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윤소 한국여성민우회 미디어운동본부 부소장

‘세류성해(細流成海).’ 가는 물줄기가 모여 큰 바다를 이룬다는 뜻이다. 낙숫물이 바위를 뚫듯, 작은 힘이 모이면 큰 변화를 일으킨다는 의미와도 맥이 닿아있다. 우리는 이미 지난 촛불혁명을 통해 이를 경험했다. 대한민국의 역사를 바꾼 것은 거대 권력도 아니고 정치적인 어젠다도 아니었다. ‘국민주권’을 위해 행동했던 ‘시민들의 힘’이었다. 하지만 아직 가야할 길이 멀다. 이에 <시사위크>에서는 대한민국 변화를 이끄는 중심, ‘시민운동가’들의 릴레이 인터뷰를 통해 좀 더 나은 세상을 위한 제언을 경청해본다. [편집자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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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윤소 부소장은 사회가 변화하는 속도에 맞춰 언론도 변해야 한다고 밝혔다. /사진=김경희 기자

시사위크=서예진 기자  “옛날에는 TV, 신문만 봐도 세상을 알 수 있었지만 지금은 정보가 온갖 곳에서 쏟아진다”는 이야기들을 많이 들을 것이다. 실제로 미디어의 종류가 많아지면서 인간은 미디어 의존도가 높아지고 있다. 미디어로부터 영향을 많이 받고, 이 때문에 편견이나 차별적 인식도 고착화될 수 있다.

이같은 미디어 환경 속에서 성평등한 사회를 만들기 위해 움직이는 사람들이 있다. 바로 ‘한국여성민우회’ 산하의 ‘미디어운동본부’이다. 미디어운동본부는 1980년대 언론탄압을 막기 위한 시민운동이 그 기원이었으며 민주화운동 과정에서 미디어 모니터링과 교육 등을 진행하다 1998년 정식으로 출범했다.

미디어운동본부는 현재 ▲이용자적 관점에서 미디어의 공공성 구현을 위한 미디어 정책 ▲매체 속 성평들을 위한 미디어 감시 ▲비판적인 미디어 리터러시 확산 ▲여성연예인 인권지원 ▲푸른미디어 상 시상 등의 노력을 이어가고 있다. <시사위크>는 지난 19일 민우회 미디어운동본부 이윤소 부소장을 만나 성평등 사회를 위해 언론이 가야할 길과 급변하는 미디어 환경에 대해 들어봤다.

◇ “사회가 변화하는 속도에 맞춰 언론도 변화해야”

“미디어 기술은 빠르게 변하지만 내용의 변화는 빠르게 이뤄지기 어렵다. 그러나 느리지만 천천히 변하고 있다. KBS 뉴스 메인 앵커에 여성 기자를 배치한 것도 그 개선의 일환이다. 지금의 변화는 이전이라면 생각하기 어려운 것들이다. 남성이 주로 활동하던 예능프로그램도 주목받는 여성 연예인들이 생기고, 미투 운동 지나면서 성폭력 기사에 대한 기자들의 반성도 있었다고 생각한다.”

미디어운동본부에서 약 10년간 활동한 이윤소 부소장에게 “미디어의 성인지감수성이 개선된 측면이 있는가”라고 질문한 데 대한 답변이다. 미디어운동본부는 지난달 20일 KBS 여성 앵커 발탁 소식에 “중년의 남성 기자가 주요 뉴스를 전하고, 젊은 여성 아나운서가 연성 뉴스를 맡는 것은 방송 뉴스의 익숙한 공식이었다”면서 “역할의 변화가 관점의 변화로 이어지길 바란다”고 환영했다.

“여성대상 범죄가 많다보니 그런 심각성에 대해 이야기하기 위해 표기되는 경우도 많다. 그러나 표기를 하지 않아도 내용 전달에 문제가 없다면 안 하는 것이 좋다. 물론 제목에 성별을 아예 표기하지 않는 것은 합리적인 기준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언론 내부에서 이 기준에 대해 고민을 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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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윤소 부소장은 피해자 배려 차원에서 기사 제목 성별쓰기를 고민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사진=김경희 기자

미디어운동본부는 지난달 모니터 보고서 ‘기사제목의 성별표기, 얼마나 고민하고 있나요?’를 통해 뉴스에서의 성차별적 언어사용에 대해 지적했다. 예를 들자면 여성 운동 선수에 대한 기사에서 ‘여제’, ‘여왕’, ‘여전사’ 등 불필요한 ‘여-’ 접두어를 사용하거나 피의자보다 피해자의 성별이 강조되고, 특히 여성일 경우 그 경향이 뚜렷한 경우다.

보고서에 따르면 기사 제목에 성별과 이름이 표기된 총 1,501건의 기사 중, 피해자가 여성일 경우 제목에 표기되는 경우가 201건(39.8%)으로 가장 많았다. 또 피해자의 성별만 표기된 기사제목은 261건(51.7%), 피의자(가해자)의 성별만 표기된 기사제목은 67건(13.3%)으로 피해자의 성별만 표기된 기사 제목이 4배 정도 많았다.

