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어로(hero)를 다룬 이야기는 흥행불패다. 악당과 대적하는 주인공이 고난을 극복하고 정의를 쫓아가는 과정 속에서 대리만족을 얻는다. 여기엔 세상을 향한 일침이 있고, 잠들어있던 인류애를 깨운다. 어쩌면 우린 각박한 현실에서 나를 도와줄 히어로를 기다리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 그는 멀리 있지 않다. 당장 세상을 바꿀 순 없어도 따뜻한 뉴스로 종종 찾아온다. 목숨을 걸고 이웃을 구한 시민 영웅들이다. 모든 이야기의 결론은 ‘함께 살자’는 것이다. 옳고 그름이나 높고 낮음이 없다. 당신도 누군가의 히어로가 될 수 있다. | 편집자주

탑리버스정류장을 65년째 운영하고 있는 김재도 대표는 계속되는 적자에도 문을 닫지 않을 생각이다. 정류장을 이용하고 있는 30여명의 안전과 편의를 위해서다. 그것이 지난 시절 희노애락을 함께 겪어온 지역민들에 대한 고마움의 표현이었다. / 경북 의성=소미연 기자
탑리버스정류장을 65년째 운영하고 있는 김재도 대표는 계속되는 적자에도 문을 닫지 않을 생각이다. 정류장을 이용하고 있는 30여명의 안전과 편의를 위해서다. 그것이 지난 시절 희노애락을 함께 겪어온 지역민들에 대한 고마움의 표현이었다. / 소미연 기자

시사위크=경북 의성|소미연 기자  지금으로부터 65년 전이다. 경북 의성군 금성면 대리3리에 탑리버스터미널이 문을 열었다. 6·25 전쟁 이후라 여건은 좋지 않았다. 도로 사정은 형편없었고, 군용 차량을 개조한 버스는 고장나기 일쑤였다. 그러다보니 정류장 운영에도 일손이 많이 필요했다. 운전사, 조수, 안내원의 숙식을 책임지는 것은 물론 새벽에 떠나는 차량의 시동을 거는 일까지 도맡아야 했다. 그래도 좋았다. 이런 수고로움이 대구를 오가는 버스의 동력이었다.

하지만 탑리버스정류장을 한평생 운영하게 될 줄은 몰랐다. 김재도(83) 대표는 “어려운 시절임에도 어머니의 헌신으로 대학 공부까지 마쳤다”면서 “어머니는 아들이 더 넓은 세상으로 나가길 바랐는데 가족들이 눈에 밟혀 고향으로 다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고 말했다. 그의 아버지는 정류장을 운영한지 3년 만에 세상을 떠났다. 당시 고등학교 1학년이었던 김재도 대표는 6남매의 장남으로서 사실상 가장이나 다름없었다. 그때부터다. 정류장은 가업이 됐다.

탑리버스정류장은 경상북도에서 노포기업으로 선정됐다. 지역의 장수 기업으로 역사문화적 가치를 인정받은 셈. 최근엔 대합실이 갤러리로 재탄생하며 지역민들은 물론 의성을 찾는 손님들의 문화가 있는 쉼터가 됐다. / 소미연 기자
탑리버스정류장은 경상북도에서 노포기업으로 선정됐다. 지역의 장수 기업으로 역사문화적 가치를 인정받은 셈. 최근엔 대합실이 갤러리로 재탄생하며 지역민들은 물론 의성을 찾는 손님들의 문화 쉼터가 됐다. / 소미연 기자

◇ “이제와 내팽개치면 사람의 도리 아냐”

정류장은 1990년대까지 호황기를 누렸다. 김재도 대표는 마당을 가리키며 “이곳에 하루 1,000명이 타고 1,000명이 내렸다”면서 “저녁이 되면 마당을 쓸고 쓰레기 줍는 게 큰일이었다”고 회고했다. 일은 힘들었지만 덕분에 누나와 동생들이 공부를 마치고 가정을 꾸렸다. 뿐만 아니다. 김재도 대표의 자녀 4명도 시집 장가를 보낼 수 있었다. 그는 “작은 가업이지만 정류장을 해오면서 지역민들과 함께 희로애락을 겪었다”고 덧붙였다.

때문에 김재도 대표는 “정류장을 죽을 때까지 하기로 결정”했다. 정말 큰 결심이다. 정류장은 2000년대에 들어서면서 적자를 면치 못하고 있어서다. 이농현상으로 지역을 떠나고, 차량 보급이 활발해지면서 승객이 빠져나간 것. 현재 정류장을 이용하는 승객은 하루 20~30명 사이다. 이들의 승차권에서 10%를 정류장 이용료로 받는데, 한 달이면 30만원이 조금 넘는다. 이 수입과 연료비 차원으로 군에서 지원받는 월 40만원을 보태 매표원의 월급을 주고나면 남는 게 없다.

김재도 대표는 “2005년부터 주머니돈이 나가기 시작했다. 그래서 아내가 밥 먹을 때마다 그만두자는 얘기를 했는데, 우리 둘이 먹는 것만 해결하면 되니 좀 더 참고 견뎌보자고 달랬다”면서 “아내가 6년 전 세상을 먼저 떠나면서도 자기 아픈 것보다 홀로 남아 정류장을 지킬 남편 걱정을 더 많이 했다”고 말했다. 그는 부인에게 미안한 마음을 나타냈다. 하지만 정류장 운영을 중단할 수 없었다. 문을 닫게 되면 버스를 이용 중인 30명 남짓의 주민들이 불편해진다.

“생계를 위해 시작한 일이지만 지역민들이 이용해줬기 때문에 지금의 건물을 짓고 아이들도 교육시킬 수 있었잖아요. 이제와 못하겠다고 내팽개치면 하루 25명의 지역민들이 버스를 타기 위해 길바닥에서 기다려야 해요. 그럼 비올 때, 눈 올 때 어떻게 해요? 이 사람들 전부 나이가 많은데 버스를 탈 수 있겠어요? 이익만 추구하는 장사꾼이었다면 벌써 20년 전에 문 닫았겠지만, 그건 사람의 도리가 아니라고 생각해요.”

김재도 대표가 세운 대합실은 단순히 버스만 기다리는 곳이 아니다. 65년 세월이 깃든 추억의 장소이면서 작은 문화 공간이기도 하다. 그는 지난해 9월 자신의 호와 이름을 본 따 ‘해암 김재도 갤러리’로 다시 열었다. 이로써 주민들은 버스를 기다리는 동안 사진을 감상하며 쉼을 얻게 됐다. 갤러리에 걸린 사진들은 모두 김재도 대표의 작품이다. 그의 또 다른 직업은 사진작가다. 30년 전 취미활동으로 시작해 20만장에 이르는 필름을 모았다. 앞으로 꿈이 있다면 사진도서관을 만드는 것이다.

김재도 대표는 이미 대합실 옆 건물 사무실에 사진집 3,000권을 모아뒀다. 결국 지역 문화 형성을 위한 일이다. 따라서 군의 지원만 이뤄진다면 꿈에 한 발짝 더 다가설 수 있다. 그는 “정류장도 적자인데 사진도서관까지 감당하기 어렵다”면서도 “시골 마을일수록 문화가 소외되기 마련인데 좀 더 관심을 갖고 목소리를 내야 한다”고 말했다. 남다른 지역 사랑이다. 앞서 그는 자랑스러운 도민의 상, 경북문화상, 의성군민의상 등을 수상한 바 있다. 김재도 대표는 “인간답게 살았다는데 자부심이 크다”며 멋쩍게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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