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어로(hero)를 다룬 이야기는 흥행불패다. 악당과 대적하는 주인공이 고난을 극복하고 정의를 쫓아가는 과정 속에서 대리만족을 얻는다. 여기엔 세상을 향한 일침이 있고, 잠들어있던 인류애를 깨운다. 어쩌면 우린 각박한 현실에서 나를 도와줄 히어로를 기다리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 그는 멀리 있지 않다. 당장 세상을 바꿀 순 없어도 따뜻한 뉴스로 종종 찾아온다. 목숨을 걸고 이웃을 구한 시민 영웅들이다. 모든 이야기의 결론은 ‘함께 살자’는 것이다. 옳고 그름이나 높고 낮음이 없다. 당신도 누군가의 히어로가 될 수 있다. | 편집자주

‘문재인 구두’로 화제를 모은 수제화 브랜드 아지오의 유석영 대표. 자신도 시각장애인 1급이지만 청각장애인들의 일자리를 책임지고 있다. / 소미연 기자
‘문재인 구두’로 화제를 모은 수제화 브랜드 아지오의 유석영 대표. 자신도 시각장애인 1급이지만 청각장애인들의 일자리를 책임지고 있다. / 소미연 기자

[시사위크|성남=소미연 기자] 구두를 처음 만들어 팔기 시작했을 땐 사회적 편견에 부딪혀야 했다. 장애인이 만든 구두에 고객들의 신뢰가 없었던 탓이다. 결국 경영난을 이기지 못하고 폐업했다. 다시 시작하기로 결심했을 땐 주변의 막연한 기대에 진땀을 뺐다. 이른바 ‘문재인 구두’로 정평이 난 뒤라 잘 팔리지 않겠느냐는 얘기가 많았다. 하지만 현실은 다르다. 고객의 구매 결정을 이끌어내는 일이 생각처럼 쉬운 게 아니다. 그래서 더 열심히 일해야 한다. 유석영 아지오(AGIO) 대표의 말이다.

아지오는 얼만 전 재개업 이후 처음으로 직원들의 연말정산을 했다. 그 모습을 보고 “정말 뿌듯했다”는 유석영 대표는 “지금도 창업의 과정에 있다. 안정기에 들어서려면 앞으로 1년 이상 노력하는 시간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 아지오 제공
아지오는 얼만 전 재개업 이후 처음으로 직원들의 연말정산을 했다. 그 모습을 보고 “정말 뿌듯했다”는 유석영 대표는 “지금도 창업의 과정에 있다. 안정기에 들어서려면 앞으로 1년 이상 노력하는 시간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 아지오 제공

유석영 대표가 이끌고 있는 아지오는 사회적협동조합 ‘구두 만드는 풍경’에서 만든 수제화 브랜드다. 2017년 11월 창립총회를 가진 뒤 이듬해 2월부터 문을 열었다. ‘문재인 구두’로 화제가 된지 약 9개월 만이다. 당시 거액의 출자를 제안하거나 협업을 권유하는 대기업들도 있었지만 모두 거절하고 국민들의 힘을 빌렸다. 국민 펀드 2억여원과 조합원들의 투자금으로 지금의 공장을 세웠다. 유석영 대표는 “지난해 펀드 절반가량을 갚았고, 나머지는 올해 벌어서 또 갚을 것”이라고 말했다.

◇ ‘문재인 구두’ 화제 이후 뒷얘기

재개업 이후 1년 동안 적지 않은 성과도 이뤘다. 당장 직원이 7명에서 17명으로 늘었다. 이중 12명이 장애를 갖고 있다. 시각장애인 1급인 유석영 대표를 포함해 청각장애인(10명)과 지체장애인(1명)이 근무 중이다. 이 기간 구두를 만드는 직원들의 기술력도 성장했다. 여기서 유석영 대표는 자부심을 가졌다. 그는 “우리가 특수신발을 만드는 것은 아니지만, 맞춤형 신발인 만큼 한 번이라도 더 손으로 만진다는 점에서 품질이 우수하다”고 강조했다. 아지오의 슬로건이 바로 ‘친구보다 더 좋은 구두’다.

