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4회 부산국제영화제 한국영화 회고전의 주인공으로 선정된 정일성 촬영감독. /부산국제영화제
제24회 부산국제영화제 한국영화 회고전의 주인공으로 선정된 정일성 촬영감독. /부산국제영화제

시사위크|부산=이영실 기자 

 길이 없는 들판에서 새로운 길을 만들고 싶다.

한국영화 100년의 역사 중 62년을 함께 한 정일성(90) 촬영감독. 그의 카메라를 통해 탄생한 작품만 무려 138편이다. 올해로 90세가 된 그는 여전히 뜨거운 열정을 지닌 영화인으로 살아가고 있다.

지난 3일 개막한 제24회 부산국제영화제(Busan International Film Festival, BIFF)는 올해 한국영화 회고전의 주인공으로 정일성 촬영감독을 선정했다. 한국영화 회고전은 한국영화사에 한 획을 그은 특정 감독이나 의미 있는 주제의 회고전을 통해 한국영화사를 재조명하는 장이다.

정일성 촬영감독은 1957년 조긍하 감독의 영화 ‘지상의 비극’을 시작으로 가장 최근작인 ‘천년학’(2007, 임권택)까지 한국영화와 함께 해온 산증인이다. 올해 영화제 회고전에서는 김기영 감독의 ‘화녀’(1971), 이두용 감독의 ‘최후의 증인’(1980), 이두용 감독의 ‘최후의 증인’(1980), 임권택 감독의 ‘만다라’(1981), 김수용 감독의 ‘만추’(1981), 배창호 감독의 ‘황진이’(1986), 장현수 감독의 ‘본 투 킬’(1996) 등 대표작 7편이 상영된다.

정일성 촬영감독은 영화제 개막 둘째 날인 지난 4일 기자회견을 열고, 그의 영화 인생을 되돌아봤다. 다음은 그와 나눈 일문일답이다. 

-한국영화 회고전의 주인공이 됐다. 소회가 남다를 것 같다. 
“영화를 시작하고 10년쯤 됐을 때 외신을 통해 히치콕, 존 포드의 회고전에 대해 들었다. 그때 ‘어떻게 저렇게 평생 영화를 할 수 있을까, 나도 그 나이가 될 때까지 영화를 할 수 있을까’ 부러웠다. 영화를 한지 60년이 넘었다. 한 일본인 평론가가 회고전 책자에 실리는 원고 글을 보내줬는데, 자기가 아는 한 촬영감독의 회고전은 없었다고 하더라. 개인적으로도 영광스럽고, 저를 계기로 좋은 촬영감독들이 보다 많이 회고전을 했으면 좋겠다.”

-가장 기억의 남는 순간이나 작품이 있다면.
“138편 정도의 영화를 찍었다. 그중 40~50편은 굉장히 부끄러운 영화들이다. 쓰레기통에 버리고 싶은 영화다. 대표작이 뭐냐는 질문을 많이 하는데, 젊을 때는 내가 상을 수상한 영화들이 대표작이라고 했다. 철딱서니 없는 말을 많이 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내가 부끄럽게 생각하는 40~50편의 영화가 교과서적으로 나를 지탱하고 있다. 실패한 영화가 나에게는 좋은 교과서 같다는 생각을 한다.” 

-오래 현장을 지켜올 수 있었던 비결이 있다면.
“나는 원칙주의자인데, 나름대로 생각하는 원칙이 있었다. 형식과 리얼리즘, 모더니즘보다 더 상위에 놨던 것이 영화의 격조다. 격조는 영화감독이 아니라 촬영감독이 만드는 거다. 촬영감독의 역할이 무엇일까 뭘 해야 할 것인가에 대해 항상 생각해왔다. 리얼리즘이라고 하면 있는 그대로를 찍는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리얼리즘 속에 꿈이 없으면 한낮 뉴스에 불과하다. 꿈이 있어야 한다. 그것을 지금까지 유지해온 게 첫 번째가 아닌가 생각한다.

또 분단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일제시대에 태어나서 해방을 겪고, 해방이 되자마자 무정부상태에서 좌익과 우익이 나눠졌다. 그 시절을 거쳐 독재 정권을 지났고, 민주화 운동을 거쳤고, 남북의 분단을 겪고 있다. 그런 과정이 영화를 하는데 굉장히 도움이 됐던 것 같다. 긴장 속에서 살지 않으면 안 되는 이 시대에서 영화인으로서 어떻게 사회에 기여할 것인가에 대해 정신무장을 했다. 불행했던 근대사가 지금까지 실행해올 수 있었던 원동력이다.” 

