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왕조의 일원이었던 장원삼이 롯데 자이언츠 유니폼을 입고 새로운 도전에 나선다. /뉴시스
삼성왕조의 일원이었던 장원삼이 롯데 자이언츠 유니폼을 입고 새로운 도전에 나선다. /뉴시스

시사위크=김선규 기자  장원삼. 이 이름 세 글자는 2010년대 초중반 ‘삼성왕조’를 논할 때 결코 빠질 수 없는 이름이다. 2006년 현대 유니콘스에서 데뷔해 첫해부터 12승을 거두며 화려하게 등장한 장원삼은 2010년 삼성 라이온즈로 유니폼을 갈아입은 뒤 ‘삼성왕조’ 막강 마운드의 한 축을 담당했다.

하지만 그 역시 세월은 피해갈 수 없었다. 전성기와 멀어질수록 그가 던지는 공의 위력과 성적은 뚜렷한 하락세를 보였다. 결국 장원삼은 2018년을 끝으로 자신이 전성기를 바친 삼성 라이온즈와 결별했다.

공을 완전히 내려놓은 것은 아니었다. LG 트윈스로 이적하며 옛 스승 류중일 감독과 재회한 장원삼은 올 시즌 부활을 다짐했다. 그러나 뜻대로 되진 않았다. 1군 무대에 8경기, 14 2/3이닝 나서 평균자책점 7.98을 기록하는데 그쳤다. 결국 LG 트윈스는 1년 만에 그에게 방출을 통보했다.

그런 그가 또 다시 새로운 도전에 나선다. 이번엔 롯데 자이언츠 유니폼을 입고 ‘권토중래’를 꿈꾸게 됐다. 장원삼은 입단테스트까지 마다하지 않을 정도로 강력한 현역연장 의지를 보였고, 롯데 자이언츠는 그의 절실함에 손을 내밀었다.

강력한 우승팀의 에이스에서 떠돌이 신세가 됐지만, 그의 바람은 명확하다. 선수 생활을 마치기 전에, 다시금 자신이 만족할 공을 던지고 명예를 회복하는 일이다. 그렇기에 ‘삼성왕조’ 시절을 함께한 배영수의 마지막 모습은 장원삼에게 큰 메시지를 던져주고 있다.

‘푸른 피의 에이스’라는 별명이 붙기도 했던 배영수는 설명이 필요 없는 삼성 라이온즈의 에이스다. 자신의 팔꿈치를 팀에 바쳤다는 평가를 받을 정도로 팀에 헌신했고, 팀의 전성기를 함께했다. 하지만 그 역시 흘러간 세월이 몰고 온 딜레마를 피할 수 없었다. 팀에서의 입지는 좁아진 반면, 공을 던지고자 하는 본인의 열망은 계속됐다. 결국 배영수는 2015년 한화 이글스로 전격 이적했다.

한화 이글스에서의 활약은 한창 좋았던 시절과 비교해 성에 찰 수 없었다. 부상과 부진이 거듭됐고, 2018년엔 출전횟수 자체도 크게 줄어들었다.

하지만 배영수의 야구인생은 허무하게 끝나지 않았다. 배영수의 경험을 높게 산 두산 베어스가 그에게 손을 내밀었다. 큰 역할이 주어진 것은 아니었지만, 배영수는 궂은일도 마다하지 않았다. 그리고 꿈만 갖은 동화가 찾아왔다. 한국시리즈 우승을 매듭짓는 마지막 투수가 된 것이다.

두산 베어스와 키움 히어로즈의 한국시리즈 4차전. 두산 베어스는 내리 3연승을 달린 뒤 4차전에서도 극적인 역전을 연출했다. 남은 것은 키움 히어로즈의 연장 10회말 공격. 투수는 이용찬이었다. 그런데 이때 조금은 황당한 에피소드가 발생했다. 김태형 감독이 마운드 방문 제한 횟수를 착각하면서, 졸지에 투수를 바꿔야하는 상황이 된 것이다. 어쩔 수 없는 교체로 갑작스럽게 마운드에 오른 것은 다름 아닌 배영수였다.

이번 한국시리즈 첫 출전이자 오랜만에 한국시리즈 마운드에 오른 배영수는 키움 히어로즈의 강타자 박병호와 샌즈를 차례로 돌려세운 뒤 경기에 마침표를 찍었다.

다시금 최고의 무대에서 자신의 공을 던진 배영수는 더 이상 후회가 없었다. 그리고 얼마 후 그는 은퇴를 발표했다. 그 누구보다 화려하게 마지막을 장식하고서 말이다.

물론 제2의 배영수를 바라기엔 너무나도 기적 같은 스토리다. 그보단, 후회 없이 공을 내려놓을 수 있도록 해줄 ‘자기만족’이 필요하다. 혜성 같은 데뷔, 또는 에이스로서의 맹활약보다 어려운 것이 유종의 미를 거두는 일이다. 화려한 스타선수는 많았지만, 아름답게 마침표를 찍은 선수는 그보다 훨씬 적었다. 장원삼의 마지막공은 어떻게 장식될까. 거인군단의 일원이 된 베테랑 장원삼의 행보가 주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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