 선택했다. 이에 대해 정세현 전 장관은 마이클 코언 청문회가 워싱턴 정세와 뉴스 헤드라인을 장악하자 “판을 깨야만 뉴스의 중심에 설 수 있다고 판단한 것 같다”고 해석했다. 외부 요인으로 인한 핵 협상 연기라는 것. 그런 점에서 문재인 대통령과 트럼프 대통령의 회담은 협상 재개를 알리는 것과 같다. 그가 문재인 대통령의 역할론을 거듭 강조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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