정일성 촬영감독의 대표작 7편. /부산국제영화제 공식 홈페이지 캡처
정일성 촬영감독의 대표작 7편. /부산국제영화제 공식 홈페이지 캡처

-한국영화의 강점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나. 
“일본에 지인들이 많은데, 한국영화를 사랑하는 일본 평론가들이 꽤 있다. 한국영화는 힘이 있다고 하더라. 그 힘이 뭘까 토론도 한다더라. 내 생각에는 남북이 분단돼서 굉장히 긴장된 상황에서 살아왔다. 그 긴장이 한국영화의 힘이 됐을 거라는 생각이다.

일본영화들은 완벽에 가까운 완성도를 보이지만, 거의 비슷하다. 모두 세트 같다. 한국영화 속 풍광은 때로는 지저분하기도 하지만 사람이 사는 곳이라는 생각이 든다. 사람이 사는 집과 사람이 살지 않는 집의 차이로 느껴지는 것이 일분과 한국영화의 차이가 아닌가 생각한다. 당시 일본 평론가들이 완성도만 높아진다면 한국영화가 일본영화보다 더 높은 곳에서 세계적으로 소개될 것이라고 예언에 가까운 말을 했었는데, 오늘날 현실이 돼 나타나고 있다고 생각한다.”

-눈여겨보는 후배 감독이 있나. 
“있다. 먼저 한국영화 100주년이 되는 해에 봉준호 감독이 만든 영화(‘기생충’)가 칸에서 황금종려상을 받은 것에 대해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그 외에 좋은 감독들이 많고 좋은 촬영감독들이 많다. 그런데 이름을 얘기하면 불리지 않은 사람들로부터 왕따를 당할 것 같다. 하하. 내가 열심히 만들었던 영화들보다 더 좋은 영화들이 계속 나오고 있다는 것에 대해 고무적으로 생각한다.

한 가지 아쉬운 점이 있다면 요즘은 필름을 본 적이 없는 사람이 촬영을 하고 있다고 하더라. 영화 학도들도 필름 과정을 공부 안 하고, 바로 디지털을 한다더라. 하지만 디지털을 하더라도 아날로그 과정의 기술적인 과정을 완벽하게 이수하지 않으면 좋은 디지털을 촬영할 수 없다. 그 과정을 건너뛴 사람들이 디지털로 촬영한 작품들을 보면 뭔가 아쉽고 미완성 같은 부분들이 있다. 감독은 생각하고 있는 이미지를 어떻게 기술적으로 형상화할 것인가라고 하는 과정을 통해 완성된 결과를 이론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 능력이 있어야 한다. 그래야 촬영감독이 감독의 이미지를 더 창의적이고 독창성 있게 만들어갈 수 있다.

나는 영화과 출신도 아니고 전공한 사람도 아닌데, 현장에서 몸으로 익히고 독학으로 영화를 공부한 사람이다. 그런데 학도들은 경험하지 못하고 이론으로 시작해서 현장에 투입되기 때문에 이론과 현장이 괴리가 많을 거다. 그때 혼란이 올 거라는 생각한다. 혼란을 극복하지 못하면 도태되고, 지혜롭게 슬기롭게 넘기면 좋은 촬영감독도 될 수 있고, 영화감독도 될 수 있다.”

-이루고 싶은 꿈이 있나.
“하고 싶은 걸 다 하고 죽는 사람이 어디 있겠나. 지금까지 해온 것에 만족하고 있고, 앞으로도 만족을 원한다면 욕심이 큰 거라고 생각한다. 38명의 감독과 작업을 했다. 많게는 20여 편의 영화를 같이 했던 감독이 있고, 한 편의 영화로 끝나버린 관계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오늘날까지 있게 한 것에 대한 3분의 1은 감독들의 힘이 아닌가 생각한다. 또 3분의 1은 1년에 6개월 이상을 떠돌이 생활을 하고 밖으로만 다녔는데, 그동안 집을 지켜준 제 아내의 공로다. 나머지 3분의 1은 내 몫이다.

한 번도 해보지 못한 것보다 지금까지 해온 나의 영화들을 다시 정리하고 싶다는 생각은 가끔 한다. 그러나 내 마음대로, 나 혼자 정리가 되는 것이 아니지 않겠나. 나를 모르는 젊은 감독이 느닷없이 같이 영화를 했으면 좋겠다고 한다면, 길이 없는 들판에서 새로운 길을 만들고 싶다는 생각은 있다.”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이렇게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주셔서 감사하다. 한국영화의 미래는 굉장히 밝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제작의 미래는 밝다고 보지 않는다. 대자본들이 작은 영화에 별로 관심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독립영화가 계속 나오기를 희망하고 있다. 대자본을 이길 수 있는 힘 있는 영화가 나왔으면 하는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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