뒤로가기
李씨네
[나랏말싸미]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한글의 시작
2019. 07. 17 by 이영실 기자 swyeong1204@sisaweek.com
영화 ‘나랏말싸미’(감독 조철현)가 관객과의 만남을 앞두고 있다. /메가박스중앙플러스엠
영화 ‘나랏말싸미’(감독 조철현)가 관객과의 만남을 앞두고 있다. /메가박스중앙플러스엠

시사위크=이영실 기자  문자와 지식을 권력으로 독점했던 시대, 세종(송강호 분)은 모든 신하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나라의 글자를 만들기 시작한다. 중국의 각종 언어학 서적을 섭렵했음에도 새 문자의 실마리를 잡지 못해 괴로워하던 세종은 엉뚱하게도 조선이 억압했던 불교의 유산인 팔만대장경 안에서 단서를 찾는다.

억불정책을 가장 왕성하게 펼쳤던 세종은 가장 천한 신분인 스님 신미(박해일 분)와 만나 오로지 백성을 위해 뜻을 모은다. 먹고살기도 바쁜 백성이 배워서 쓰려면 무조건 쉽고 간단해야 한다는 새 문자의 원칙 앞에서 결코 타협하지 않고 목표를 향해 달려가던 세종은 오늘날까지 물과 공기처럼 쓰이는 한글의 시초 훈민정음을 창제하고야 만다.

영화 ‘나랏말싸미’(감독 조철현)는 가장 높은 곳의 임금과 가장 낮은 곳의 스님이 함께 이뤄낸 위대한 업적을 담았다. 한글 창제와 관련된 여러 가지 설 중 훈민정음과 불경을 기록한 문자인 범어(산스크리트어)와의 관계에 주목, 역사적 고증을 거쳐 영화적으로 재구성했다.

‘나랏말싸미’는 임금과 스님의 협업으로 훈민정음이 탄생했다는 가설로 흥미를 자극한다. /메가박스중앙플러스엠
‘나랏말싸미’는 임금과 스님의 협업으로 훈민정음이 탄생했다는 가설로 흥미를 자극한다. /메가박스중앙플러스엠

불교 국가인 고려를 뒤집고 유교를 국시로 창건된 새 왕조 조선의 임금인 세종이 스님과 손을 잡고 한글을 만들었다는 가설은 그 자체만으로도 흥미를 자극한다. 유신들에 맞서 ‘모든 백성이 문자를 읽고 쓰는 나라’를 꿈꿨던 세종이 신미 스님과 불가능해 보이는 목표를 향해 달려가는 모습은 그 결과를 알면서도 응원하듯 지켜보게 된다. 그리고 비로소 만나는 한글 창제 완성의 순간은 가슴을 벅차오르게 하는 감동을 선사한다.

개인의 업적이 아닌 모두의 성취였던 한글 창제 이면의 이야기에 주목한 점도 좋다. 세종과 신미 스님의 인연과 협업, 충돌의 과정 속 그들과 함께 한 소헌왕후·대군들·신미의 제자 도반인 스님들·새로 태어난 문자를 익혀 퍼뜨렸던 궁녀들까지. 모든 것을 걸고 한글을 만든 세종과 불굴의 신념으로 함께한 사람들, 역사가 담지 못한 한글 창제의 숨겨진 이야기가 코끝을 찡하게 만든다.

‘나랏말싸미’에서 세종으로 분한 송강호(위)와 스님 신미를 연기한 박해일 스틸컷. /메가박스중앙플러스엠
‘나랏말싸미’에서 세종으로 분한 송강호(위)와 스님 신미를 연기한 박해일 스틸컷. /메가박스중앙플러스엠

다수의 드라마와 영화를 통해 익숙한 세종이지만, ‘나랏말싸미’를 통해 본 세종은 또 다른 느낌을 준다. 유신들의 압박에 시달리고 평생을 괴롭힌 질병에 고통받고, 사랑하는 아내의 상처조차 걷어줄 수 없는 남편 세종은 우리와 똑같이 좌절하고 고뇌하는 평범한 인간의 얼굴을 보여준다. 또 한 나라를 다스리는 왕이지만, 술 한 잔을 마셔도 아내 소헌왕후 눈치를 보는 세종의 모습은 ‘깨알’ 웃음 포인트다.

송강호는 세종의 이면에 가려져있던 인간의 모습을 다채롭게 보여준다. 천한 불승과도 손을 잡을 수 있는 호방함과 인간적 매력부터 좌절과 고뇌 앞에 왕이기에 터뜨릴 수 없는 절제된 감정까지 자유자재로 오가며 ‘인간’ 세종의 모습을 완벽하게 그려낸다. 차마 흐를 수조차 없는 눈물을 머금은 송강호의 눈빛이 잊히지 않는다.

아무도 몰랐던 한글 창제의 숨은 주역 신미 스님을 연기한 박해일도 제 몫을 다한다. 낯선 외모와 낯선 언어에도 이질감 없이 극에 완전히 녹아들었다. 가장 높은 곳의 임금인 세종에게 무릎을 꿇지 않을 정도로 반골인 신미 스님의 단단함이 고스란히 느껴진다.

‘나랏말싸미’에서 소헌왕후 역을 소화한 고 전미선 스틸컷. /메가박스중앙플러스엠
‘나랏말싸미’에서 소헌왕후 역을 소화한 고 전미선 스틸컷. /메가박스중앙플러스엠

세종의 아내 소헌왕후는 고(故) 전미선을 만나 현명하고 당당한 현대적인 여성 캐릭터로 생생하게 살아났다. 고 전미선은 차분하면서도 기품과 위엄이 배어 나올 뿐 아니라, 섬세하게 감정을 전달하며 현명한 여장부의 모습을 아름답게 그려냈다. 고인의 연기를 더 이상 볼 수 없다는 사실이 안타깝기만 하다.

김준한(문종 역)·차래형(수양 역)·윤정일(안평 역)·탕준상(학조 역)·임성재(학열 역)·금새록(진아 역) 등의 열연도 ‘나랏말싸미’를 더욱 빛나게 한다. 러닝타임 110분, 오는 24일 개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