하지만 유석영 대표가 첫손에 꼽는 성과는 우리 브랜드가 흔들리지 않았다는 것이다. 한 차례 폐업을 겪은 그에겐 단발성으로 큰돈을 버는 것보다 사업을 유지하는 게 더 중요했다. 다시 문을 열기로 결심하는데 시간이 오래 걸린 이유다. 알려진 바에 따르면, 문재인 대통령은 취임 직후 구두를 구입하기 위해 유석영 대표를 찾았다. 그때 구두를 납품했다면 소위 대박이 났을 터다. 하지만 포기했다. “청각장애인의 손을 거치지 않으면 아지오의 가치를 담을 수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유석영 대표가 경기도 파주시에서 복지관장을 맡았을 때다. 당시 청각장애인들을 위한 직업훈련 프로그램을 진행했는데 참여가 저조했다. 이유는 처참했다. 청각장애인들이 복지관에 오갈 만큼의 형편도 되지 않았던 것. 당시를 떠올리던 유석영 대표는 “시각장애를 갖게 된 뒤 가장 불행한 사람이 시각장애인이라 생각했는데, 청각장애인들은 더 열악한 환경에 놓여있었다”면서 “장애인도 같이 잘 살아보자는 각오에서 아지오를 시작했던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지난 3일 <시사위크>와 만난 자리에서 이렇게 말했다.

‘문재인 구두’로 처음 이름을 알리게 된 것은 2017년 5월이었다. 문재인 대통령이 광주 5·18 국립묘지를 참배하는 과정에서 보여진 닳고 해진 구두 밑창이 화제가 됐다. 유석영 대표는 지난 2월 문재인 대통령이 온라인으로 주문한 구두를 전달하며 “지구 곳곳에서 나라의 위상을 높여 달라”고 말했다. / 아지오 제공
‘문재인 구두’로 처음 이름을 알리게 된 것은 2017년 5월이었다. 문재인 대통령이 광주 5·18 국립묘지를 참배할 때 신었던 구두의 낡은 밑창이 화제가 됐다. 유석영 대표는 지난 2월 문재인 대통령이 온라인으로 주문한 구두를 전달하며 “지구 곳곳에서 나라의 위상을 높여 달라”고 말했다. / 아지오 제공

“처음부터 눈이 나쁜 것은 아니었다. 차츰 시력을 잃었다. 꿈이 없어지면서 극심한 방황의 시절을 보냈다. 그런데 방황을 끝내고 돌아와서 더 힘들었다. 일터가 없더라. 월요일 아침이 괴로웠다. 갈 때도 없었고, 오라는 사람도 없었다. 그때 겪었던 아픈 감정이 지금도 남아있다. 장애인들의 일자리를 만드는데 관심을 지속해온 것도 이 때문이다. 장애인들도 일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다.”

유석영 대표가 고집스럽게 지켜낸 아지오의 가치는 국민들의 박수를 받았다. 지난 2월 제8기 국민추천포상 수여식에서 포장 수상자로 선정됐다. 국민추천포상은 정부가 국민의 추천을 받은 후보자를 대상으로 현지조사와 위원회 심사 등을 거쳐 포상하는 제도다. 이날 총 42명이 청와대를 찾았다. 문재인 대통령은 수여식에서 만난 유석영 대표에게 거듭 “고맙다”고 말했다. 정작 유석영 대표는 손을 저었다. 아직 갈 길이 멀었다는 것. 그는 “100년 이상 가는 좋은 기업으로 발돋움해서 청각장애인들의 안전한 직장이 되는데 남은 인생을 걸고 싶다”며 각오를 다졌다. 일종의 사명감이다.

올해 목표는 두 가지다. 아지오만의 구두 공장과 개발실을 마련하는 것이다. 유석영 대표는 “지금은 형편상 외주로 디자인을 받고 있는데, 여성 사원 중에 디자이너의 꿈을 가진 사람이 있다. 올해 돈을 벌면 꼭 개발실을 만들어 그 꿈을 이뤄주고 싶다”고 말했다. “아지오의 성장이 청각장애인들의 행복”이라고 생각하는 그다. 아지오는 지난해 5,000켤레를 팔았다. 당초 계획했던 고객 1만명 유치에 절반 수준이지만 기술과 품질면에서 경쟁력을 잃지 않았다. 유석영 대표는 신발끈을 다시 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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