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프로배구 역사에 한 획을 긋고 떠난 뒤 7년 만에 돌아온 가빈이 명불허전 활약을 선보이고 있다. /뉴시스
한국 프로배구 역사에 한 획을 긋고 떠난 뒤 7년 만에 돌아온 가빈이 명불허전 활약을 선보이고 있다. /뉴시스

시사위크=김선규 기자  높은 타점과 넘치는 파괴력으로 코트를 지배했던 가빈 슈미트. 어느덧 노장이 돼 7년 만에 돌아온 그가 ‘명불허전’이란 말이 왜 존재하는지 스스로 입증하고 있다.

가빈은 한국 프로배구 역사에서 결코 빼놓을 수 없는 외국인 용병이다. 캐나다 출신인 그는 2009년 명문 삼성화재 유니폼을 입고 한국 무대를 밟았다.

사실, 그때만 해도 가빈은 잠재력을 지닌 유망주 정도에 불과했다. 한국에 오기 앞서 프랑스리그에서 활약하며 득점 2위에 오르기도 했으나 유럽 내 중위권 수준의 리그였고, 캐나다 국가대표팀에서도 핵심주전은 아니었다. 처음엔 삼성화재가 아닌 현대캐피탈의 입단테스트를 받았다가 선택받지 못한 일화도 유명하다.

그런 그가 삼성화재 유니폼을 입을 수 있었던 것은 특유의 성실함과 인성이었다. 외국인 용병을 선발하는데 있어 특히 인성을 중시하는 것으로 알려진 신치용 전 감독은 가빈의 성실한 태도에 주목했다. 그리고 이 선택은 ‘신의 한 수’가 됐다.

기본적으로 외국인 용병들은 한국 선수들을 압도하는 피지컬을 지니고 있다. 그들의 최대 무기다. 가빈 역시 큰 키와 긴 팔, 그리고 막강한 파워로 무장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 반드시 성공이 보장되는 것은 아니다. 가빈은 그 이상의 ‘무엇’이 있었다.

그 ‘무엇’은 바로 에이스로서의 책임감. 가빈은 한국 선수들 이상으로 팀에 대한 헌신과 희생, 책임감을 보여줬다. 독보적인 점유율로 사실상 팀의 공격을 홀로 이끌었지만 가빈은 지친 내색조차 하지 않았다.

그렇게 가빈은 첫해부터 삼성화재를 통합우승으로 이끌었다. 개인성적은 어마어마했다. 당시 가빈이 기록한 득점은 1,110점이었는데, 2위의 득점기록이 661점이었다. 또한 득점상, 공격상, 서브상, 정규리그 MVP, 올스타전 MVP, 챔피언결정전 MVP 등을 휩쓸었다. 그야말로 ‘가빈 천하’였다.

가빈은 이듬해 다른 팀들의 극심한 견제와 팀내 사정이 겹치면서 적잖은 어려움을 겪었다. 결국 삼성화재도 정규리그를 3위로 마감했다. 하지만 가빈은 또 다시 번뜩였다. 포스트시즌에 들어서자 가빈 특유의 책임감과 헌신이 다시 불타올랐다. 챔피언 결정전 마지막 경기에서 그의 공격점유율은 무려 79%에 달했다. 결국 가빈은 기어코 삼성화재를 챔피언 결정전 우승에 올려놓았다.

한국에서의 세 번째 시즌도 다르지 않았다. 삼성화재는 가빈을 앞세운 공격으로 상대를 공략했고, 다른 팀들은 알고도 당해야했다. 삼성화재는 그해에도 정규리그와 챔피언 결정전을 모두 우승으로 장식했고, 가빈은 일등공신이었다.

하지만 모든 일이 그렇듯 가빈과 삼성화재에게도 이별의 시간이 찾아왔다. 한국 무대에서 부쩍 성장한 가빈은 유럽 내에서도 손꼽히는 러시아 배구리그로 향했다. 3년 동안의 강렬한 역사를 남기고 말이다.

이후 가빈은 러시아와 터키, 그리고 캐나타 대표팀에서 좋은 활약을 이어가며 최고의 선수로 등극했다. 그리고 어느덧 30대 중반의 노장이 된 올해, 다시 한국 무대로 돌아왔다. 올 시즌을 앞두고 외국인 용병 트라이아웃에 참가해 전체 1순위로 한국전력의 지명을 받은 것이다.

무려 7년 만에 돌아온 가빈. 세월만큼이나 많은 것이 변했다. 영광의 시절을 함께 했던 삼성화재가 아닌 한국전력 유니폼을 입었고, 우승 후보와도 거리가 멀다. 가빈의 기량도 아무래도 전성기 시절에 비해 다소 떨어진 게 사실이다. 하지만 변하지 않은 것도 있다. 가빈 특유의 성실함과 헌신은 하나도 변하지 않았다. 가빈은 복귀 첫 시즌부터 1라운드 득점 공동선두에 이름을 올리며 ‘명불허전’을 입증하고 있다. 이제는 노장으로서 젊은 선수들을 독려하고 이끄는 역할까지 도맡고 있는 그다.

가빈은 엄청난 실력과 뛰어난 인성으로 팬들로부터 ‘갑인’이란 별명을 얻은 바 있다. 돌아온 ‘갑인’의 전설은 그렇게 계속 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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