미디어운동본부는 “피해자의 견해나 정신적인 피해 등을 모두 배제된 채 단지 경찰조서에만 의존해서 쓰는 보도는 가해자 입장에서 서술한 범죄 사실을 그대로 나열하게 된다”며 “이러한 취재 관습이 제목에도 반영돼 피해자가 강조되는 방식으로 작성되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단순히 ‘여-’ 쓰지 마세요가 아니라, 왜 이렇게 써왔고 왜 쓰지 말아야 하는지 논의를 해야 변화하고 정착한다고 생각한다. 사회가 변화하는 속도에 맞춰 언론도 변화해야 한다. ‘인권보도준칙’ 등 현재 있는 가이드라인만 잘 지켜도 될 것이다.”

이 부소장은 기자 제목에서 성별을 무조건 쓰지 말자고 운동하는 것이 아니라, 피해자 배려 차원에서 고민이 필요하다고 설명했다. 여성피해자를 부각하는 방식은 여성 인권에 대한 무관심과 함께 선정적인 여성묘사를 반복하는 견고한 프레임을 형성하게 된다는 것이다.

◇ ‘렛미인 폐지’ ‘AI 스피커 개선’ 등… 기억에 남는 순간들

“‘렛미인’ 프로그램 폐지 운동이 생각난다. 방송 폐지 운동이 ‘완벽하게’ 옳은 길인가에 대한 의문은 있었으나, 성형이 관광상품으로 개발되고 미디어의 영향력이 너무 컸던 지라 제동이 필요했다.”

이 부소장에게 가장 기억에 남는 활동에 대해 물었다. ‘렛미인’은 지난 2015년 폐지가 결정된 ‘성형 해주는’ 프로그램이었다. 이 프로그램이 인기를 끌면서 유사한 형태의 프로그램도 여럿 생겨났다. 미디어운동본부 등 시민사회는 성형의 긍정적인 측면만 다루고, 외모지상주의를 부추겨 외모에 의한 차별을 정당화한다는 이유로 이 같은 성형 프로그램을 비판해왔다. 

또한 방송을 통한 의료광고를 금지하고 있음에도, 방송 프로그램을 통해 성형외과 광고를 하고 있다는 비판도 있었다. 프로그램 홈페이지를 통해 출연하는 의사들과 병원에 이름을 그대로 노출했기 때문이다. 이에 미디어운동본부가 나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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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윤소 부소장은 첨단 기술로 인한 새로운 차별에 대해서도 우려했다. 실제로 차별적인 인공지능으로 인한 채용에서의 성별차별 사례가 있다. /사진=김경희 기자

“최근 AI(인공지능) 스피커가 ‘여성의 목소리’라는 이유로 성차별적인 관점의 대답을 했는데, 이를 개선해달라고 KT에 공문을 보내자 바로 개선된 내용으로 피드백을 줬다. 이같이 커뮤니케이션이 된다고 느낄 때 보람을 느끼는 것 같다.”

미디어운동본부는 지난 4월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를 통해 ‘#차별혐오_인공지능_필요없다’는 해시태그 운동을 벌였다. KT의 AI스피커가 성별을 묻는 질문에 ‘저는 아리따운 여자에요’라고, ‘자동차를 좋아하느냐’는 질문에는 ‘제가 여자라서 그런지 자동차에 관심이 없다’고 대답한 것이다. 좋아하는 색깔에 대해서는 ‘핑크’라고 답했다.

이에 미디어운동본부는 KT에 인권과 성평등 관점이 반영된 인공지능을 개발할 것을 요구하는 공문을 발송했다. KT는 지난 6월 ‘성별, 색깔 등 질문에 대한 답과 추가로 젠더이슈를 발굴해 수정했다’는 답변을 운동본부에 보냈다. 성별을 묻는 질문엔 ‘저는 가상에서 존재하는 비서랍니다’라고 대답하고, 자동차를 좋아하느냐는 질문에도 다양한 답변을 넣었다.

“외국에서는 차별적인 AI에 대한 이야기가 많이 나오지만 한국은 아직 지적되지 않고 있다. 그러나 한국은 첨단 기술의 확산 속도가 빠르다. 현재 한국은 대기업부터 공공기관까지 신입사원 채용에 AI를 도입하는 추세다. 문제는 기존 데이터의 편향이 있으니 AI도 편향이 생긴다. 이 편향을 줄이는 것이 중요한 과제고, 그런 활동의 일환으로 시작한 것이 ‘차별적인 인공지능 필요없다’ 해시태그 운동이다.”

이 부소장은 첨단기술로 인한 새로운 차별에 대해서도 우려했다. 아마존이 2014년 개발한 AI 채용 시스템은 여성 차별 문제를 일으켜 폐기된 바 있다. 취업준비생 이력서 평가 알고리즘에서 여대 졸업 등 ‘여성’이라는 키워드를 감점요소로 분류했고, 그 결과 경력 10년 이상 남성 지원자 서류만 추천한 것이다. 이전 10년간 남성이 IT 산업에서 지배적이었던 데이터를 그대로 학습했고, 이 데이터를 기반으로 추천자를 고르다보니 생긴 결과다.

◇ “아동·청소년 출연자 인권 지키는 노력 해야”

“최근 논란이 됐던 EBS ‘보니하니’도 사실 그 프로그램만의 문제는 아닐 것이다. 이제 방송사도 아동·청소년 출연자들을 어떻게 대우하고 배려할 것인지 고민을 해야 한다. ‘아빠 어디가’, ‘슈퍼맨이 돌아왔다’ 등의 프로그램을 보면 아주 어릴 때 방송에 나오는데 이 출연자들에 대한 인권을 지키려는 노력이 있는지 재고해봐야 한다. 방송 뿐 아니라 아동·청소년이 출연하는 미디어 안에서 인권을 지키기 위한 노력을 적극 해야 할 것이다.”

위에 언급된 ‘보니하니’는 최근 한 성인 출연자가 미성년자 MC에 대해 폭력적인 행동과 언어 성희롱을 하는 장면이 그대로 방송돼 논란이 있었다. 이 사례를 지적하며 이 부소장은 지난 8월 개봉한 영화 ‘우리집’의 촬영 수칙을 아동·청소년 출연자 배려의 사례로 들었다.

이 부소장이 언급한 ‘우리집’ 촬영수칙을 살펴보면 ▲머리 정리 등 신체 접촉을 할 때 미리 알리기 ▲어린이 배우 앞에서 욕하지 않기 ▲외모나 신체를 어른의 잣대로 평가하지 않기 등이 있다. 아이들이 주인공인 만큼 아역 배우 중심의 현장을 만들기 위한 감독의 배려였다.

우리집의 윤가은 감독은 시사회에서 “어린이 배우들은 의견 밝히기를 주저하거나 감정에 집중해야 할 때 스텝의 잡담을 거절하지 못하는 경우가 다반사”라며 “화면 속 아이들이 갖는 힘은 강력한 만큼 촬영 과정에서 어른들이 아이들을 부주의하게 대하는 일이 반복되선 안 된다”고 설명했다.

◇ “유튜브, 플랫폼 사업자의 사회적 책임 중요”

“그동안 TV 중심으로 활동해왔지만 시대가 많이 변하면서 뉴 미디어도 새로 생겨난다. 그 안에 어떤 문제가 있는지 발견해내고 활동하는 것이 우리에게 필요하다 생각하고, 활동 반경을 넓혀가는 것을 준비하고 있다.”

이전에 미디어운동본부의 활동 영역이 TV, 신문이었다면 이제는 다양해졌다. 가장 대표적인 사례는 유튜브다. 다양한 콘텐츠들이 올라오고, 유튜브 이용자들이 빠르게 증가하는 만큼 대중이 받는 영향도 커질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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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윤소 부소장은 더 많은 사람들이 미디어 차별에 대한 이야기를 해야 한다고 당부했다. /사진=김경희 기자

“유튜브가 확산되면서 플랫폼 사업자의 사회적 책임이 중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소수자, 페미니즘 이슈를 다루는 유튜버의 영상이 신고를 받고 채널 삭제가 되어버리는 일이 많았다. 이용자들과 잘 소통하고, 가이드라인의 투명성을 제고해야 한다. 유튜버들을 통해 유튜브(플랫폼)도 수익을 창출하지 않나. 그런데 유튜버들에게 유튜브들은 친절하지 않다.”

“요즘 어릴 때부터 유튜브를 접하다보니 꿈이 ‘유튜버’인 경우도 많다. 어릴 때부터 미디어와 함께하는데 생산자이자 이용자인 일반 시민들을 위한 미디어 교육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에 미디어운동본부는 지난 10월 ‘커뮤니티 가이드를 위반하셨습니까? : 페미니스트 유튜버 집담회’를 열었다. 이 자리에서는 유튜브 커뮤니티 가이드라인에 대해 공부하고, 실제로 ‘가이드라인 위반’이라는 명목으로 영상이 삭제된 사례를 공유했다. 

이 자리에서 참석자들은 “가이드라인은 필요한 규제 정책이지만, 영상이 삭제될 때 어떤 내용과 장면이 가이드라인을 위반한 것인지 구체적으로 알려주지 않고 유튜브 코리아의 조치를 기다리고 수용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고 지적했다.

끝으로 이 부소장은 “더 많은 사람들이 미디어 차별에 대한 이야기를 해야 한다”고 당부했다. 

“‘보니하니’도 생중계 된지 불과 몇 시간 만에 문제가 제기됐다. 미디어 이용자들 중 실시간으로 문제를 제기하는 사람들이 생긴 것이다. 이런 목소리가 나오는 것이 중요하고, 더 많은 사람들이 멈추지 않고 미디어 차별에 대한 이야기를 할 수 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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